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광

이회광

다른 표기 언어 李晦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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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2, 강원 양양
사망 1933, 서울
국적 한국

요약 승려.

법명은 사선(師璿)·유선(有璿). 호는 회광. 19세에 설악산 신흥사 설허(雪墟) 문하의 정함(定含)에게 출가했다. 1890년 건봉사 주지 긍엽(亘葉)의 법을 이어받고, 개강하여 교학을 널리 폈다. 1895년 일승(日僧)의 건의로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가 해제되었던 일을 계기로 하여, 조선 승려의 친일행위가 가속화되었다. 또 의병투쟁시 사찰이 의병의 거점이 되면서 사찰의 피해가 심해지자 오히려 일본군의 사찰 주둔을 원하기조차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회광은 여러 차례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했다.

1906년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받아 불교연구회명진학교가 설립되었는데, 1907년 이회광이 이 단체의 회장 및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어 1908년 서울 원흥사에 전국의 사찰 주지들을 모아놓고 원종을 설립, 그 초대 종정에 취임했다. 또 일본 조동종 승려인 다케다[武田範之]를 원종 고문으로 추대하고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에 종속시키려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이회광은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조약을 몰래 체결했으나, 총독부가 1911년 사찰령을 반포하고 조선 승려들이 임제종을 만드는 등의 조직적인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일제강점기). 그러나 이회광은 사찰령에 따라 조선불교가 30본산 체제로 전환되자 총독부의 승인을 얻어 초대 해인사 주지가 되고 이어 조선선교양종 각본산주지회의원 원장이 되어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행정을 펴는 등 친일행각을 계속했다.

또 1920년 일본 임제종에 조선 불교를 종속시키려는 음모를 꾀했으나 동경의 조선불교유학생청년단이 음모를 폭로하며 크게 반발하여 실패했다. 1923년 해인사 승려들이 이회광 사면 탄원서를 내는 등 큰 물의가 빚어졌고, 1924년에는 해인사 주지가 만응으로 바뀌었다. 1933년 견성선원에서 세수 72세, 법랍 53세로 입적했다. 저서로 〈목암집 牧庵集〉(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