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석

조영석

다른 표기 언어 趙榮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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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86(숙종 12)
사망 1761(영조 37)
국적 조선, 한국

요약 그림에 대해서 우의성과 공리적 가치를 강조했으며, 인물과 산수 등에서 문인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조선 후기 남종화의 정착과 풍속화의 전개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40세 이전까지는 화보풍을 주로 다루다가 40~50대를 통해 사생과 풍속에 관심을 보였으며, 60대 이후에는 수묵 위주의 표현적 세계와 시적인 정취에 몰두했다. 인왕산 아래에서 정선과 이웃해 살면서 이병연·이병성·유척기·조정만 등과 어울려 시화를 논하며 각별히 지냈다. 대표작품으로는 〈강상조어도〉·〈방당인필어선도〉·〈장기도>·〈설중방우도〉 등이 있고, 문집 〈관아재고〉가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조영석
조영석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종보(宗甫), 호는 관아재(觀我齋)·석계산인(石溪山人).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해(楷)이다. 이희조(李喜朝)의 문인이다. 1713년(숙종 39)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8년 천거로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1756년(영조 32)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다음해 돈녕부도정에 이르렀다. 1735년 세조어진 모사에 불응하여 투옥된 바 있으며, 1748년 숙종어진 모사에도 감동(監董)으로 참여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기술로 임금을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사양했다. 인왕산 아래의 순화방(順化坊)에서 정선(鄭歚)과 이웃해 살면서 이병연(李秉淵)·이병성(李秉成)·유척기(兪拓基)·조정만(趙正萬) 등과 어울려 시화(詩畵)를 논하며 각별히 지냈다. 홍의영(洪儀泳)의 〈관아재화첩〉 발문에 의하면 "본래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겸하여 산수도 잘했는데 금강산을 다녀온 뒤로 화경(畵境)이 더욱 진보되어 명작을 많이 낸 바 있고, 또한 고화(古畵)에 대한 논평을 좋아했으나 간혹 지나친 점이 있어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림에 대해서 우의성(寓意性)과 공리적 가치를 강조했으며, 인물과 산수 등에서 문인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조선 후기 남종화의 정착과 풍속화의 전개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40세 이전까지는 화보풍(畵譜風)을 주로 다루다가 40~50대를 통해 사생과 풍속에 관심을 보였으며, 60대 이후에는 수묵 위주의 표현적 세계와 시적인 정취에 몰두했다. 대표작품으로는 〈강상조어도 江上釣魚圖〉(국립중앙박물관)·〈방당인필어선도 倣唐人筆漁船圖〉(국립중앙박물관)·〈장기도 將棊圖〉(간송미술관)·〈설중방우도 雪中訪友圖〉(개인 소장)·〈사제첩 麝臍帖〉 등이 있고, 문집 〈관아재고 觀我齋稿〉가 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