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

수묵화

다른 표기 언어 水墨畵

요약 수묵화의 역사는 당대에 시작되었다. 백묘법에서 출발한 수묵의 사용은 성당기에 파묵법과 발묵법이 등장하면서 발전을 이루었다.
우리나라는 조선 전기 이후 거의 모든 산수화가 수묵으로 그려졌다. 그 대표적인 예는 중국의 이곽파화풍과 남송의 원체화풍을 토대로 안견이 성립한 안견파화풍의 작품과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이다. 한국적인 화풍을 형성한 조선 초기의 회화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수묵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 중기에 수묵 사용이 더욱 대범해졌고, 사용범위가 묵죽·묵매·묵포도 등으로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진경산수화·풍속화와 함께 남종화가 유행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심사정의 <강산야박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조선 말기에는 김정희를 중심으로 남종문인화가 크게 발전했다.

수묵화(水墨畵)
수묵화(水墨畵)

채색화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동양회화 고유의 특징이다.

수묵의 역사는 당대(唐代)에 먹의 색이 오채(五彩)를 대신할 수 있다는 사상 아래 채색의 관념을 탈피하면서 시작되었다. 백묘법(白描法)에서 출발한 수묵의 사용은 성당기(盛唐期)에 파묵법(破墨法)과 발묵법(潑墨法)이 등장하면서 기법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수묵이라는 말은 당나라 유상(劉商)의 시에 처음 나타났으며,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 歷代名畵記〉에 "은중용(殷仲容)은 묵색(墨色)을 사용해 그렸는데, 마치 오채를 겸비한 듯하다"라고 하여 초당기(初唐期)에 이미 수묵이 사용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당나라 때에는 여전히 사혁(謝赫)이 주장한 육법(六法)의 골법용필(骨法用筆)과 수류부채(隨類賦彩)에 따른 선묘(線描)와 설색(設色)이 중요시되었다.

수묵이 보다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8세기 중엽경에 활동한 오도자(吳道子)에 이르러서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백묘법의 도석인물화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지만, 〈역대명화기〉에서 산수는 오도자로부터 일변했다는 기록이 시사하듯 종래의 필선이 강조된 그림과는 다른 방일(放逸)한 기세의 수묵을 사용하여 수묵의 사용 범위를 넓힌 것으로 보인다.

그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왕유(王維)는 파묵산수를 시작하여 수묵화 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했다. 이밖에도 노홍(盧鴻)·정건(鄭虔)·필굉(畢宏)·항용(項容)·장조(張璪) 등도 수묵산수화풍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인물로 기록에 전해온다. 파묵법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발묵법은 왕묵(王墨)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는 술을 좋아하여 그림을 그릴 때면 먼저 취하도록 마신 뒤 먹물을 뿌리고[潑], 음악에 맞추어 춤추듯이 붓을 움직이며 상투와 손발을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발묵법이야말로 수묵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기법인데 골법용필이 존중된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화풍이었다. 주경현(朱景玄)은 〈당조명화록 唐朝名畵錄〉에서 필선을 배제하고 자유분방한 작화태도를 가능하게 한 발묵법을 창안한 왕묵을 전통적인 신(神)·묘(妙)·능(能)과 구별되는 일품(逸品)에 포함시켰다. 발묵법은 이후 미불(米芾)·미우인(米友仁) 등의 문인화가들을 중심으로 계속 발전되었고, 남송대에는 목계(牧谿)·양해(梁楷) 같은 선승화가들에 의해 수용되어 감필법(減筆法)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중국 회화사상 수묵화는 산수화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오대(五代)의 형호(荊浩)·관동(關同)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발전을 했으며 이성(李成)·곽희(郭熙)·마원(馬遠)·하규(夏珪)·동원(董源)·거연(巨然) 등의 화풍은 동양화에서 수묵산수 양식의 기초를 마련했다. 수묵화가 가장 중요한 회화표현의 양식으로 자리잡게 된 데에는 소식(蘇軾)·문동(文同) 일파의 문인화론(文人畵論)에 의해 더욱 그 기반이 확고해졌다.

수묵화의 전통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조선 전기 이후 대부분의 모든 산수화가 수묵으로 그려졌다.

특히 조선 전기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곽파화풍(李郭派畵風)과 남송의 원체화풍(院體畵風)을 토대로 안견(安堅)에 의해 성립된 안견파화풍을 보여주는 작품과 강희안(姜希顔)의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여러 화풍을 토대로 한국적인 화풍을 형성한 조선 초기의 회화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수묵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 중기에는 절파화풍(浙派畵風)이 풍미하면서 수묵의 사용이 더욱 대범해졌으며 묵죽(墨竹)·묵매(墨梅)·묵포도(墨葡萄) 등 사용범위도 확대되었고, 조속(趙涑)·조지운(趙之耘) 부자에 의해 수묵사의(水墨寫意)의 화조화도 그려졌다.

조선 후기에는 한국적인 정수를 잘 보여주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풍속화(風俗畵)가 화단을 풍미하는 한편, 남종화(南宗畵)가 본격적으로 유행하면서 수묵화가 절정을 이룬다. 이러한 작품에는 정선(鄭歚)의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심사정(沈師正)의 〈강산야박도 江山夜泊圖〉 등이 있다. 조선 말기에는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문기(文氣)와 서권기(書卷氣)를 중시하는 남종문인화가 크게 발전하면서 수묵화의 명맥은 근대·현대 화단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색적인 화풍을 보여주는 홍세섭(洪世燮)의 〈유압도 游鴨圖〉는 파격적인 구도와 수채화적인 기법으로 먹을 사용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준다. 일본에서는 주로 무로마치 시대에 수묵화가 유행했으며 대표적인 화가로는 셋슈 도요[雪舟等楊]와 셋손 슈케이[雪村周種] 등이 있다. 일본 수묵화가들은 묵필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주제의 본질적인 특성만 표현하고 나머지를 생략하는 선종적인 기법을 주로 사용했으며,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까지 수묵화가 인기를 누렸지만 점차 형식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