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종

임제종

다른 표기 언어 Linchi tsung , 臨濟宗

요약 임제는 마조도일이 대성한 남종선의 전통을 더욱 철저히 하여 '무위의 진인'이라는 절대 주체를 세우는 도를 확립했다. 아울러 스승인 황벽희운의 선풍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선사상과 준엄한 선풍을 확립함으로써 임제종을 형성했다. 이후 송나라 때는 두 파로 갈리면서 크게 번영하여 중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즉 석상초원의 제자로 황룡혜남과 양기방회가 배출되어 이들로부터 각각 황룡파와 양기파가 성립했다. 임제종의 사상적 특질은 온갖 속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무위의 진인' 또는 '무의의 도인'을 추구하는 인간관에 있다. 인간의 적나라한 삶을 긍정하면서 진정한 견해를 얻는 자유인을 추구한다. 송대 이후 임제종은 수행자의 견성을 위한 수단으로 선사의 언행록인 공안을 사용하는 공안선 또는 간화선을 고취했다.

임제는 마조도일이 대성한 남종선의 전통을 더욱 철저히 하여 '무위의 진인(眞人)'이라는 절대 주체를 세우는 도(道)를 확립했다. 즉 '무위의 진인'이라는 이상적 상태야말로 선(禪)의 경지라고 하여, 간명하고도 직각적으로 분별하는 말로써 그것을 설했다.

아울러 스승인 황벽희운(黃檗希運:?~850)의 선풍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선사상과 준엄한 선풍을 확립함으로써 임제종을 형성했다. 이후 송나라(960~1279) 때는 두 파로 갈리면서 크게 번영하여 중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즉 석상초원(石霜楚圓)의 제자로 황룡혜남(黃龍慧南:1002~69)과 양기방회(楊岐方會:992~1049)가 배출되어 이들로부터 각각 황룡파와 양기파가 성립했다. 임제종의 사상적 특질은 온갖 속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무위의 진인' 또는 '무의(無依)의 도인'을 추구하는 인간관에 있다. 눈앞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지금 살고 있는 인간을 문제삼아 인간의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를 추구했다. 자유로운 절대 주체의 생활방식을 행동을 통해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인간의 적나라한 삶을 긍정하면서 진정한 견해를 얻는 자유인을 추구한다. 이리하여 마조로부터 비롯되는 홍주종(洪州宗)은 임제에 이르러 생기가 넘치며 활동하는 선, 즉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선으로 총괄되어 임제종의 전통을 형성한다. 송대 이후 임제종은 수행자의 견성을 위한 수단으로 선사의 언행록인 공안을 사용하는 공안선 또는 간화선을 고취했다. 이 간화선은 공안을 통해 본래 지닌 불성을 자각하여 지혜에 의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이지만, 좌선을 경시하여 선 본래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국의 임제종

한국의 선종은 대체로 임제종의 전통을 받아들였다고 하나, 중국 임제종의 법맥이 좀더 뚜렷하게 계승된 것은 고려말의 태고와 나옹 이후부터이다. 그러나 임제종이라는 명칭으로 교단이 설립된 적은 없다.

그후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가 원종의 종정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과 연합체맹에 합의하는 등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는 데 대항하여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1910년 10월 전라도의 박한영(朴漢永)·진진응·김종래(金種來) 등을 중심으로 광주 증심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었으나 호응이 미비했다.

이에 한용운(韓龍雲)·오성월(吳性月) 등이 가세하여 격문을 돌리는 등 크게 운동을 일으켜 1911년 1월 영남과 호남의 승려들을 규합하여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조선의 선종이 태고보우 이래로 임제종 계통이었다는 이유로 종명을 이처럼 정했다.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두고 관장으로 선암사의 김경운(金擎雲)을 선정했으나 한용운이 대리 관장으로 종무를 맡았다.

한용운
한용운

1912년 하동 쌍계사에서 제2차 총회를 열고, 종무원을 범어사로 옮겼으며 광주·서울·대구·동래 등지에서 포교당을 개설하는 등 서울의 원종과 대립했다. 그러나 1911년 6월 반포된 사찰령에 의해 전국의 사찰이 30본산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점차 힘을 상실하고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