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

지눌

다른 표기 언어 知訥 동의어 목우자, 牧牛子, 불일보조, 佛日普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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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158(의종 12), 황해 서흥
사망 1210(희종 6)
국적 고려, 한국
종교 불교

요약 조계종을 창시해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준 고려 의종 때의 승려. 호는 목우자로 1182년 창평 청원사에 머물며 경전 공부에 매진, <육조단경>을 읽고 처음 깨달음을 얻었고 1185년 보문사에서 3년간 대장경을 열람하면서 선과 교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고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1190년에 거조사에서 결사를 실행했다가 결사원 사이에 분쟁이 생기자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은둔해 <대혜어록>을 보다가 세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수행원이 차츰 모이자 결사를 새로 시작하고 길상사로 옮겨 결사운동에 정진했다. 1210년 법당에서 문도들과 대화를 나눈 직후 입적했다.

성은 정씨(鄭氏). 호는 목우자(牧牛子).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광우(光遇)이고,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8세 때 선종 사굴산파의 종휘(宗暉)에게 출가했다. 이후 일정한 스승을 따르지 않고 배움에 정진했다. 1182년(명종 12)에 승과에 합격했다. 이무렵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했다가, 동료들과 함께 후일 결사(結社)를 하기로 약속했다. 곧이어 남쪽 지방으로 내려와 창평 청원사(淸源寺)에 머물 때 〈육조단경 六祖壇經〉을 읽고 처음 깨달음을 얻었다. 1185년에는 예천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가서 3년간 대장경을 열람했는데, 이때 〈화엄경 華嚴經〉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과 이통현(李通玄)의 〈화엄신론 華嚴新論〉을 읽고 선(禪)과 교(敎)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이것이 2번째 깨달음이었다.

1190년 몽선화상(夢船和尙)과 함께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로 옮겨가 동지들을 불러모은 다음 예전에 약속했던 결사를 실행했다. 결사의 이름은 '정혜'(定慧)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을 반포했다. 정혜결사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왕족과 관료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승려들이 결사에 동참했다. 그러나 결사원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결사정신이 지켜지지 않자, 1197년에 거조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은둔했다.

여기서 오로지 수행에 정진했는데, 하루는 〈대혜어록 大慧語錄〉을 보다가 3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수행인이 차츰 모여들자 결사를 새로 시작하고자 제자 수우(守愚)를 보내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를 중창하게 했다. 1200년(신종 3) 정혜결사를 거조사에서 길상사로 옮기고 이후 11년간 그곳에 머무르며 결사운동에 정진했다.

1205년(희종 1)에 길상사가 준공되자 왕은 이름을 '조계산수선사'(曹溪山修禪社)로 고치게 하고 가사를 하사했으며 120일 동안 낙성법회를 열게 했다. 지눌이 이곳에서 교화를 시작하자 그의 인격에 감화되어 왕공(王公)과 사서(士庶)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결사에 동참했다. 지눌은 이들에게 〈금강경 金剛經〉을 읽도록 권하고 〈육조단경〉의 이치를 가르쳤으며, 〈화엄신론〉과 〈대혜어록〉으로 보조교재를 삼았다. 억보산(億寶山) 백운정사(白雲精舍), 적취암(積翠庵), 서석산(瑞石山) 규봉난야(圭峰蘭若), 조월암(祖月庵)도 모두 지눌이 개창하여 선을 수행하는 도량으로 삼은 곳이다.

1210년 3월 법당에서 문도들과 대화를 나눈 직후 입적했다.

지눌(知訥)
지눌(知訥)

지눌이 활약한 시기는 무인란이 일어나 정치세력이 무신들로 교체되면서 불교교단도 재편되던 때였다. 즉 종래 중앙의 정치세력과 밀착되어 있던 개경 중심의 중앙불교는 종파를 막론하고 거의가 몰락했으며, 새로이 지방에서 결사운동이 대두하여 불교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성불교교단의 모순, 즉 정치세력과 지나치게 밀착함으로써 야기된 폐단과 선종과 교종 간의 극단적인 대립상을 비판하며 불교개혁을 추진했다(고려의 불교). 그중에서도 침체된 선을 부흥시키면서 불교계를 개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수선사였다. 지눌은 인간의 심성(心性)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을 토대로 실천체계로서 3문(三門)을 제시했다. 첫째,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으로, 중국 당대(唐代)의 선종 승려 하택신회(荷澤神會)의 이론을 받아들여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 : 先悟後修)에 입각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했다.

둘째,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인데, 여기서는 역시 당의 화엄학자 이통현의 학설을 받아들여 화엄과 선이 근본에 있어서 둘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셋째,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이다. 이는 수행의 최종적인 단계로서 송대(宋代) 임제종 승려 대혜종고(大慧宗杲)의 간화선(看話禪)에 영향을 받았다.

이와 같이 지눌이 궁극적으로 표방한 것은 간화선이었다. 그러나 간화선에 철학적인 기초를 부여한 것은 중국 간화선과 다른 지눌의 독창이었으며, 더욱이 하택신회나 이통현과 같이 중국불교계에서 비정통인 사람들의 이론을 원용한 것은 매우 색다른 점이다. 지눌의 불교는 종래 대립관계에 있던 선과 교를 이론적으로 일치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불교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제자로는 혜심(惠諶)·몽여(夢如) 등 수백 명이 있다. 저서로는 〈권수정혜결사문〉 1권, 〈진심직설 眞心直說〉 1권, 〈수심결 修心訣〉 1권, 〈계초심학인문 誡初心學人文〉 1권, 〈원돈성불론 元頓成佛論〉 1권, 〈화엄론절요 華嚴論節要〉 3권, 〈간화결의론 看話決疑論〉 1권,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1권, 〈염불요문 念佛要門〉 1권, 〈육조단경발문 六祖壇經跋文〉 1편(이상은 현존함), 〈상당록 上堂錄〉 1권, 〈상당가송 上堂歌頌〉 1권, 〈목우자시집 牧牛子詩集〉 1권(이상은 전하지 않음) 등이 있다.

죽은 뒤 문도들이 시신을 화장하고 수선사 북쪽에 탑을 세워 사리를 안치했다. 사후에 국사로 추증되었으며, 김군수(金君綏)가 비문을 지었다.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