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

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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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자연현상과 경관을 소재로 그린 동양회화 4대 화문 중의 하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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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시대 산수화
  2. 조선시대 산수화

화풍은 명대 말기부터 화가의 신분에 따라 남종화와 북종화로 분류되었다. 소재와 내용에 따라 춘경·하경·추경·동경·산거·강산·호산·운산·풍우·폭포·수석·궁실·명승·고적 등으로 나누기도 하고, 정형화된 이상산수와 실제 경치를 그린 실경산수로 크게 구분하기도 한다.

산수가 문학과 그림의 주제로 대두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전후경으로 노장적 자연관의 부각과 함께 산수가 양신과 낙도의 이념적·심미적 장소로 인식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회화사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은 수묵화의 발달과 더불어 산수화가 우주적 조화의 체험과 심리적 가치를 통일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와유지자로 심화된 10세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산악이나 수목과 같은 산수화의 요소들이 5세기경을 전후하여 고구려 고분벽화의 인물도와 수렵도 등의 배경으로 다루어졌으나 독립된 회화로서의 산수화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대두되었다.

고려시대 산수화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

고려 초기에는 송(宋)나라로 보낸 〈저색산수도권 著色山水圖卷〉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듯이 청록산수풍의 경향이 강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흐름은 북송과의 외교관계가 재개되는 11세기 후반 무렵 곽희 등의 화적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수묵풍의 이상산수화로 바뀌어갔고, 후기에 이르러 문사들이 친자연적·탈속적 취향과 밀착되어 청산백운도·소상팔경도와 같은 산수화들이 송대와 원대(元代)의 화풍을 반영하며 전개되었다.

이 시대의 산수화풍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노영이 그린 〈흑칠금니소병 黑漆金泥小屛〉의 지장보살도, 이제현(李齊賢)의 〈기마도강도 騎馬渡江圖〉, 공민왕의 전칭 작품인 〈수렵도〉 등의 배경에 그려진 산수화을 통해 그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실경산수화는 12세기경을 전후하여 대두했는데, 이영(李寧)이 그린 〈예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 天壽寺南門圖〉가 중국에서도 높게 평가되었던 점으로 보아 상당히 발전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를 통해 대두된 산수화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가장 활발한 양상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조선시대 산수화

조선 초기(1392~1550)에는 대산대수식(大山大水式)의 정형화된 이상산수가 크게 성행했는데, 화풍은 곽희파(郭熙派)를 비롯한 송·원대의 양식을 토대로 발전된 안견파(安堅派) 화풍이 가장 큰 세력을 누렸다.

사시팔경도
사시팔경도

세종 연간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안견은 구도·공간개념·필묵 등에서 기존의 양식을 종합·절충하여 새로운 특색을 이룩하고, 동시대와 후대의 산수화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으며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수묵산수화 발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밖에도 미법산수화풍(米法山水畵風)과 명초(明初)의 원체화풍이 부분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리고 실경산수화는 금강산도가 전대에 이어 명승명소도의 대표적 화제로서 제작되었고, 새 왕조의 기상과 위용을 선양하기 위해 한양의 명소들이 새롭게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사대부들의 친자연주의적 성향과 결부되어 별서유거도(別墅幽居圖)와 야외아집도(野外雅集圖) 계열의 실경도들이 적지 않게 다루어졌다.

조선 중기(1550~1700)에는 전쟁의 혼란과 사대부 사회의 분열 및 대립의 심화에서 연유된 은사(隱士)와 처사 지향의 시대적 분위기와 밀착되어 산수인물화가 성행했다.

