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화

풍속화

다른 표기 언어 風俗畵 동의어 속화, 俗畵, 이속도, 俚俗圖

요약 조정의 행사를 비롯해 각 계층의 삶의 행위와 실태를 묘사한 그림이다. 속화 또는 이속도라고도 했다. 병풍과 화첩에 그렸으며, 교화성과 함께 서사적이고 현실적인 성격을 띤다. 조선 말기의 풍속화는 한국적 미세계와 정서를 강하게 담고 있어 회화의 전개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18세기 이전의 풍속화는 주로 감화적이고 교화적 목적으로 그린 것이 주를 이루었는데 18세기에 이르러 심미성을 가미하면서 감상의 대상으로 발전했으며, 화풍도 기존의 유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사실성과 개성에 기반을 두기 시작하여 김홍도·김득신·신윤복 등에 이르러 절정기를 맞았다.
김홍도는 〈서당〉·〈주막〉·〈씨름〉 등 일반백성들의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들을 주로 그려 풍속화 전개에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신윤복의 풍속화는 감각적이고 선정적인 경향과 함께 세련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특색으로 한다.

왕실이나 조정의 각종 행사를 비롯하여 사농공상(士農工商) 각 계층의 생활상과 습속·잡사(雜事) 등과 같은 모든 삶의 행위와 실태를 묘사한 것이다.

단원풍속도첩
단원풍속도첩

조선 후기에는 속화(俗畵) 또는 이속도(俚俗圖)라고도 했다. 주로 병풍과 화첩에 그렸으며, 감계를 위한 교화성과 함께 기록성·사실성·시대성 같은 서사적이고 현실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풍속화의 역사는 인물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중국 한대(漢代)의 고분벽화와 화상전(畵像塼) 등에 그려진 수렵·농경·나들이·연음(宴飮)·장기·악무(樂舞) 등의 그림에서 초기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의 고구려 고분벽화를 중심으로 풍속적인 요소들이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안악 3호분을 비롯하여 덕흥리고분·무용총·각저총 등 4세기 후반에서 6세기경에 제작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계세사상(繼世思想) 등을 배경으로 행렬도·수렵도·전투도·무용도·투기도·곡예도·불공도와 당시의 생활과 직결된 부엌·방앗간·푸줏간·마구간·외양간 등의 정경이 많이 그려졌다. 인물들은 주로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하여 힘찬 필치로 그려져 고구려 회화 특유의 동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복식이나 각종 기물(器物)들도 충실히 묘사되어 풍속인물화의 발전과정뿐만 아니라 당시의 복식사·생활사·풍습사 등을 살펴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풍속적인 요소는 7세기에 이르러 도교의 유행으로 사신도(四神圖)와 신선도 계열의 그림들이 성행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중기까지 지속되었다.

한국 회화사에서 풍속화적인 요소가 다시 대두된 것은 고려 후기부터이다.

이 시기에는 〈미륵하생경변상도 彌勒下生經變相圖〉와 같은 불교회화의 하단부분에 소를 몰아 밭을 갈고, 벼를 베고 타작하는 농경장면이 묘사되었으며, 궁정풍속화인 〈의종야연도 毅宗夜宴圖〉와 사대부들의 풍속을 담은 〈태위공기우도 太尉公騎牛圖〉·〈해동기로회도 海東耆老會圖〉·〈원암연집도 元岩腸集圖〉·〈독곡산보도 獨谷散步圖〉 등이 그려졌다. 그리고 서민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근로의 모습을 주제로 한 민생도류(民生圖類) 풍속화의 선구적 의의를 지니는 〈무일도 無逸圖〉와 〈빈풍도 豳風圖〉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를 통해 형성된 풍속화의 전통은 조선 초기로 계승되어 더욱 다양하게 발전했다.

안견(安堅)의 〈대소가의장도 大小駕儀仗圖〉를 비롯하여 홍익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중묘조서연관사연도 中廟朝書筵官賜宴圖〉·〈과거도 科擧圖〉·〈기영회도 耆英會圖〉와 같은 궁정과 조정의 각종 행사 의궤도들과 사대부들의 야외아집(野外雅集) 장면을 그린 계회도(契會圖)가 자주 제작되었으며, 특히 실경풍속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문인계회도는 풍속화뿐만 아니라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계회도).

민생도류 풍속화로는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인 유교적 민본주의(民本主義)에 토대를 둔 〈안민도 安民圖〉·〈사민도 四民圖〉·〈유민도 流民圖〉·〈진민도 賑民圖〉·〈가색도 稼穡圖〉·〈관가도 觀稼圖〉와 함께 〈무일도〉와 〈빈풍도〉가 교화적·위민적(爲民的)인 기능을 띠고 더욱 빈번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세종대에는 〈무일도〉와 〈빈풍도〉의 제작정신을 바탕으로 당시 백성들의 농사짓는 괴로움이라든가 부역하는 모습 등을 수집하여 세시(歲時)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경계되는 말을 써서 보전함으로써 우리나라의 풍속화 발달에 큰 계기를 마련했다. 중종대부터는 중국의 경직도가 전래되어 이 분야의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

