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술

한국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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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의 선사시대에서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형성된 회화·조각·건축·공예 등의 미술.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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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사시대의 한국미술
  2. 삼국시대의 한국미술
  3. 고려시대의 한국미술
  4. 조선시대의 한국미술
  5. 개항 이후의 한국미술

한국의 미술은 선사시대부터 주변 미술과의 부단한 교류를 통해 우리의 양식을 형성·발전시키면서 동아시아 미술의 전개에 일정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에는 동서미술의 융합을 통해 세계미술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미술은 우리의 민족미술로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세계미술의 한 자원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미술은 일제강점기 이래로 식민주의사관과 이에 대한 반발로 형성된 국수적 민족주의사관에 의해 모두 왜곡되어왔으며, 아직까지도 연구자의 부족과 문제의식의 빈곤 등으로 올바르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식민주의사관은 한국의 미술을 근대학문으로서의 학적 체계와 방법으로 연구한 최초의 관점이었기 때문에 우리 미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식민사관). 한국의 미술을 중국미술의 아류 내지는 지방양식의 하나로 보았던 식민주의사관은 역사와 문화발전의 동인을 전적으로 원류문화와 중심문화의 영향에 초점을 두고, 전파론적 이해방법에 기초한 종속적 타율성론에 의거하여 한국미술사를 중국미술의 이식사로 편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식민주의사관에 대한 반발로 민족주의사관이 제기되었으나 목적의식만 뜨거웠을 뿐 절대적으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국수적 주체성론에 의해 우리 미술이 고유하고 우수하다는 주장만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차원에서 출발했다(→ 민족사학). 특히 민족주의사관은 전통의 미화와 찬양을 통해 우리 미술을 과대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영향관계에 토대를 두고 사대와 자주, 모화(慕華)와 민족 등 주체와 비주체적 성향으로 이분화시켜 이를 긍정과 부정의 대립적 가치로 파악하는 이분법적 이해방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민족적 논리가 강조된 관점은 사실의 무리한 해석과 함께 전체적인 발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미술의 외부 영향에 중점을 두고 입론된 식민주의사관의 타율적 종속론을 타파하기 위해 중국미술과의 형태적 양식비교에 의해 부각시킨 한국적 특징과 한국화(韓國化)의 전통이 앞으로 우리미술이 수행해야 할 과제로서 강조되고 미화될 경우, 특정지역 문화를 세계중심문화로 보는 전근대적 세계관인 화이론적(華夷論的) 인식의 근본적인 청산을 어렵게 한다는 측면에서도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고 하겠다. 따라서 한국 미술의 역사와 전통에 비록 불완전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각 시기별로 조형적 특성과 한계를 바르게 인식하고 또한 민족미술에 대한 구조적이고도 총체적인 규명을 통해 그 발전의 원동력과 창의적 특색을 부각시켜 세계미술의 보편성 형성에 참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체계화해야 할 것이다.

선사시대의 한국미술

BC 6000~5000년경인 신석기시대부터 빗살무늬토기 등을 통해 조형활동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후기에 이르러 반구대바위그림과 같은 본격적인 미술유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BC 1000년경을 전후한 청동기시대를 통해 조형간두식과 다뉴세문경을 비롯한 각종 의기류 조각공예품과 선각화가 고도로 발달된 주조기술에 의해 세련된 양태로 제작되었다.

선사시대의 이러한 미술은 열악한 생존조건과 삶의 결핍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주술적 목적에 토대를 두고 전개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숭배로 인해 자연물의 묘사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대상물의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생략하여 요점적으로 나타내는 표현기법과 기호화된 기하학적인 양식이 공존했다.

선사시대의 이러한 양식은 시베리아 등 비중국권 북방계통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장구한 세월을 통해 한국 초기미술의 성격과 전통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사시대 이후의 한국미술이 보여주는 조형적 개성과 풍토적 특색의 기저에는 이와 같이 5,000년 이상을 비중국적인 배경에서 형성된 특유의 문화적 기호와 체질이 있었던 것이다.

삼국시대의 한국미술

삼국시대에는 미술이 고대 지배층의 신분을 나타내고 종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시각매체로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러한 미술분야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장인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들은 일본에까지 진출하여 우리나라의 고대미술을 전파하기도 했다.

고구려·백제·신라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면서 조형활동도 활발해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고분미술과 불교미술로 한정되어 있다. 고분미술은 고대적인 후장풍습과 계세사상(繼世思想)에 토대를 두고 죽은 자의 사후세계를 위해 조성된 것으로, 정교하고 독특하게 고안된 금관과 귀걸이 등 장신구류와 상형토기 등이 조형품의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고구려를 중심으로 전개된 고분벽화는 4~7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며 성행했다.

