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

선종

다른 표기 언어 Zen , 禪宗 동의어 선불교, 禪佛敎

요약 교종에 대립하는 명칭이며 선불교라고도 한다. '불립문자', '교외별전'을 내세우며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주장한다.
선종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참구하여 본래 지니고 있는 성품이 부처의 성품임을 깨달을 때 부처가 된다는 것으로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처의 마음을 중생의 마음에 전하고 수행법으로 주로 좌선을 택한다.
선종이라는 명칭은 당나라 중기부터 그 종풍이 크게 흥성하여 교종과 대립하기에 이르자 사용되었다.
한국의 선종은 당나라에 유학했던 법랑에서 비롯되어 고려 중기에 다소 침체되다가 지눌과 보우의 출현으로 중흥을 맞았다.

교종(敎宗)에 대립하는 명칭이며 선불교라고도 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우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한다. 선종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참구하여 본래 지니고 있는 성품이 부처의 성품임을 깨달을 때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처의 마음을 중생의 마음에 전하므로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하며, 수행법으로 주로 좌선을 택한다. 그런데 선종은 좌선을 중시하나 그것만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 깨달음의 종교로서 일상의 모든 동작에서도 선을 실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집단노동을 중시하고 속어를 구사하는 일상의 문답으로 그 종지를 선양했다.

이때문에 각인각색의 수많은 어록이 남아 있고, 유교·불교·도교를 일관하여 민족문화의 재편을 구하는 전통도 형성되었으며 독자적인 선문화를 창출하기도 한다.

이 종파는 인도 승려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다(517/527). 인도로부터의 전승 계보를 따지면 보리달마는 28대 조사라고 하나 역사적 사실로는 분명하지 않다. 중국 선종의 전승 계보에서는 달마를 초조(初祖)로 삼고 혜가(慧可) 이하 세 선사를 거쳐 제5조 홍인(弘忍) 밑에서 남북 양종으로 나누어진다.

제5조 홍인 문하에서 혜능(慧能 : 638~713)이 남종선을 열었고, 신수(神秀 : 606~706)는 북종선을 열었다. 이 양분을 '남능북수'(南能北秀)라 한다. 또한 남종 혜능의 계보에서 청원(靑原)과 남악(南嶽)의 두 계통이 출현한다. 다시 청원의 후계로 조동종을 비롯한 운문종(雲門宗)과 법안종(法眼宗), 남악의 후계로 임제종과 위앙종의 여러 종파가 출현하여 선종의 융성은 극에 달한다.

개괄하면 당나라에서 송나라에 걸쳐 임제·조동·위앙·운문·법안의 5가로 나누어지고, 다시 임제로부터 황룡(黃龍)·양기(楊岐)의 2파가 나누어지는데, 이를 모두 합하여 5가7종(五家七宗)이라 한다. 이후 선종은 원대와 명대에도 그 위세가 유지되었다.

선종이라는 명칭은 당나라 중기부터 그 종풍이 크게 흥성하여 교종과 대립하기에 이르자 사용되었다.

그 시초는 8세기 말엽 티베트 왕에게 초빙되어 인도 승려와 대론했던 중국 승려 마하연(摩訶衍)이 스스로 돈오선종(頓悟禪宗)이라 칭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는 혜능으로부터 비롯된 남종 돈오의 입장이며, 대승불교의 여래선(如來禪)으로부터 중국 종교로서의 조사선(祖師禪)으로 전화된 것임을 의미한다. 북종은 8세기 말엽에 쇠멸했으나 여기서는 우두종(牛頭宗)이 분파되었다.

또 남북 양종과는 별도로 홍인 문하의 혜안(慧安)을 시조로 하는 정중종(淨衆宗)이 있었고, 이 계통을 이은 무상(無相)의 제자 무주(無住)는 보당종(保唐宗)을 열었다. 이밖에 남종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북종을 공격했던 신회(神會 : 668~760)는 하택종(荷澤宗)을 열었다. 8세기에 번창했던 하택종이 쇠망한 이후 회양(懷讓 : 677~744) 문하에서 홍주종(洪州宗)이 형성되었다.

이처럼 여러 파로 나누어지면서 발전한 중국 선종 형성의 사상적 배경에는 노장사상(老莊思想), 특히 장자(莊子)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장자의 사상을 정신적 풍토로 함으로써 인도 불교의 반야·공 사상이 중국적으로 변용되어 정착·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돈황에서 발견된 〈이입사행론장권자 二入四行論長券子〉는 달마와 혜가를 대표로 하여 초기 선종을 담당한 인물들의 어록인데, 이에 의하면 그들의 선은 철저히 반야를 실천해가려는 것이었다.

