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

식민사관

다른 표기 언어 植民史觀

요약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낸 역사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확립된 일본의 한국사연구는 크게 세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신공황후의 신라정복설, 임나일본부설을 계승한 일선동조론이다. 일선동조론은 일제의 한일합병을 합리화시키는 이념으로 동화정책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둘째, 만선사를 바탕으로 한국사를 만주사에 종속된 역사로 파악함으로써 한국사의 독자적 발전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논리로 나타났으며, 이후 한국사의 타율성론으로 발전해갔다. 셋째, 한국의 경제가 일본 고대 말기의 촌락경제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정체성론이 등장한다. 이는 한국이 근대사회로 이행하기 위해 일본의 침략이 필수적이라는 침략미화론으로 연결되었다.

목차

접기
  1. 일선동조론 식민사관
  2. 타율성론 식민사관
  3. 정체성론 식민사관
  4. 일제의 한국사서술

한민족의 자주적인 역사발전 과정을 부정하고 한국사에서 타율적이고 정체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우리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다.

식민사관에 입각한 한국사연구는 일제 침략 전기간에 걸쳐 한층 교묘하게 분장되어갔지만, 그 원형은 이미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확립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 1887년 사학과, 1889년 국사과가 설치되면서 주로 독일 랑케 사학의 문헌고증학 방법론에 입각한 근대적 방식의 한국사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요시다[吉田東伍]·하야시[林泰輔]·시라토리[白鳥庫吉] 등이 중심이 되어 한국고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이들의 연구는 20세기초 일제의 한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그들의 침략행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틀을 갖추어나가게 되는데, 크게 세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에도[江戶] 시대 이래 〈고지키 古事記〉·〈니혼쇼키 日本書紀〉 등 일본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들이 주장하던 신공(神功)황후의 신라정복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계승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이 강하게 나타난다. 1877년 간행된 〈일본사략 日本史略〉을 개정하여 1890년 도쿄제국대학의 교수로 있던 시게노[重野安釋]·구메[久米邦武]·호시노[星野恒]가 공동 저술한 〈국사안 國史眼〉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된 일선동조론은 일제의 한일합병을 합리화시키는 이념으로 우리 민족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동화정책의 논리적 근거로 이용되었다. 둘째, 시라토리의 주도하에 1908년 만철 내에 설치된 만선지리역사조사실(滿鮮地理歷史調査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나바[稻葉岩吉]·이케우치[池內宏] 등의 역사학자들을 통해 만선사(滿鮮史)가 성립하게 된다. 만선사는 원래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켜 한국사와 더불어 한 체계 속에 묶음으로써, 중국의 만주에 대한 주권행사를 제한하는 역사적 논거를 제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사를 만주사에 종속된 역사로 파악함으로써 한국사의 독자적 발전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논리로 나타났으며, 이후 한국사의 타율성론으로 발전해갔다. 셋째, 경제사를 연구하는 후쿠다[福田德三]·구로타[黑田岩] 등을 중심으로 당시 한국의 경제가 일본 고대 말기의 촌락경제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정체성이론이 등장한다. 이는 한국사회가 사회경제구조 발전이 전무한 정체된 사회이기 때문에 근대사회로 이행하기 위해 일본의 침략은 필수적이라는 침략미화론으로 연결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선동조론·타율성론·정체성론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식민사관이 형성되었다.

일선동조론 식민사관

한국과 일본은 외국이나 이민족이 아닌 일본에서 갈라진 같은 민족으로, 일본은 한 핏줄인 한국을 만주·몽골·중국의 침략에서 보호하고 융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한민족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주장이었다. 이 입장에 설 때 일제의 한국침략과 한일합병은 갈라진 민족이 하나로 합쳐지는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온정깊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사려깊은 배려로 인식되었다.

1890년 〈국사안〉에서 이미 그 기본틀이 확립된 일선동조론은 합병 직후 호시노·요시다·구메 등 당시 유력한 일제 관학자들이 총동원되어 〈역사지리〉의 임시증간호에 태고부터 합병까지의 한국과 일본 관계를 다룬 조선특집을 내면서 재차 강조되었다.

