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미술

조선시대 미술

다른 표기 언어 朝鮮時代美術

요약 1392~1910년에 전개된 조선왕조의 미술.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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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시대의 건축
  2. 조선시대의 공예
  3. 조선시대의 서예
  4. 조선시대의 조각
  5. 조선시대의 회화

조선시대의 미술은 국가의 지도 이념인 성리학적 가치관에 의해 새로운 민족미술을 형성하는 등 한국미술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명·청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양식과 특색을 형성했던 이 시대의 미술은 국가 운영의 주체세력인 사대부들의 친자연적·한문학적인 교양을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그중에서도 회화는 이러한 기반을 토대로 조선시대 미술의 성격과 흐름을 주도하면서 근대미술로의 전환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미술
조선시대 미술

조선시대의 건축

조선시대의 건축은 크게 목조건축과 석조건축으로 나눌 수 있다. 목조건축으로는 궁궐·사찰·향교·서원 등이 주종을 이루었고, 건축양식은 고려시대에 수용되었던 주심포와 다포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덕수궁 전경
덕수궁 전경

주심포는 초기에 조성된 사찰의 주요법당을 비롯하여 지방의 성곽문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다포는 궁궐의 정전과 주요건물 및 사찰의 법당에 주로 사용되었고 중기 이후에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주심포 양식은 간략화된 익공 양식으로 변화되어 궁궐의 침전, 사찰의 부속건물, 향교와 서원 등의 유교적 건물, 이밖에 개인 건물 등에 사용되었다.

전반적으로 초기와 중기에는 건물 전체의 통일적인 구조에 중점을 두었지만, 후기에는 각 부분이 강조되면서 장식화되는 성향을 보인다. 석조건축으로는 석탑·부도·석교 등을 들 수 있다. 석탑은 사찰의 중심지에서 외곽으로 옮겨져 조성되었으며 명과 청나라의 양식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승탑인 부도의 조성은 조선시대를 통해 더욱 보편화되었고, 고려말부터 유행했던 복발탑 형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석교는 홍예식과 미식의 2종류가 있다.

조선시대의 공예

조선시대의 공예는 간결·대담·소박한 특색을 보이면서 보다 대중화되는 경향을 나타냈다. 그러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도자기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앞시대에 비해 낙후된 양상을 보였다. 이 시대 공예의 주류를 이루었던 도자기는 15, 16세기에는 분청사기(粉靑沙器)가 성행했고, 17세기 이후에는 백자가 대종을 이루었다.

백자철화매죽문대호
백자철화매죽문대호

분청사기는 크게 감화분청·인화분청(印花粉靑)의 상감계(象嵌系)와 박지분청·철화분청(鐵畵粉靑)·분장분청(粉粧粉靑) 등의 백토계(白土系)로 나눌 수 있다. 고려시대 상감청자의 전통을 계승한 상감계 분청은 제작기술이 우수한 관수용으로 15세기를 통해 널리 제작되었다. 소박하면서 활달한 느낌을 주는 백토계 분청은 상감계에 비해 태토가 거칠고 제작기술이 뒤떨어지지만, 보다 저변화된 것으로 전국에서 제작되어 지방적 특색을 보이며 16세기에 주로 제작되었다.

백자는 문양이 없는 순백자를 비롯하여 음각백자·상감백자·청화백자(靑華白磁)·철화백자·진사백자(辰砂白磁) 등이 제작되었다. 백자는 초기에는 소량의 최고품만을 생산하여 왕실에서 사용했지만, 분청사기가 소멸되는 17세기경부터는 도자기의 주류를 이루게 되며 관요인 경기도 광주의 분원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이밖에도 조선시대의 공예는 관공장인 경·외 공장들에 의해 나뭇결의 자연스러운 조화미와 비례미·형태미 등을 특징으로 하는 목칠공예를 비롯하여 금속공예·염직공예·피혁공예·초고공예(草藁工藝)·지공예(紙工藝) 등 다양한 종류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장인들에 대한 신분차별과 공역의 부담, 기예 천시 풍조 등 열악하고 부자유스러운 제작여건 때문에 공예분야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서예

조선시대의 서예는 회화와 함께 사대부들의 교양미술로서 쌍벽을 이루며 크게 성행했다.

신위의 요화시
신위의 요화시

초기에는 고려 말기에 수용된 균정미 넘치는 송설체가 국서체로서 크게 풍미했는데, 이는 안평대군 이용(李瑢)에 의해 주도되었다.

중기에는 한호에 의해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그는 왕희지체에 조선화된 송설체를 가미하여 단정하고 정려한 석봉체를 이룩하여 당대의 서예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후기에는 이숙(李淑)이 왕희지의 진체에 미불(米芾)의 필의를 가미하여 동국진체를 창안했으며, 이 서체는 윤두서(尹斗緖)와 윤순(尹淳)을 거쳐 이광사(李匡師)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또한 이광사는 윤순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용된 명대 문징명체를 가미하여 원교체를 이룩하기도 했다.

