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

분청사기

다른 표기 언어 粉靑沙器

요약 조선 전기(15~16세기)에 상감청자 장식기법의 전통을 계승하여 회청색의 태토 위에 백토니를 상감하거나 분장한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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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종류
분청사기(粉靑沙器)
분청사기(粉靑沙器)

조선 전기에는 청자라고 불렀지만 20세기 전반에 와서 고유섭이 '백토로 분장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의미에서 분청사기라는 명칭을 붙였다. 여기서 사기는 19, 20세기 전반에 일반인이 쓰던 백자들 중에서 비교적 조질을 가리키는 '상사기'에서 따온 것으로서 분청사기가 청자에 비하여 조질이 많았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분청사기는 유태나 장식기법에서 14세기의 상감청자를 계승한 것이지만, 15세기 중기에 이르면 상감청자의 조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모를 하면서 수요자층이 확대되어 다량생산체계에 들어섰다. 즉 고려 말기에 상감청자 요지는 20여 개소에 불과했지만 조선 전기에 분청사지 요지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200여 개소에 이르렀다.

질적으로도 양질과 조질 등 다양해졌으며, 기종·시문·기법·문양소재 등 다종다량 생산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종류

분청사기의 종류는 장식기법으로 분류하는데, 우선 백토니로 시문하는 방법에 따라 상감분청계와 분장분청계로 나뉜다.

상감분청계는 고려시대 상감청자의 기법을 계승하여 새롭게 변모시킨 것이다. 우선 태토 위에 음각이나 압인(押印)을 한 다음 백토 상감한 것으로, 음각을 사용한 것을 상감분청이라 하고, 압인으로 상감한 것은 인화분청(印花粉靑)이라 한다. 상감분청은 선(線) 상감과 면(面) 상감으로 나뉘며, 상감청자의 섬세하고 조용한 문양에서 대담하고 박력 있는 강한 문양으로 변모한다.

1420년대에 제작된 정소공주묘(貞昭公主墓) 출토 분청상감인화문사이호(粉靑象嵌印花紋四耳壺:국립중앙박물관)는 문양의 소재나 포치법(布置法)에서 이미 상감청자 유형에서 벗어나 조선적인 특징인 전면을 채우는 분청사기 특유의 구도가 나타나 있다. 반면에 전통적인 문양을 계승하고 있는 분청상감정통5년명연어문묘지(粉靑象嵌正統五年銘蓮魚紋墓誌)도 제작되고 있어서 보수적 문양과 혁신적인 문양이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상감분청의 기법은 분장분청계의 새로운 기법의 유행으로 서서히 퇴조한다. 인화분청은 같은 형태의 도장을 반복하여 찍고 백토 상감한 것으로 양질의 인화분청사기는 관납(官納)을 위하여 관청의 명칭인 장흥고(長興庫)·내섬시(內贍寺)·내자시(內資寺) 등을 새긴 경우가 많이 전하고 있다. 특히 존속기간이 짧은 공안부(恭安府:1400~20)·경승부(敬承府:1402~18) 등의 인화분청대접들은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5세기 전반에는 인화상감이 전면을 꽉 채우고 질도 고급화되었으며, 상감분청과 공존했다.

16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분장분청계의 기법과 혼용되다가 16세기 중반에 소멸되었다.

분장분청계는 기명(器皿)에 우선 백토를 귀얄붓으로 분장한 다음 문양을 나타내기 위하여 백토를 선(線)으로 긁어내고 바탕의 태토를 드러내면 조화분청(彫花粉靑), 면(面)으로 긁어내면 박지분청(剝地粉靑), 분장된 뒤에 철화(鐵畵)를 하면 철화분청이라고 한다.

또 백토만 바르는 경우 귀얄붓으로 발라서 붓자국이 나타난 것은 귀얄분청, 백토를 풀은 물에 그릇을 덤벙 담구어 백토를 씌우는 경우는 덤벙분청이라고 부른다. 이 기법들은 대부분 단독으로 사용되지만 상감·인화·철화 기법이 혼용되어 다양한 장식기법의 조화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박지분청은 문양의 배경을 면으로 긁어낸 것으로 송광사(松廣寺) 고봉화상(高峯和尙)의 골호(骨壺)인 분청박지연어문호(粉靑剝地蓮魚文壺)가 있다.

이 골호는 발견 후 다시 탑(塔)에 안장했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상하단에 연판문을, 그리고 중앙 전면에 연화 사이로 물고기가 유어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문양소재는 상감청자에도 있지만 표현이 크고 대담하여 마치 사생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표현법은 비교적 정교하게 이루어졌지만 조화분청에서는 단순화와 생략화가 강조되고 있다. 단순한 몇 개의 선으로 대상이 지닌 성격을 적절하게 묘사하거나 의미가 없는 선으로 면을 분할하고 다시 그 공간을 채워넣는 문양은 현대미술의 표현주의적 기법과 유사성을 보여준다.

철화분청은 백토분장 후 산화철을 안료로 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명은 발견되지 않았다.

분청철화성화23년명묘지(粉靑鐵畵成化二十三年銘墓誌:1487, 국립중앙박물관)는 기명이 아닌 특수한 예이지만 15세기 후반에 철화기법이 시문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그후 홍치3년 명묘지(1490), 가정15년 명묘지(1536)등이 있어서 철화기법의 존속을 알려주고 있다. 철화기법의 문양은 조화기법의 문양과 조형적으로 유사하며, 2가지 모두 간결한 빠른 운동감을 지니며 질적으로는 도기질에 가까운 조질이다.

귀얄분청은 귀얄붓으로 백토를 바를 때 농담이 마치 문양을 의도한 것처럼 나타나고 있다. 온녕군(溫寧君:1454 죽음) 묘에서 출토된 귀얄분청에서 백토의 농담이 잘 나타나고 있으며, 상감분청계가 성행하는 15세기 중반에도 귀얄분청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장분청계의 기법들은 15세기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문양시문의 편의상 대부분 조질분청에 시문되었으며, 상감분청계가 퇴조하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성행했다.

청자에도 양질과 조질이 항상 공존하고 있지만 분청사기는 질적 격차가 더 심하다. 양질인 상감분청과 인화분청은 관납용이나 상층계급의 수요를 대상으로 했던 것으로 유태가 정선되고 갑발에 넣어 번조한 상품이 중심을 이루었고, 중품과 하품도 공존했다. 그러나 분장분청계는 대부분 중품이나 하품에 속하고 있다. 특히 분장분청계에는 관납을 목적으로 관사명이 새겨진 예가 알려지지 않아서 일반인의 생활용기로 폭넓게 다량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토의 조질화, 번법의 상번화, 시문의 간략화 등은 분장계 제작상의 특징이며 다량생산의 결과인 문양시문의 속도감과 대범한 문양구도 등이 조형적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기법으로 다량생산되었던 분청사기가 16세기 후반에 소멸된 원인을 분명하게 밝힐 수는 없다. 전체적인 조질화의 경향이 수요자층의 하락을 가져왔을 것이며, 따라서 제작기술에도 새로운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15세기부터 활발해진 백자에 대한 일반의 수요욕구가 분청사기의 생산을 위축시켰을 가능성도 높고, 16세기부터 다량 수입되기 시작한 일본산 동(銅)의 확산으로 유기가 일상용기로 유행하면서 나타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세계도자사의 큰 흐름이 14, 15세기에 청자 중심으로부터 백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로도 볼 수 있다.

분청사기의 소멸로 고려청자의 조형적 전통은 사라지고 그후 새로운 조형의 백자가 한국도자사의 큰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