이 전통은 우두종이나 홍주종의 선과 직결되는 요소를 지닌다. 제4조 도신(道信 : 580~651)과 맥을 잇는다고도 간주되는 우두법융(牛頭法融 : 594~657)의 우두종은 삼론에 근거하는 공관(空觀)의 실천을 그 특색으로 한다. 즉 그는 삼론종의 계통을 받고 있어서 반야·공의 사상적 실천을 전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에 중국 선사상은 홍주종에 이르러 독자적인 전개를 맞았고, 이 전통을 최대한으로 전승한 것이 임제종이다. 홍주종은 모든 언어동작이나 선악도 불성 전체의 작용이라 하여 모든 행위가 다 진실이라 간주한다. 화엄 교학이 그 사상적 배경이다. 임제종의 사상적 특질은 온갖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무위(無位)의 진인(眞人)'을 추구하는 인간관에 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되, 자유로운 절대 주체의 생활방식을 행동을 통해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중국 선종이 신조처럼 표방하는 불립문자·교외별전·직지인심·견성성불 등도 이런 전개 과정에서 주장된 것으로 이해된다. 경전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주체는 불립문자·교외별전을 표방하고, 인간의 근저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인정하는 사상은 직지인심을 주장하게 되며, 나아가 내부에 있는 자기의 본성을 봄으로써 깨달음을 연다는 사고방식은 견성성불로 표현되었다.

한국의 선종은 법랑(法朗)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했다가 선덕왕·진덕왕 무렵에 귀국했다. 중국 선종 4조인 도신(道信)의 법을 이은 법랑이 신라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선법은 당에 유학하여 북종선(北宗禪)을 계승한 신행(神行)과 제자인 삼륜(三輪) 선사에 의해 중앙에 알려졌다. 이후에 활동이 뚜렷하지 않다가 준범(遵範)·혜은(慧隱)을 거쳐 도헌(道憲)에 이르러 산문을 형성했다가(曦陽山門) 도헌의 손제자(孫弟子)인 긍양(兢讓)에 이르러 법계를 바꾸었다. 즉 남종선 위주의 당시 불교계 분위기로 인해 남종선을 받아온 쌍계사 혜소(慧昭)를 도헌의 스승이라 일컫게 되었다.

그리고 희양산파 이외의 8개 선문은 남종선을 수용했다. 도의(道義)는 821년에 귀국했는데, 신라 불교계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했고, 후일 염거(廉居)를 거쳐 체징(體澄)에 이르러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세워 선풍을 떨쳤다. 홍척(洪陟)은 826년 귀국한 후 지리산에 실상사를 세워(實相山門) 흥덕왕과 선강(宣康) 태자의 귀의를 받았으며 수철(秀澈)이 계승했다.

혜철(惠哲)도 839년 귀국해 선법을 전했다. 태안사(泰安寺 : 전남 곡성)를 중심으로 선법을 폈으며(桐裡山門), 도선(道詵)·경보(慶甫)·여대사(如大師)·윤다(允多) 등이 계승했다. 한편 무염(無染)은 845년 귀국하여 성주사(聖住寺 : 충남 보령)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聖住山門), 대통(大通)·여엄(麗嚴) 등이 계승했다.

현욱(玄昱)은 839년 귀국하여 혜목산(慧目山 : 경기 여주) 고달사(高達寺)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그중 심희(審希)가 봉림사(鳳林寺 : 경남 창원)를 세우고 선법을 전했으며(鳳林山門) 찬유(璨幽) 등에게 이어졌다. 도윤(道允)과 범일(梵日)은 847년 귀국하여 선법을 전했다. 도윤의 제자인 절중(折中)은 사자산 흥녕사(興寧寺 : 강원 영월)에 머물며 제자를 양성했으므로 사자산문(師子山門)이라 칭했다.

그리고 범일은 굴산사에 머물렀는데, 제자 개청 때에 이르러 사굴산문을 형성했다. 가장 늦게 성립한 산문은 수미산문(須彌山門)으로, 911년 귀국한 이엄(利嚴)이 고려 태조의 귀의를 받아 932년 수미산 광조사(廣照寺 : 황해도 해주)에 머물며 법을 전했다. 그밖에도 범패를 전한 쌍계사 혜소와 중국 위앙종의 선풍을 전한 순지(順之) 등도 있었지만, 뚜렷한 산문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고려초 선종의 특징은 법안종 수입에 있다.

법안종은 선사상을 중심으로 다른 불교사상을 종합하려는 것이다. 고려 중기 이후 다소 침체되다가 지눌(知訥)과 보우(普愚)의 출현으로 중흥을 맞았다. 13세기초 지눌이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寺)를 열고 선풍을 크게 진작시키면서 선종 내에 조계종파가 성립되었다. 14세기 중엽에는 태고 보우가 국왕으로부터 승정권(僧政權)을 위임받아 불교계를 장악하면서부터 사실상 조계종이 불교계를 주도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던 시기에는 조계종의 나옹(懶翁)·자초(自超) 계통이 조선 왕실의 후원을 받아 불교계를 주도했다.

그러나 조선 왕조가 억불정책을 실시하면서 조계종단도 타격을 받았다.

조계종 승려 성민(省敏)은 불교계를 대신하여 조선의 억불정책에 항의했지만, 결국 1424년(세종 6)에 천태종·총남종(摠南宗)과 함께 선종으로 강제 통합되었다. 그후 조선 중기 서산대사 휴정(休靜)이 교선일치를 주장한 이래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해왔다.→ , 선문9산, 조계종

선종(禪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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