말기에는 북학파 실학자들을 통해 소개된 청대 고증학파의 신서학 경향이 김정희(金正喜)에 의해 추사체로 완성되어 크게 유행했다. 그는 서법의 근원을 전한예에 두고 이상적인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여 일세를 풍미했으며 그 영향은 근대로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의 조각

조각은 불교·능묘·민속 조각으로 크게 나뉘어 전개되었다. 불교조각은 억불숭유정책에 의해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양상을 보였다. 수명장수나 극락왕생과 관련된 아미타불상·관음보살상·지장보살상이 주로 조성되었다.

연곡사서부도
연곡사서부도

초기에는 고려의 불상양식이 계승되었으며, 중기에는 명나라의 불상양식이 가미되어 표현되었다. 후기에는 숙종·영조·정조 연간을 중심으로 새로운 활기를 띠며 불상이 조성되면서 조선적인 특징이 형성되었으나, 말기를 통해 질적인 저하와 함께 평면화·방형화되면서 토속적인 양태로 도식화되었다. 능묘조각은 왕릉 등에 설치되어 있는 문무석인상과 각종의 동물상들로 불상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민속조각으로는 동자상·장승·목가면 등이 있는데, 동시대의 계층적·지역적 미의식을 반영하면서 제작되었고, 이밖에 공자와 관우상 등 유교조각과 도교조각도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의 회화

조선시대의 회화는 고려시대까지 큰 비중을 차지했던 불화가 쇠퇴하면서 일반회화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대의 회화는 왕조통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교화를 이룩하고 인륜을 돕는 데 긴요한 시각매체로서 적극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왕조 운영의 지도세력으로 문화상황을 이끌었던 문인사대부들의 미술로 즐겨 애용되면서 당시 조형예술의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사대부들은 고려 후기에 관료지식인으로 새롭게 등장한 문사들의 회화관을 계승하여 시와 함께 그림을 상호간의 감흥교환과 심의표출 및 심성수양의 매체로 삼으면서 이 시대 회화발전에 계도적인 구실을 했다. 국가에서는 개국초부터 회사를 전담하는 도화서를 확장·설치하고 화원들을 양성하여 이러한 회화상황의 정착과 발전에 기여하도록 했다.

초기(1392~1550)에는 이상경을 소재로 하는 정형산수화가 유행했으며, 북송·남송·원의 양식에 토대를 두고 발전된 고려 말기의 화풍을 계승하여 새로운 안견파 화풍이 형성되었다. 넓은 공간개념, 삼단구도법, 농담의 대비가 심한 필묵법을 특징으로 하는 안견파 화풍은 중기 화단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일본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수묵화 발전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중기(1550~1700)에는 정형산수화에서 안견파 화풍이 계속 유지되는 한편, 절파풍이 가미된 짙고 평판적인 강렬한 수묵법에 의한 소경인물화가 유행했다. 사대부들의 처사적 성향과 밀착되어 자연과의 친화관계를 보여주는 이러한 소경인물화는 산수의 한 부분을 배경으로 구성된 고사산수인물화의 성격을 띠며 전개되었다. 그리고 화조·동물·대나무·매화·포도 분야에서도 사대부들의 정서와 고담한 수묵풍을 특징으로 하는 서정적인 화풍이 형성되었다.

조선화가 이경윤 그림
조선화가 이경윤 그림

후기(1700~1850)에는 신분상승의 욕구에 의해 사대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시·서·화를 겸비하고 이를 향유하는 문인풍조가 서얼출신과 중인층에까지 확대되었다. 따라서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고, 품평하고, 수장하는 등의 회화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으며 진보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회화 자체에 대한 인식이나 창작에 관한 이념이 새롭게 제시되었다. 또한 표현기법도 명대 후기부터 크게 발흥되었던 남종화법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기존의 화풍을 쇄신시켜나갔으며, 사실적인 묘사력의 강화를 위해 서양화법이 부분적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의 산천과 각 계층의 현실적 삶의 모습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종래와는 질적으로 변모된 모습을 보이며 널리 성행했다.

이밖에 경제력의 전반적인 향상으로 길상과 벽사적인 성격을 지닌 세화 등 생활장식화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말기(1850~1910)에는 여항문인화가들의 활약이 더욱 커지면서 시·서·화가 일치된 문인화의 확산과 함께 사군자 등과 같은 문인적인 화목이 널리 성행되었다. 그리고 1890년대부터 1910년 사이에는 서양인과 일본인 화가의 내한으로 근대로 전환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