화풍은 이정근(李正根)·이흥효(李興孝)·이징(李澄) 등을 통해 초기의 안견파화풍이 지속되기도 했으나 김제(金禔)·이경윤(李慶胤)·김명국(金明國) 등에 의해 절파화풍(浙派畵風)이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중기 화단에서 유행한 절파화풍에 대해서는 고려 말기에 수용되었던 원대의 전(前) 절파적인 요소가 계승·발전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새롭게 유입된 명대의 절파화풍에 초기의 안견파화풍 등이 가미되어 한국적인 특색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시기의 실경산수화는 별서유거도의 경우 주자(朱子)의 유거지를 그린 〈무이구곡도 武夷九曲圖〉 등의 영향을 받아 〈도산도 陶山圖〉·〈사계정사도 沙溪精舍圖〉·〈고산구곡도 高山九曲圖〉·〈곡운구곡도 谷雲九曲圖〉 등이 그려졌으며, 야외아집도에서는 중인층인 여항문인(閭港文人)들의 야외 계회장면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신흠(李信欽)의 〈사천장팔경도 斜川莊八景圖〉(개인 소장), 조세걸(趙世傑)의 〈곡운구곡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시각(韓時覺)의 〈북관실경도 北關實景圖〉(개인 소장)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선구적 화풍이 형성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1700~1850)에는 문인화 이념의 확산과 명대 오파(吳派) 남종화풍의 유입 등으로 사의적(寫意的)이고 속기(俗氣)를 배제시킨 새로운 정형산수화가 성행했다.

이러한 남종산수화는 17세기 이래 부분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에 명말(明末)의 동기창(董其昌) 등에 의해 주창되었던 남북이종론(南北二宗論)이 인식되면서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수용 초기에는 윤두서(尹斗緖)를 비롯한 정선(鄭歚·이하곤(李夏坤)·윤덕희(尹德熙)·조영석(趙榮祏) 등의 문인화가들이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새로운 세력의 구축과 토착화에는 심사정(沈師正)·강세황(姜世晃)·이인상(李麟祥)·최북(崔北) 등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18세기 중엽을 중심으로 남종화풍은 우리의 풍토성과 북종화법의 부분적 가미 등으로 절충적인 특색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반을 통해 김응환(金應煥)·김홍도(金弘道)·이인문(李寅文)·이방운(李昉運)·김석신(金碩臣)·신윤복(申潤福)·이유신(李維新) 등의 중인화가들에 의해 보다 감각적이고 해체된 모습과 함께 근대적인 감성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에 실경산수화도 종래의 전통 양식에 남종화법을 가미하여 새로운 화격을 이룩하면서 정형산수와 함께 화단에서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며 성행하게 되었다. 진경산수화라 불리는 이러한 흐름은 18세기 중엽까지 정선과 그의 유파인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정황(鄭榥)·정충엽(鄭忠燁)·장시흥(張始興)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는 김홍도를 비롯한 이인문·조정규(趙廷奎)·임득명(林得明)·엄치욱(嚴致郁) 등을 통해 전개되었다.

그리고 심사정·이인상·허필(許必)·정수영(鄭遂榮)·윤제홍(尹濟弘)·정철조(鄭喆祚) 등의 문인화가들은 남종화법과 함께 문인풍의 격조높은 화풍을 바탕으로 색다른 개성미를 이룩하여 진경산수화의 다양한 흐름에 기여했다. 이 시기의 진경산수화는 한국적 풍토미의 구현과 함께 현실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근대지향적인 의의를 형성하면서 조선 후기의 회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선 말기(1850~1910)에 진경산수화는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사의적인 문인화풍의 만연에 따라 쇠퇴하고, 고도의 이념미에 의해 간일화된 남종문인풍의 산수화가 풍미하게 되었다.

서권기(書卷氣)와 문기(文氣)를 강조했던 이러한 산수화풍은 조희룡(趙熙龍)·허련(許鍊)·전기(田琦)·유재소(劉在韶)등의 추사파(秋史派) 화가들을 통해 성행했다. 김수철(金秀哲)·김창수(金昌秀) 등은 이색적인 화풍을 추구했다. 그리고 장승업(張承業)은 청대의 정형산수풍을 토대로 장식적이고 환상적인 화풍을 이룩하고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晋)을 통해 근대 초기 화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전통산수화는 1920년대부터 이상범(李象範)·변관식(卞寬植)·이용우(李用雨)·노수현(盧壽鉉) 등에 의해 근대적인 산수풍경화로 변모되었으며, 생활주변의 일상적인 경관을 그리는 사경산수화(寫景山水畵)가 주류를 이루면서 현대화단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