여기서 호시노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일한동역(日韓同域)의 복고라고 강변했다. 이렇게 일제침략과 합병을 합리화시킨 일선동조론은 3·1운동의 발발로 한민족의 민족의식과 독립열기가 급속히 고조되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한 논리로서 다시 강조하게 된다. 당시 기다[喜田貞吉]는 〈일한양민족동원론 日韓兩民族同源論〉을 써서 독립운동은 한일관계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데서 야기된 것이라며, 일제의 조선지배 정당성과 한민족의 독립운동 부당성을 역설했다.

일선동조론은 일제의 침략과 동화정책을 합리화시키는 논리적 근거로 1930년대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의 역사적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타율성론 식민사관

타율성론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한민족의 주체적인 역량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즉 한국의 수천 년 역사는 북으로는 중국·몽골·만주와 남으로는 일본 등 주변 외세의 침략과 압제 속에서 비주체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가정하에서, 우리 역사의 자율적 요소나 대외투쟁에서의 승리를 과소평가하거나 감추고, 타율적 요소만을 강조하여 이를 한국사의 주류로 보는 논리이다.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주체적 형성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단군신화에 대해서 황당하다는 명목으로 실제성과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한국사의 시작이 기자(箕子)·위만(衛滿) 조선, 한4군 등 중국지배세력의 식민지에서부터 출발했으며, 남으로는 신공황후의 남선정벌을 전후로 하여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어 일본이 수세기 동안 남선일대를 지배했다고 한다(임나일본부설). 식민사학자들의 이러한 역사인식은 고대사뿐만 아니라, 그후의 역사에까지 확대·적용되어 한국사 전개의 일반원리로서 주장되었다. 그러나 식민사관의 고대사 인식은 후대의 연구에 의해 전혀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임나일본부설의 유일한 근거인 〈니혼쇼키〉는 심한 윤색과 작위가 가해졌음이 판명되었고, 일본이 고대 통일국가의 기틀을 이룩한 것은 645년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을 거쳐 8세기초 율령이 제정된 다이카[大和] 정권 때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 수세기 전에 조선으로 대규모 병력이 출병해서 남선일대를 정복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을 보더라도 남한 내에서 일본식 유물이 거의 발굴되지 않는 반면, 일본 내에서는 삼한과 삼국계 유적과 유물이 다량 발굴됨으로써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한국인들이 일본열도의 일부를 지배했거나 최소한 그들에게 선진문화를 전파했음이 밝혀졌다.

한편 타율성론과 관련되어 이를 보다 강조하는 것이 조선의 반도적 성격론과 사대주의론이다. 그 대표적 일본의 관학자인 미지나[三品彰英]는 1940년에 쓴 〈조선사개설 朝鮮史槪說〉에서 한국이 대륙의 중심부에 가까운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사는 동양사 본류에 부속된 주변으로서 정치적·문화적으로 항상 1개 내지 그 이상의 세력 항쟁에 시달리고, 때로는 하나의 압도적 세력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한국사의 성격을 부수성·주변성·다린성으로 규정지었다.

한국사의 이런 반도적 성격은 대외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외교관계, 정치면·사회면·문화면에서도 나타나 사대주의라는 성격이 한국사 전개의 기본원리로서 형성되었다고 했다. 즉 주변세력의 변동이 국내의 정치·사회 변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한국사회와 문화의 변화도 종주국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며 나아가 이 사대주의적 성격은 한국인의 의식구조·행동양식 등 일상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주의로 굳어져 민족성으로까지 발전했다고 강변했다.

타율성론에 서서 한국사의 자주성을 일단 부정하게 되면 비주체적 역사를 가진 한민족이 언제나 외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되어져서 마침내 중국·만주·몽골의 침략적 지배보다는 일본의 온정깊은 지배를 받는 것이 한국의 재출발과 반도사적인 성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논리도 가능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타율성론은 일제의 침략과 지배를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침략미화론이었다.

정체성론 식민사관

타율성론과 함께 식민사관의 주된 지주가 되었던 것은 정체성론이었다.