조선 초기와 중기를 통해 성장했던 풍속화는 18세기에 이르러 종래의 감계적이고 교화적인 경향과 기록성을 강하게 띤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것에 심미성을 가미하면서 감상의 대상으로 발전했으며, 화풍도 기존의 유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사실성과 개성에 기반을 두고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18세기 전반의 윤두서(尹斗緖)·윤덕희(尹德熙)·윤용(尹) 일가와 조영석(趙榮祏)·이인상(李麟祥)·강희언 등 문인화가들에 의해 개척되었는데, 특히 조영석의 〈새참〉·〈바느질〉과 강희언의 〈석공 石工〉 등은 후대의 풍속화 화풍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이 18세기 전반의 문인화가들에 의해 독립적·본격적인 화목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풍속화는 18세기 후반에 김홍도(金弘道)·김득신(金得臣)·신윤복(申潤福) 등과 같은 화원화가들에 의해 절정기를 맞이했다.

김홍도는 20대 초반부터 이미 당대 최고의 풍속화가로 손꼽히는 등 이 시기의 풍속화 전개에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당시 최고의 비평가였던 강세황(姜世晃)은 〈표암유고 豹庵遺稿〉의 〈단원기우일본 檀園記又一本〉에서 김홍도의 풍속화에 대하여 "우리나라 400년 동안에 파천황적(破天荒的) 솜씨라 하여도 가할 것이다. 더욱 풍속을 그리는 데 능하여 인간의 일상생활과 길거리·나루터·점포·가게·과거장면·놀이마당 같은 것도 한 번 붓이 떨어지면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부르짓지 않은 사람이 없다.

세상에서 말하는 김홍도의 풍속화가 바로 이것이다. 머리가 명석하고 신비한 깨달음이 있어서 천고의 오묘한 터득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으랴!"라고 높게 평가했다. 김홍도는 각 계층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많이 그렸지만 그가 보다 즐겨 다루었던 것은 〈서당〉·〈주막〉·〈씨름〉·〈빨래터〉·〈우물가〉·〈담배썰기〉·〈자리짜기〉·〈집짓기〉 등과 같은 일반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들이었다.

그의 풍속화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듯이 대부분 주변의 배경적 설명을 생략하고 원형 구도나 X자형 구도 등을 이용한 인물중심의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또한 둥글넓적한 얼굴에 동글동글한 눈매를 지닌 소탈한 모습의 조선 후기 서민상의 창출, 해학의 흥겨움이 물씬 밴 이들의 생활감정 및 구수하고 정감이 넘치는 삶의 생생한 묘사, 투박하면서도 강하고 생명력 있는 필선의 구사 등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김홍도의 이러한 풍속화풍은 김득신과 신윤복을 비롯하여 김양기(金良驥)·김후신(金厚臣)·권용정(權用正) 등의 여러 화가들과 민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득신의 풍속화는 인물들의 생김새나 표정, 해학적인 분위기와 정감어린 표현, 요점적인 묘사 등에서 김홍도의 영향을 짙게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김홍도의 영향을 토대로 〈파적도 破寂圖〉·〈귀시도 歸市圖〉·〈귀우도 歸牛圖〉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가늘고 예리한 필선의 사용을 비롯하여 섬세한 공간구성,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생활감정의 진솔한 표현 등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이룩했다. 김득신에 비해 신윤복은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소재의 선정이나 구성방법, 인물들의 표현방법, 설채법(說彩法) 등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전신화첩 傳神畵帖〉(간송미술관)에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신윤복은 주로 한량과 기녀들의 로맨스와 같은 남녀간의 애정문제나 춘의(春意) 등을 소재로 삼았으며, 배경을 중시하고 가늘고 유연한 필선과 아름다운 색채의 효과를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

따라서 그의 풍속화는 감각적이고 선정적인 경향과 함께 세련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특색으로 했다. 상공업의 발흥으로 활달해진 시정(市井)의 속태(俗態)와 색태(色態)를 회화적 서술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이 시기 풍속화의 다양하고 개성적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신윤복의 이러한 풍속화풍은 유숙(劉淑)·유운홍(劉運弘) 등에게 영향을 미쳤고, 민화에까지 부분적으로 파급되었으나 그를 고비로 하여 전통적인 풍속화는 쇠퇴하게 되었다.

조선 말기를 통한 풍속화의 조락은 사회전반에 걸친 조선시대 봉건문화의 동요와 함께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크게 부각되었던 청대(淸代) 문인화 이념의 성행에 그 원인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주변의 생활상을 소재로 하는 그림이 다시 대두되었지만 이것은 전통적인 풍속화의 맥락이 아닌 서양의 리얼리즘 사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왕실이나 조정의 각종 행사에서 일반서민들의 평범한 일상사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의 다양한 생활상을 주로 다루었던 조선 말기까지의 풍속화는 과거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줄 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의 그림보다 한국적 미의 세계와 정서를 강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진경산수화와 함께 한국 회화의 전개에 가장 중요한 구실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