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파

절파

다른 표기 언어 Che School , 浙派

요약 중국 명대(明代) 초기의 화파.
(병). Zhe. (웨). Che School.

개조(開祖)로 알려진 대진(戴進:1388~1462)이 주로 활동했던 그의 고향 저장 성[浙江省] 전당(錢塘)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그를 직접·간접으로 추종한 직업화가들의 화풍을 가리킨다.

손군택 산수화
손군택 산수화

당시 저장 지방에는 남송 이래로 마하파(馬夏派)의 전통이 지방양식으로 존속하고 있었다. 대진은 여기에 이곽파(李郭派) 화풍과 남종화(南宗畵)적인 요소까지 융합해 복합적이고 다양한 화풍을 이룩했다. 선덕연간(1426~35)에 대진이 화원(畵院)에 봉직하게 되면서 그의 화풍은 화원의 주도적인 화풍이 되었고, 파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의 영향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당시 화원(畵員)들이 대진의 화풍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대개 남송의 원체화(院體畵)에 토대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형성된 절파는 비대칭적 구도, 심한 흑백대조를 이루는 묵면(墨面)의 시각적 강조, 부벽준(斧劈)과 해조묘(蟹爪描)의 사용, 공진감이 결여된 평면적 화면, 활달하고 강렬한 필묵법의 구사 등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전통적 원체화 양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비화원적인 자유분방함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그 대표적 인물은 손군택(孫君澤)이다.

15세기 후반에는 이러한 복합적인 경향을 지닌 초기 절파 양식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 인물이 화면구성의 중심이 되는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가 나타나며, 근경 위주의 대담한 변각구도를 비롯해 묵법·필법 등이 더욱 거칠고 충동적이며 대담해진다. 이러한 양상은 16세기 화가들에게서 더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당시 미술평론가였던 고렴(高濂)은 이러한 경향을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라고 했다.

오위(吳偉:1459~1508)·장로(張路:1464~1558)·장숭(蔣崇)·종례(鐘禮) 등이 대표적 인물이며, 이외에도 정문림(鄭文林)·왕악(王)·석예(石銳)·주단(朱端) 등이 있다. 16세기말경이 되면 절파는 오파(吳派)의 남종문인화풍에 압도되어 급속히 쇠퇴하고, 부분적으로는 계속되었지만 하나의 화파로서의 명맥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마지막 절파화가로 꼽히는 남영(藍瑛:1578~1660)마저도 오파의 양식적 요소가 가미된 절충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15세기경 명의 원체화풍과 뚜렷한 구분이 생기기 전의 초기 절파양식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1455년 베이징[北京]을 다녀온 바 있는 선비화가 강희안(姜希顔) 등 일부 화가에 의해 수용되었으나 16, 17세기에는 김제(金)·이경윤(李慶胤)·김명국(金明國) 등 당대의 대표적인 화가들이 절파화풍의 영향을 받아 화단의 주된 흐름을 형성했다(조선시대 미술). 한국의 절파화풍은 구도·공간처리·필묵법·수지법(樹枝法) 등에서 중국의 절파양식과는 차이를 보이며, 특히 소경산수인물화가 많은 점이 주목된다.

16세기에 활동한 김제·함윤덕(咸允德)·윤인걸(尹仁傑)·이불해(李不害)·이숭효(李崇孝)·이흥효(李興孝)·이경윤·이영윤(李英胤)·이정(李霆) 등과, 17세기에 활동한 이정(李楨)·윤의립(尹毅立)·윤정립(尹貞立)·이징(李澄)·김명국(金明國)·김식(金埴)·조속(趙涑)·조세걸(曺世杰) 등이 절파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광태사학적인 절파양식을 보여준 김명국을 고비로 한국의 절파도 차차 쇠퇴의 경향을 보이다가 18세기 진재해(秦再奚)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