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강세황

다른 표기 언어 姜世晃 동의어 광지, 光之, 첨재, 忝齋, 산향재, 山響齋, 박암, 樸菴, 의산자, 宜山子, 견암, 蠒菴, 노죽, 露竹, 표암, 豹菴, 표옹, 豹翁, 해산정, 海山亭, 무한경루, 無限景樓, 홍엽상서, 紅葉尙書, 도암, 道菴, 단연재, 端硏齋, 차헌, 借軒, 표노, 豹老, 표옹노자, 豹翁老子
요약 테이블
출생 1713(숙종 39)
사망 1791(정조 15)
국적 조선, 한국

요약 시·서·화 삼절로 불렸고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불리며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나 형이 귀양살이하는 것을 보고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버렸다. 1773년 영조의 배려로 61세의 나이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병조참의와 한성판윤 등을 거쳤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년
  3. 관직생활
  4. 작품세계
강세황(姜世晃)
강세황(姜世晃)

개요

시·서·화 삼절로 불렸고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초년

본관은 진주.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암(豹菴)·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 아버지는 판중추부사를 지낸 현(鋧)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익만(翊晩)의 딸이다.

아버지의 교육과 자형 임정(任珽)의 영향을 받았으며, 처남 유경종(柳慶種) 및 허필(許佖)·이수봉(李壽鳳)·이익(李瀷)·심사정(沈師正)·강희언(姜熙彦) 등과 사귀었다. 6세부터 글을 짓고 8세 때 숙종 국상에 어울리는 구장(鳩杖)에 대한 시를 짓는 등 재주가 뛰어났으나, 형 세윤(世胤)이 귀양살이하는 것을 보면서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버렸다. 32세 때 처가인 안산(安山)으로 옮긴 뒤 약 30년간을 지내면서 문인으로서 시·서·화를 고루 갖추고 그 깊이를 더해갔다.

관직생활

강세황은 집안 선조들과 임금의 두터운 관계로 영·정조에게 상당한 배려를 받았다. 1763년 영조가 그가 서화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말하자, 이에 감격하여 이때부터 거의 20년 동안 붓을 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1773년 영조의 배려로 61세의 나이에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1776년 기구과(耆耉科), 1778년(정조 2)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수석합격하여 관계가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그뒤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판윤 등을 두루 거쳤다. 1784년 천추부사(千秋副使)로 북경에 갔을 때 덕보(德保)·박명(博明)·김간(金簡) 등 당시 중국 지식인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의 문화적인 면모와 긍지를 발휘했다. 1790년 78세에 지중추(知中樞)가 되었다.

작품세계

시는 육방옹(陸放翁)을 본받았고, 글씨는 이왕(왕희지·왕헌지 부자)의 법을 받아 상당히 깊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림에서는 왕몽(王蒙)·황공망(黃公望)의 정신을 이어받아 산수·묵란죽에 속기가 없었다. 특히 서화에서 풍부한 이론을 갖추고 실로 개성적이고 선구적인 성향을 보였다.

근본적으로 올바른 서화의 정통성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옛 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이해한 서화관에 따라 전에 없던 여러 가지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시도했다. 진경산수를 발전시키고 풍속화·인물화 등에도 관심을 보임으로써 다양한 회화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부분적으로 서양화의 표현기법을 채용하여 색채의 농담으로 입체감을 표현하는 등 여러 부분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와 함께 서화평에서도 높은 안목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 회화사에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의 정착에 기여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김홍도(金弘道)를 비롯한 조선 후기 화단의 발달은 그에게서 영향받은 바 컸다.

작품으로는 〈현정승집 玄亭勝集〉·〈첨재화보 忝齋畵譜〉·〈방동현재산수도 倣董玄宰山水圖〉·〈벽오청서도 碧梧淸暑圖〉·〈표현연화첩 豹玄聯畵帖〉·〈표암첩 豹菴帖〉·〈송도기행첩 松都紀行帖〉·〈약즙산수 藥汁山水〉·〈삼청도 三淸圖〉·〈피금정도 披襟亭圖〉·〈난죽도 蘭竹圖〉·〈묵죽팔폭병풍 墨竹八幅屛風〉·〈사군자병풍 四君子屛風〉·〈임왕서첩 臨王書帖〉·〈동기창임전인명적발 董其昌臨前人名迹跋〉·〈제의병 祭儀屛〉 등이 전한다. 특히 자서전인 〈표옹자지 豹翁自誌〉에 들어 있는 2폭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7,8여 폭의 초상화를 남긴 사실이 주목된다. 저서로는 문집 〈표암유고〉가 있다. 시호는 헌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