황룡사지

황룡사지

다른 표기 언어 皇龍寺址 동의어 사적 제6호

요약 사적 제6호. 삼국시대 가장 큰 절로 대표적 왕실사찰이었다. 신라3보인 장륙존상과 9층목탑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장륙존상은 몽골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었지만 두 다리와 신광을 꽂았던 구멍이 남아 있는 3개의 자연석 대좌로 보아 장륙상은 5m 정도의 거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탑은 718년(성덕왕 17)에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나 1238년 몽골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553년(진흥왕 14)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나자 그곳에다 황룡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84년(진평왕 6)에는 금당을 건립했하고 몇 차례 중건되면서 고려시대까지 국가왕실의 보호 아래 호국사찰로서 숭앙되었다.

목차

접기
  1. 황룡사목탑지사리장엄구
  2. 황룡사지금동보살두
  3. 황룡사지금동불입상
경주 황룡사지 전경
경주 황룡사지 전경

사적 제6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553년(진흥왕 14)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나자 그곳에다 황룡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으며 574년에는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만들어 안치하고, 584년(진평왕 6)에는 금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645년(선덕여왕 14)에는 목탑을 세웠고, 그뒤 몇 차례 중건되면서 고려시대까지 국가왕실의 보호 아래 호국사찰로서 숭앙되었으나 1238년(고종 25) 몽골 침입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절터는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1976년 6월부터 1983년 12월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총면적 약 2만 여 평에 중문(中門)·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일탑식가람배치(一塔式伽藍配置)로 알려졌으나, 금당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이 나란히 있고 탑 앞쪽에도 역시 좌우에 종루(鐘樓)와 경루(經樓)로 보이는 건물이 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가람구조였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들은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특히 남회랑이 동·서 회랑보다 더 길게 연장되어 있고, 이 남회랑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북쪽으로 긴 건물지가 연결되어 있는 점 등에서 회랑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독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특이한 가람배치는 〈삼국유사〉에도 보이듯이 황룡사가 1, 2차에 걸쳐 가람이 형성되었다는 사실과도 일치된다. 현재 절터는 민가와 경작지로 변하여 흔적만 남아 있지만, 특히 신라3보(新羅三寶)인 장륙존상과 9층목탑이 있었던 석조대좌와 심초석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장륙존상의 조성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3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인도의 아소카 왕이 석가삼존불을 조조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황금 3만 분과 황철 5만 7,000근, 석가삼존의 모형을 배에 실어 바다로 띄우면서 인연이 있는 국토에서 장륙존상이 조성되기를 축원했는데 경주에 이르러 574년에 불상이 완성되었다한다. 이때 장륙존상의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이 1만 198분이 들었고, 두 보살상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분이 들었다고 한다.

이 황룡사장륙상은 이듬해 왕이 돌아갈 것을 미리 알고는 눈물을 발꿈치까지 흘려 땅을 1척이나 적셨다고 하는 설화가 전한다. 이 불상은 1238년 몽골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두 다리와 신광(身光)을 꽂았던 구멍이 남아 있는 3개의 자연석 대좌로 보아 삼존불입상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장륙상은 1장(丈) 6척(尺)이므로 보통 사람 키의 2배가 넘는 5m 정도의 거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기록에서 인도의 아소카 왕이 상의 모본을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지만 황룡사금동상이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이국적인 불상양식을 반영한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9층목탑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권3 황룡사구층탑조와 〈찰주본기 刹柱本記〉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법사의 발원으로 643년에 백제 장인인 아비지(阿非知)가 이간(伊干)·용춘(龍春)과 함께 200여 명을 거느리고 2년 동안 작업하여 645년(선덕여왕 14)에 완성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탑의 높이는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로 전체 80m에 이르며, 이 탑의 기둥 속에는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 등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 9층탑은 불력(佛力)으로 이웃나라의 침략을 막아 나라를 지킨다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濊貊)에 대항하는 것을 상징한다.

