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산수화

진경산수화

다른 표기 언어 眞景山水畵

요약 진경·동국진경이라고도 한다. 고려와 조선 초기·중기에 걸쳐 그려진 실경산수화의 전통을 토대로 발전한 것으로, 앞 시기의 경향에 비해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며 성행했을 뿐 아니라 높은 회화성과 함께 한국적 특색을 뚜렷하게 창출하며 전개되었다.
정선이 확립한 화풍은 18세기에 새롭게 유행한 남종화법을 가미하여 실경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해 경관에서 받은 정취를 감동적으로 구현했다는 데 큰 특색이 있다. 이는 강희언 등 주로 중인층 문인화가들과 화원들에게 파급되어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면서 진경산수화풍의 주류를 이루었다.
18세기 말엽에는 정선파의 화풍이 형식화의 경향을 나타내면서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였던 강세황이 실제 경관과 부합되는 사실적인 기법을 강조했다. 이러한 경향은 김홍도에 의해 구도와 필법이 더욱 치밀하고 박진감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김정희를 중심으로 사의적인 문인화풍이 득세함에 따라 쇠퇴했다.

진경·동국진경(東國眞景)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신조선산수화(新朝鮮山水畵)라고도 했다.

김윤겸의 진경산수화
김윤겸의 진경산수화

고려와 조선 초기·중기에 걸쳐 그려진 실경산수화의 전통을 토대로 발전한 것으로, 앞 시기의 경향에 비해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며 성행했을 뿐 아니라 높은 회화성과 함께 한국적 특색을 뚜렷하게 창출하며 전개되었다. 이러한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회적 변동과 의식의 변모를 배경으로 유행했는데, 특히 종래의 방고(倣古) 행위의 형식화와 그 표현의 상투화에 대한 반성에서 당대의 현실을 통해 고의(古意)와 이상을 추구하고 재인식하고자 했던 당시의 사상적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산천을 주자학적(朱子學的) 자연관과 접목시키고자 했던 문인사대부들의 자연친화적 풍류의식의 확산에 의한 탐승유력(探勝遊歷) 풍조의 성행과 주자학의 조선화(朝鮮化)에 따른 문화적 고유색의 만연 및 자주의식의 팽배 등도 진경산수화의 발전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조류의 이념적 성향은 당시 집권층이었던 노론(老論) 문인사대부들과 남인(南人) 실학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실경의 소재는 조선 초기·중기와 마찬가지로 명승명소(名勝名所)·별서유거(別墅幽居)·야외아집(野外雅集)류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중 특히 금강산과 관동지방, 서울 근교일대의 경관이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

화풍은 종래의 실경산수화 전통에 18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가미하여 형성되었으며, 정선(鄭敾)에 의해 대성되었다.

정선은 금강산과 영남지방 및 서울 근교일대를 다니면서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을 토대로 표현, 새로운 화격을 이룩함으로써 전통 실경산수화의 면모를 일신하고, 진경산수화풍의 정형을 수립했다. 그의 진경화풍은 기존화법과 남종화법을 우리 산천의 형상에 어울리는 필법으로 소화해낸 것으로 실경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해 경관에서 받은 정취를 감동적으로 구현했다는 데 큰 특색이 있다.

그리고 양식적으로는 부감법(俯瞰法)의 시각에 동적인 대각선이나 사선을 활용한 화면구성법을 비롯하여 부드러운 피마준법(皮麻皴法)과 듬성한 태점(苔點), 괴량감 넘치는 짙은 적묵(積墨)의 바위와 능란한 편필(偏筆)의 스케치풍 소나무 묘사법 등이 특징적이다. 특히 금강산 화법에서는 예각적인 바위 봉우리들을 날카로운 수직준(垂直皴)으로 요약하여 굳세고 빼어난 골기(骨氣)를 나타낸 다음, 이를 토산(土山)의 부드러운 미점(米點)과 대조시켜 만물을 생성화육하게 하는 원동력인 음양의 조화처럼 보이도록 했다(→ 금강전도). 정선의 이러한 화풍은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정황(鄭榥)·김유성(金有聲)·최북(崔北)·정충엽(鄭忠燁)·장시흥(張始興)·김응환(金應煥)·김석신(金碩臣)·김득신(金得臣)·거연당(居然堂) 등 주로 중인층 문인화가들과 화원들에게 파급되어 정선파(鄭敾派)라는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면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풍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통신사절단을 따라 도일했던 최북과 김유성을 통해 일본 에도 시대[江戶時代]의 남화가인 이케노 다이가[池大雅], 우라카미 교쿠토[浦上玉堂]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민화의 금강산도와 관동팔경도의 양식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후반을 풍미했던 정선파의 화풍은 강희언·김윤겸 등의 일부 중인 서얼층 문인화가들에 의해 참신한 사경풍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화원들에 의해 형식화의 경향을 나타내면서 18세기 말엽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였던 강세황(姜世晃)은 정선의 화풍과 형식화된 영조시대 진경산수화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실제 경관과 부합되는 사실적인 기법을 강조했다.

〈송도기행도첩 松都紀行圖帖〉(국립박물관)을 통해 서양화법을 수용하면서 사실적인 화풍을 구현했던 강세황의 이러한 경향은 김홍도(金弘道)에 의해 구도와 필법이 더욱 치밀하고 박진감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되었다. 김홍도의 이와 같은 화풍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양식으로 18세기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이인문(李寅文)·조정규(趙廷奎)·임득명(林得明)·이유신(李維新)·엄치욱(嚴致郁)·이재관(李在寬)·김하종(金夏鍾)·유숙(劉淑) 등의 화원들에게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풍은 정선파와 김홍도파 이외에도 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강세황·허필(許佖)·정수영(鄭遂榮)·윤제홍(尹濟弘)·정철조(鄭喆祚) 등의 문인화가들도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다. 이들은 남종화법과 함께 문인풍의 격조높은 화법을 바탕으로 색다른 개성미를 보여주면서 이 시대 진경산수화의 다양한 전개에 기여했다.

이와 같이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근대이행적인 의의를 지니면서 한국적 화풍의 수립과 함께 조선 후기의 회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정치권의 보수화 추세에 의해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이 득세함에 따라 쇠퇴하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에서 1970년대에 걸쳐 생활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그리는 사경산수화(寫景山水畵)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양식보다는 정신적 배경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선의 〈금강전도 金剛全圖〉·〈인왕제색도 仁旺霽色圖〉(호암미술관)·〈경외명승첩 京外名勝帖〉(간송미술관)을 비롯하여 강희언의 〈인왕산도〉(개인 소장), 김윤겸의 〈영남명승첩 嶺南名勝帖〉(동아대학교 박물관), 김응환의 〈금강산화첩〉(개인), 김석신의 〈도봉산도 道峰山圖〉(개인), 심사정의 〈경구팔경도 京口八景圖〉(개인 소장), 이인상의 〈구룡연도 九龍淵圖〉(국립중앙박물관), 정수영의 〈한림강명승도권 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의 〈송도기행도첩〉(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금강사군첩 金剛四郡帖〉(개인 소장), 이인문의 〈단발령망금강전도 斷髮嶺望金剛全圖〉(개인 소장), 임득명의 〈서행일천리장권 西行一千里長卷〉(개인 소장), 조정규의 〈금강산병풍〉(개인 소장), 김하종의 〈금강산화첩〉(개인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