불교미술은 4세기말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시작되어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까지 약 10세기에 걸쳐 한국의 미술의 흐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조형물의 규모를 대형화하고 사실적인 양식을 진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회화·조각·건축·공예 전분야에 걸쳐 동시에 진행된 이러한 불교미술의 영향은 한국의 미술의 고대적·중세적 전개에 질적·양적인 변화를 초래했으며 범종·반가사유상·석굴암·고려불화·사경 등에서 독특한 양식과 세계적인 걸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미술은 일본의 불교미술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고려시대의 한국미술

고려시대에는 지배층의 미의식 진전과 선사시대의 오랜 토기제작을 통해 배양된 기술적 축적을 토대로 이 시대 특유의 청자공예를 꽃피웠다.

고려 청자는 먼저 발전한 중국 청자로부터 자극을 받아 형성되었지만 심오한 유색(釉色)과 뛰어난 상형성, 상감(象嵌) 기법의 독창적인 개발 등으로 중국과 쌍벽을 이루며 세계도자기사 발전에 기여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고대미술로서 성장했던 불교미술을 불화와 사경 중심으로 보다 세련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청자 등 공예미술품을 통해 한국 미술의 정교하고 우아하고 완숙한 측면을 크게 부각시켰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성격의 미술 이외에 감상적 기능을 지닌 일반회화가 대두되어 이 방면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고려는 본질적으로 고대적 질서에 반발하여 출현했던 국가였기 때문에 덕교와 예교(禮敎)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왕도정치 수행에 필요한 인재등용을 위해 개국초부터 과거제를 채택하고 유(儒)·불·도(道) 3교에 기반을 둔 문치주의를 지향함으로써 한문학의 성행과 지배층의 문사화와 함께 서화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경향은 무인집권기를 통해 새로운 문화담당층으로 등장한 능문능리형 사대부들의 득도를 위한 교양물로 정착되면서 그 성격과 기반을 보다 공고히 하게 되었다.

특히 이들 신진문사(新進文士)들은 북송대의 문인화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일반회화의 성장에 계도적인 구실을 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하게 겉만 꾸민 것을 숭상하던 종래의 미술풍토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사물의 겉모습보다 생성화육(生成化育)의 원리를 표현하는 것이 중시되면서 채색화보다 수묵화가 발전하게 되었고, 또 산수와 대나무 등 자연물을 소재로 한 그림이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한국미술

사대부 문인화가와 화원들이 조선시대 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다.

회화가 당대의 문화상황을 이끌었던 지도계층과 중인 전문가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고도의 이념미와 정서를 반영하는 조형물로 발전한데 비해 조각·건축·공예는 신분적으로 천시되었던 장인들에 의해 열악하고도 부자유스러운 여건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전 시대보다 기술적으로 낙후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도자기공예는 고려 청자의 뛰어난 전통이 초기의 분청사기(粉靑沙器)를 거쳐 백자로 이어졌으나 18~19세기에 기술개발을 통한 산업화로의 전환을 이루지 못한 채 쇠퇴하고 말았다.

회화는 1700년경을 전후하여 지배층의 분열과 2차례의 전쟁으로 심하게 타격을 받은 기존의 전통사회를 다시 복구하고, 정비하고, 개혁하기 위한 새로운 시대조류와 밀착되어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에 신분상승 욕구에 의해 문인층이 서얼 출신과 중인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양반사대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시서화를 겸비하고 이를 향유하는 풍조가 저변화되면서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고, 품평하고, 수장하는 등의 회화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그리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그림 자체에 대한 인식이나 창작에 대한 태도도 새롭게 제시되었으며, 표현기법 또한 남종화법을 통해 기존의 화풍을 쇄신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원근법이나 음영법 같은 서양화법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특히 주제에 있어서 주변 산천의 현실경과 각 계층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린 진경산수화풍속화가 널리 유행되었다. 이러한 동향은 민족미술의 새로운 진전과 함께 고의의 구현이라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지만 현실적 소재를 통한 사물의 개별적 실상의 추구는 근대 이행기적 변모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김윤겸의 진경산수화
김윤겸의 진경산수화

개항 이후의 한국미술

19세기를 통해 중세적인 남종문인화풍이 보다 큰 세력을 누리게 되면서 주체적 근대 이행은 좌절되고 1876년의 개항과 1910년부터 일제 식민통치에 의해 타율적으로 근대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근대의 한국미술은 서구적 근대주의에 기초를 두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으나 작가들의 역사의식 빈곤과 대중적 기반의 취약 등으로 인해 전통성이 단절되고 서양의 미술사조와 조형개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한 문제의식이 1980년대를 전후해서 폭넓게 제기되면서 한국의 미술의 전통성과 주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기반으로 세계미술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