이 목탑은 718년(성덕왕 17)에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래 868, 872, 1012, 1022, 1064년에 각각 중수되었으나 1238년 몽골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삼국유사〉 권4 황룡사종(皇龍寺鐘)조에 보면 754년(경덕왕 13) 구리 49만 7,581근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을 만들었다고 하나 이 종도 역시 몽골 침입 때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외에도 금동불입상(높이 10㎝)을 비롯하여 풍탁(風鐸)·금동귀걸이·동경(銅鏡)·와전(瓦塼)·치미(높이 182㎝) 등 4만 점이 넘는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황룡사는 삼국시대에 가장 큰 규모의 절로 신라 불교수용 초기에 지은 흥륜사(興輪寺)와 함께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왕실사찰이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인도에서 전래된 상을 모본으로 만든 장륙존상이나 9층탑에 대한 전설, 가섭불이 앉았던 연좌석(宴坐石)의 기록 등에 의해서 신라가 석가탄생 이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불국토(佛國土)였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불교 문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황룡사목탑지사리장엄구

황룡사지의 9층 목탑지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사리장엄구. 목탑지는 가로·세로 모두 7칸으로 중앙에 심초석이 놓여 있는데 그 가운데 사리를 봉안했던 4각형의 구멍이 있고 그 위에는 크고 네모난 돌이 덮여 있다.

이 돌을 〈삼국유사〉 권3 황룡사장륙조에서 석가불과 가섭불이 설법했다고 하는 연좌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심초석 안에 있던 사리장엄구는 도굴되었으나 그뒤 다시 수습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가운데 금동사리내함 표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이 탑은 872년(경문왕 12) 완전히 부수고 다시 세웠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찰주본기〉에는 이 탑을 재건할 때 〈무구정광다라니경 無垢淨光陀羅尼經〉에 의거하여 철반 위에 작은 석탑 99기를 만들고 작은 탑마다 사리 1립과 다라니 4종을 넣어 안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동외함은 4매(가로 29.8cm, 세로 24.5cm)로 각 면에 신장상이 2구씩 새겨져 있는데 파손이 심한 편이다. 금동내함은 4각형으로 3매의 명문판(가로 33.5cm, 세로 22.5cm)과 앞면에 2장의 정방형인 금동판으로 이루어졌고 그 좌우에 2짝의 문비(門扉 : 가로 11.8cm, 세로 22.5cm)가 달려 있는데 문비의 안과 밖에는 신장상이 선각되어 있다.

이외에도 대좌와 옥개만 남아 있는 은제사리탑(높이 3.5cm)·금동8각사리탑(높이 2.2cm)·청동방함(높이 6.2cm)·은제원합(높이 5cm) 등이 발견되었다. 또 1978년에 실시된 목탑지의 2차 조사 때 심초석 밑에서 백자항아리·동경·금동제태환수식(金銅製太環垂飾)·수정옥·청동완·청동합 등이 수습되었다.

황룡사지금동보살두

신라시대 금동보살상의 머리. 높이 8.3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에 황룡사지 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현재 얼굴 부분만 남아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손이 심하며 도금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머리에는 삼산관을 쓰고 있고 얼굴은 둥글고 통통한 편으로 아래로 내려뜬 눈, 작게 표현된 입과 함께 미소를 띠고 있어 부드러운 인상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오른쪽 뺨에는 손가락을 댔던 흔적이 남아 있어 원래는 반가사유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 뒷면에는 두광을 꽂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돌기가 나와 있다. 이 보살 머리에 보이는 삼산관 형태의 보관이나 양감 있고 미소를 띤 얼굴 표정 등은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나 경주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의 반가상과 양식적으로 공통점이 발견되므로 그 제작연대는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황룡사지금동불입상

신라시대 금동불입상. 높이 20.1cm.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황룡사 절터에서 출토된 상으로 머리부분이 완전히 없고 불신만 남아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다.

비록 뒷면이 밋밋한 편불이고 크기는 작지만 어깨가 넓고 체구가 당당하여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손은 결실되었으나 팔의 위치로 보아 시무외·여원인의 수인임을 알 수 있다. 법의는 두꺼운 통견으로 걸쳤는데 가슴 앞에서 U자형의 옷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오면서 양쪽으로 뻗쳐 있고, 한쪽 옷자락은 가슴을 가로질러 왼쪽 팔 위로 넘겨져 있다.

이러한 옷주름 표현은 연가7년명금동불입상(539)·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563)·경4년명금동삼존불입상 등 삼국시대 초기 불상에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 불상은 연가7년명금동불입상보다는 양쪽 옷자락의 뻗침이 약화된 반면에 장식적인 요소가 강하므로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과 좀더 유사한 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슴 위로 승각기와 띠매듭이 표현된 것은 이들 불상에서는 볼 수 없다.

이 금동불상은 황룡사지에서 발견된 고식 불상 가운데 하나이며, 고신라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예로 중요한 자료상으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