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

자장

다른 표기 언어 慈藏 동의어 김선종, 金善宗
요약 테이블
출생 610(진평왕 32)경
사망 654(태종무열왕 1)경
국적 신라, 한국

요약 진골귀족 출신으로서 부모가 관음보살에게 기도하여 4월 초파일에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가 죽자 출가하여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고행을 했다.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선덕왕의 부름을 받고 귀국, 이때 대장경을 비롯한 각종 불교 관련 물품을 갖고 돌아왔다. 불교치국책으로 난국을 돌파하고자 했던 선덕왕을 도와 불사를 일으키는 데 전념했다.
그는 신라 왕실이 석가모니의 종족이라는 '진종설'을 만들었으며, 선덕왕을 포함해 진흥왕과 진평왕이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 정복군주라고 칭송하고 그 물증으로 신라삼보를 제시했다. 또 황룡사9층목탑을 세우는 한편, 대국통에 취임하여 불교교단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나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불교치국책은 당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던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견제를 받았고 결국 그는 도태당했다. 오대산에서 은거하다가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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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선종(善宗). 진골귀족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소판(蘇判) 무림(武林)이다.

부모가 관음보살에게 기도하여 4월 초파일에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가 모두 죽자 출가하여 깊은 산 속에 들어가 고행을 했다. 25세 때 선덕왕의 부름에 대하여, "내가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100년이라도 계를 깨뜨리고 살고 싶지는 않다"는 단호한 결심을 보이며 정식으로 출가했다. 638년(선덕왕 7)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장안(長安) 공관사(空觀寺)로 가서 법상(法常)에게서 보살계를 받고 공부했다.

다시 승광사(勝光寺)로 옮겨 당 태종(太宗)으로부터 환대를 받았으며 섭론학(攝論學) 등을 배웠다. 640년경 장안 근처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이후 3년간 수행을 했다. 이때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창조인 도선(道宣)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승광사로 다시 돌아와 당나라 왕실로부터 환대를 받다가, 643년 선덕왕의 요청에 따라 귀국했는데, 이때 대장경을 비롯한 각종 불교관계 물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신라왕실은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대내적으로 선덕왕은 성골이라는 왕위계승상의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여왕이라는 점 때문에 통치력에 불신을 받았으며,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 양국의 협공에 밀려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642년에는 백제에 대야성(大耶城)을 함락당하면서 그 위기는 더욱 가중되었다. 선덕왕은 불교문화를 중심으로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여 난국을 벗어나고자 하는 정책, 즉 '불교치국책'(佛敎治國策)을 실시했다(신라의 불교, 호국신앙). 왕이 중국유학중이던 자장을 급히 귀국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자장 역시 불교교단의 발전을 위하여 왕실 또는 국가권력의 도움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자장은 우선 신라가 부처와 인연이 깊은 불국토(佛國土)임을 주장했다. 석가모니 이전에 이미 가섭불(迦葉佛)이 신라에서 설법했는데, 그 증거물이 황룡사(皇龍寺)에 있는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座石)이라고 했다. 또 석가모니가 신라와 관련이 있음을 과시하고자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는 탑을 도처에 건립했는데, 그 대표적인 조형물이 645년에 그가 건의하여 세운 황룡사9층목탑이었다.

한편 석가모니의 후계자인 문수사리가 신라 동북방에 항상 머무르고 있다는 믿음하에 말년에는 문수사리를 만나고자 답사까지 했다. 그것은 나중에 오대산(五臺山) 신앙으로 전승되었다. 이와 같이 신라 땅이 부처가 대대로 머무르고 있는 불국토이므로 불국토를 다스리는 왕실도 자연히 성화되었다. 그는 신라 왕실이 석가모니의 종족이라는 '진종설'(眞種說)을 만들었으며, 선덕왕을 포함하여 진흥왕과 진평왕이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정복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칭송하고 구체적인 물증으로서 신라삼보(新羅三寶)를 제시했다.

이러한 일련의 불교치국책의 세력기반이 된 것은 역시 교단불교세력이었다. 그는 귀국 직후 비상설 직책인 대국통(大國統)에 취임하여 황룡사를 중심으로 불교교단을 대대적으로 숙정(肅正)하고 정비해나갔다. 명실상부하게 승정기구(僧政機構)가 정비된 것은 이때였다. 그는 통도사(通度寺)에 계단(戒壇)을 설치하여 승려들에게 계를 주었다. 그의 계율관은 〈사분율 四分律〉에 엄격히 입각하되 보살계정신을 가미한 형태였다.

자장은 이와 같이 대내적으로 불교치국책을 실시하여 체제를 정비한 다음 대외적으로 당나라와의 우호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것은 신라의 관복을 당나라 관복으로 바꾸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불교치국책은 당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의 연합세력에 의해 견제를 받았다.

이들 신진세력의 정책노선은 당 태종의 '정관지치'(貞觀之治)를 모델로 하는 유교치국책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덕왕대의 과도기를 거쳐 654년 김춘추가 왕권을 장악하고 중대(中代) 왕실을 개창하면서 자장은 도태당했다. 그는 오대산에서 은거하다가 곧 입적했다.

자장의 불교는 시대적인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그는 이른바 '구역불교'(舊譯佛敎)의 마지막 세대였다. 자장이 귀국한 직후 중국 불교계는 현장에 의해서 '신역불교'(新譯佛敎)가 수립되어 일세를 풍미하기 시작했다. 중대 불교를 연 원효(元曉)나 의상(義湘)도 출발점은 구역불교였으나, 그들은 재빨리 신역불교의 성과를 수용했다. 자장 말년에 그의 불교가 '아상'(我相)에 집착한 불교로서 비판받는 것은 이러한 사정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가 죽음으로써 그의 불교 전부가 폐기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불교는 중고기(中古期) 불교의 완결이자 중대 불교의 초석이 되었다. 적어도 그가 구축한 불교교단체제와 그 이념으로서의 계율사상만은 후대까지 강인하게 지속되어 이를 바탕으로 중대 불교가 전개될 수 있었다. 저서에 〈아미타경소 阿彌陀經疏〉 1권, 〈아미타경의기 阿彌陀經義記〉 1권, 〈사분율갈마사기 四分律羯磨私記〉 1권, 〈십송률목차기 十誦律木叉記〉 1권, 〈관행법 觀行法〉 1권이 있으나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