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김홍도

다른 표기 언어 金弘道 동의어 사능, 士能, 단원, 檀園, 단구, 丹邱, 서호, 西湖, 고면거사, 高眠居士, 첩취옹, 輒醉翁
요약 테이블
출생 1745(영조 21)
사망 미상
국적 조선, 한국
본관 김해(金海)
사능(士能)
단원(檀園)

요약 한국적 풍속화로 조선 시대 4대 화가에 꼽히는 화가로 호는 단원.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이며 어려서 경기도 안산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 이론가인 강세황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28세 때인 1773년에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어 영조어진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렸다. 1781년에는 정조어진 익선관본 도사의 동참화사로 활약했으며, 이 무렵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따라 자신의 호를 '단원'이라 지었다.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목차

접기
  1. 작품세계
  2. 김홍도에 대한 평가
김홍도
김홍도

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서호(西湖)·취화사·고면거사·첩취옹(輒醉翁)·단구(丹邱).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손자인 석무(錫武)의 아들로 태어났다. 화원 집안인 외가로부터 천부적 재질을 물려받은 듯하다. 어려서는 경기도 안산에 칩거중이던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이며 이론가인 강세황(姜世晃)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강세황(姜世晃)
강세황(姜世晃)

20대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으며, 28세 때인 1773년에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어 영조어진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했다. 1777년 별제로 있으면서 강희언(姜熙彦)·김응환(金應換)·신한평(申漢枰)·이인문(李寅文) 등과 함께 그림제작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

1781년에는 한종유·신한평 등과 함께 정조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 도사(圖寫)의 동참화사로 활약하고 그 공으로 경상도 안동 부근 안기(安奇)역의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무렵부터 명의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했다. 1788년에는 김응환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고 그곳의 명승지를 수십 장(丈)이나 되는 긴 두루마리에 그려 바쳤다.

1791년에 다시 어용화사로 선발되어 정조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그해 겨울 충청북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 정월까지 봉직했다. 현감 퇴임 후의 만년에는 지방의 권농을 지내기도 했는데,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 속에서 여생을 마쳤다. 1810년경을 전후하여 타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세계

군선도
군선도

그의 작품은 현재 200여 점 정도 알려져 있는데 화풍상의 변화는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산수화의 경우에는 전기에는 원체화적 경향을 띤 정형산수를 많이 그렸는데, 1778년 작인 〈서원아집도 西園雅集圖〉 6폭병풍과 선면화 등에 잘 나타난다. 50세 이후의 후기에는 한국적 정서가 담긴 진경산수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개성이 강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그의 후기 산수화풍은 석법과 수파묘 등에서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발견되지만 고도의 회화감각으로 처리된 탁월한 공간구성과 변형된 하엽준,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먹선의 강조와 맑고 투명한 담채의 효과 등을 통해 독창성을 발휘하였다. 또한 그는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을 바꾸었으며 이러한 사경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화조 등을 그려넣어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했다. 도석인물은 전기에는 주로 신선도를 많이 그렸는데,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옷주름과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 群仙圖屛〉(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소방하면서 농익은 필치로 바뀌게 된다.

김홍도의 회화사적 비중을 한결 높여주고 있는 분야는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광경을 간략하면서도 짜임새있는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된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했던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나란히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당시 속화체로도 불렸던 그의 풍속화풍은 현실적인 소재를 소박한 생활정서와 풍류적 감성이 가미된 생동감 넘치는 기법으로 창출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김홍도에 대한 평가

홍백화의 글과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 壺山外記〉에 의하면,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활달해서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한다. 스승인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명수' 또는 '우리나라 금세의 신필'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는 '회사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단원도
단원도

김홍도가 이룩했던 한국적 감각의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김양기(金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유운홍(劉運弘)·엄치욱·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화 발전에 탁월한 발자취를 남겼다.

안견(安堅)·정선·장승업(張承業)과 함께 조선시대의 4대 화가로 손꼽힌다. 그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의 화풍을 추종했던 화가들을 가리켜 김홍도파 또는 단원파라 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7호)과 개인소장의 〈단원도〉(1784년작)·〈금강사군첩〉·〈섭우도 涉牛圖〉·〈기로세련계도 耆老世聯圖〉(1804년작), 간송미술관 소장의 〈무이귀도도 武夷歸棹圖〉, 호암미술관 소장의 〈단원화첩〉(1796년작, 보물 제782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