정체성론은 한국사가 왕조교체 등 제반 사회적·정치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서는 아무런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봉건사회를 결여했다는 주장이다. 이를 가장 먼저 주장한 일제 관학자 후쿠다는 러일전쟁 전 한국을 여행한 후, 한국의 근대화가 늦어 혼미한 원인은 봉건제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 하면서 19세기말 조선의 사회발전단계는 일본의 10세기말 후지와라[藤原] 시대에 해당한다고 강변했다. 이런 후쿠다의 정체성론은 이후 구로타에 의해 발전되었다.

한편 3·1운동 직후 한국을 여행한 일선동조론자 기다도 한국인의 생활과 풍습이 일본 헤이안시대[平安時代 : 794~1185] 때의 일본인들과 비슷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이런 정체성론은 단순히 한국사의 사회적·경제적 낙후상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정체된 한국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해서 일본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침략미화론으로 연결된다.

후쿠다는 일본이 정체된 한국에 대해 부패·쇠망의 극에 달한 민족적 특성을 근저로부터 소멸시키고, 일본에 동화시켜야 하는 운명과 의무를 지니고 있다면서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런 후쿠다 류의 정체성론은 입장은 다르지만 이후 모리야[森谷克己]·시카다[四方博] 등에게도 계승되었다. 그러나 식민사관의 정체성론도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 이후의 사회·경제 연구성과에 의해 허구임이 밝혀졌다. 즉 한국도 서양이나 일본의 봉건제와는 형태가 다르지만 그 본질이 같은 봉건사회가 존재했으며, 봉건사회 내에서도 끊임없이 사회발전과 변동이 있어 조선 후기에는 근대사회의 모태가 되는 자본주의 맹아가 형성·발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제의 한국사서술

일제는 한일합병 직후 관학자들을 동원하여 고적조사·구관제도조사(舊慣制度調査) 등 여러 사업을 실시하여 식민지통치에 필요한 한국의 역사·지리·풍속·법제 등에 대한 기초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이를 타율성론·정체성론·일선동조론 등 식민사관의 명제를 입증하는 데 이용하려 했다.

그런데 조사과정에서 일제는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에서의 야만반개(野蠻半開)의 민족과 달라 독서속문(讀書屬文)에서 문명인에 떨어지는 바가 없다"고 1916년 펴낸 〈조선반도사 편찬요지〉에서 스스로 토로하듯이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전통을 발견했다. 또한 때마침 민족주의 역사가 박은식이 중국에서 지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국내에 유입되어 널리 읽히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이에 자극받은 일제는 서둘러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의 재구성 작업을 진행시켰다. 1915년 총독부 중추원 내에 편찬과를 설치하여 미우라[三浦周行]·이마니시[今西龍]·구로이타[黑板勝美] 3명을 촉탁으로 조선반도사 편찬에 착수했다. 이들에 의해 작성된 〈조선반도사 편찬요지〉에서는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비판하면서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편찬함으로써 조선인의 민족의식의 말살과 항일독립운동의 절멸을 꾀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3·1운동으로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조선사편찬이 시급해지고, 또한 소규모사업으로는 조선사 편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음이 드러나자,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1925년에는 일제 총독부의 정무총감을 회장으로 하는 독립관청으로까지 확대해 조선사편수회를 설립했다.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사관에 입각한 체계적인 조선사편찬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31년부터 부분적인 인쇄에 들어갔으며, 1937년에는 전35권 2만 4,000쪽에 이르는 〈조선사〉를 완성했다. 〈조선사〉는 편년체로 기술되었고 사료편으로만 채워졌는데, 외관상으로는 모든 사료를 망라하여 서술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식민사관에 입각해 많은 취사선택이 가해졌다. 한편 일제는 조선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료수집의 중요성을 강조해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각종 고기록과 문서류의 수집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에 대해 일제 관학자들은 '학술적이고 공평한' 조선사의 편찬과 사료의 인멸방지를 위한 것이라고 강변했지만, 실제로는 일반인의 사료접촉을 막고 오직 그들의 식민사관에 입각해서 편찬한 조선사만을 읽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사편수회 외에도 1926년 설치된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에서도 식민사관에 입각한 역사연구가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