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조각

한국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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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에서 발굴되었거나 한국인에 의해 제작된 조각품의 총칭.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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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사시대 한국의 조각
  2. 삼국시대의 조각
  3.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4. 고려시대의 조각
  5. 조선시대의 조각
  6. 근대 한국의 조각

한국의 조각은 불교 조각이 대부분인 것으로 여겨지나 분묘의 부장품이나 건축물 또는 생활용구·장신구 등에서도 조각적 형태의 유물이 발견된다.

남장사관음선원목불탱
남장사관음선원목불탱

선사시대 한국의 조각

석기시대에는 생활도구로서 여러 종류의 석기가 있었으나 예술성을 띤 조각품은 거의 없다.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가리비 조개에 뚫려 있는 3개의 구멍이 마치 사람의 눈과 입을 표현한 듯하여 인공이 가해진 인면(人面)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역시 예술성이 반영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동삼동유적). 청동기시대 유물 중에는 당시의 수렵이나 농경생활 또는 신앙적인 의식용, 생활용품과 관련된 도구로 청동조각품이 발견되며 특히 동물의 표현이 많다. 그중에서 경상북도 영천군 어은동에서 출토된 허리띠 물림쇠장식[帶鉤]의 호랑이나 말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몸체 표현이 매우 부드럽고 입체적이다.

이러한 청동기시대 조각의 근원은 북방 초원지방의 스키타이계 미술품 가운데 동물의장(動物意匠 animal style)에 나타나는 사실적인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말·호랑이·사슴과 같은 동물조각이 몽골 오르도스 지방을 거쳐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미술에 영향을 준 것은 중국의 한(漢)문화를 받아들이기 이전 우리나라 고대문화의 성격을 알려주는 중요한 예이다. 청동기시대의 또다른 조각품으로는 암벽조각을 들 수 있다.

경상북도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바위그림천전리바위그림은 강가의 넓은 암벽에 부조와 선각으로 동물·물고기·인물·배 등의 윤곽을 강조하여 조각했으나 입체감이 없어 회화적인 면이 강하다. 멧돼지·사슴·호랑이 등과 같은 육지동물과 거북·고래 등과 같은 물짐승들이 분산되어 표현된 반구대 바위그림과 동심원이나 소용돌이무늬[渦紋] 등 기하학무늬가 새겨진 천전리바위그림은 당시의 수렵·농경·어업의 생활상이나 자연숭배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삼국시대의 조각

삼국시대의 조각미술 중에는 불교조각이 많이 남아 있으나 불교수용을 전후하여 조성된 분묘 부장품 중에서도 여러 종류의 조각품이 발견된다.

대표적인 동물조각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이다. 이것은 죽은 자와 그 무덤을 지키는 수호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날개와 뿔이 달려 있으며, 백제 동물조각으로서 대표적인 예이다.

가야와 신라의 고분에서는 많은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토기 위에 얹어놓은 토우 역시 당시의 조각품에 포함된다. 남녀의 성 구분이 있는 인물상·말·호랑이·새·개구리·뱀·거북 등 다양한 동물들이 단순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형태로 사실감 있게 조각되었다. 또한 기마인물형·차륜형·신구형·오리형[鴨形] 토기 등은 명기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체 모습이 조각적이어서 당시의 동물조각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이와 같은 동물형 토기나 토우는 벽사나 번식의 의미, 또는 영혼을 태우고 저세상인 명계로 인도하는 계세 사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당시 고대인의 사후 세계관이나 신앙의 성격을 알려주는 중요한 조각미술품이다. 또한 그 표현에 보이는 관찰력·해학성·사실적인 조각기법 등은 삼국시대 미술의 조각 수준을 잘 보여준다.

백제의 궁궐지나 사지에서 발견되는 문양전 중에서도 조각적인 표현이 보이는데, 특히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리에서 나온 산수문전·괴수문전·봉황문전·용문전 등은 백제조각의 부드러운 조형성을 잘 보여준다.

불교가 4세기에 전해지기는 했으나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불교조각은 중국적인 요소가 강한 5세기초의 뚝섬출토불좌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6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명문에 의해 539년 제작으로 추정되는 고구려불상인 연가7년명금동불입상을 비롯하여 평양 평천리 출토의 반가사유상, 백제의 부여군 군수리 납석제 불좌상과 금동보살입상, 서산과 태안의 마애삼존불, 예산의 사면석불 등은 6~7세기의 중요한 불교조각들이다. 신라는 6세기 전반에 불교를 공인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불상들은 대부분 7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경주 단석산 신선사의 마애불상군이나 남산의 탑곡마애불상군, 경주 남산 배동의 삼체석불, 경주 송화산출토 석조반가사유상, 경상북도 봉화군 북지리출토의 석조반가사유상, 경주 남산 삼화령출토의 삼존불상 등은 당시 석조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며, 금동불상으로는 숙수사지출토의 불상군과 선산출토의 보살상들이 남아 있다. 출토지나 제작국이 확실하지 않은 금동불상도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삼국시대의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걸작품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
금동미륵보살반가상

삼국시대 불교조각 가운데 대체로 6세기에 제작된 상들은 중국의 6세기초나 중엽의 불상양식이 반영되어 있고, 7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은 6세기말의 북제·북주 또는 수나라의 영향을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통일신라시대 조각미술 중에는 능 주위에 수호신으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돌린 능묘조각이 있는데 김유신릉·성덕왕릉·괘릉(원성왕릉) 등의 십이지신상이 대표적이다(김유신묘십이지신상군). 이 상들은 대부분 부조로서 문신(文臣)의 관복이나 무신(武臣)의 갑옷을 입고 우주공간의 방위와 시간을 알려주는 위치에 표현되었다.

원숭이상
원숭이상

자율적인 자세의 표현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으나, 머리는 동물이고 몸체는 사람인 점이 흥미롭다. 또한 경주 용강동과 황성동의 석실묘에서 출토된 도용(陶俑)이 있는데, 대부분 토제 남녀인물상과 말 등으로 크기는 20㎝ 미만이고 정교하지는 않지만 사실감이 있는 조각품이다(용강동고분). 이들 도용에 보이는 남녀의 복식형태나 수염 달린 남자인물상 등에서 당시의 풍습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조각은 삼국시대보다 남아 있는 작품도 많고 도상의 종류도 다양하고 규모도 크다.

또한 기록이나 명문에 의해 제작연대나 상의 명칭을 알 수 있는 경우도 많다. 표현상의 특징은 대체로 중국 당나라의 조각양식과 비슷한 변화를 보이지만, 얼굴의 부드러운 표정이나 신체표현에 보이는 조형적인 단순함과 장식적인 것을 피하려는 경향은 신라불상의 특징이다. 불상조각의 재료는 석조가 대부분이나 679년에 완성된 경주 사천왕사지에서는 소조(塑彫)로 된 사천왕전(四天王塼)이 출토되었고, 양지(良志)라는 승려는 7세기 후반에 흙으로 불상을 제작하는 솜씨가 뛰어난 조각가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경주에서 동쪽으로 동해 어구의 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감은사지의 3층석탑에서 출토된 동제사리기의 금동함 외벽에 붙어 있는 사천왕상이나 경주 구황동 3층석탑에서 나온 사리함 속의 순금제 불입상과 좌상은 700년을 전후하여 통일신라시대 조각이 삼국시대의 전통에서 벗어나 통일기 조각양식의 기틀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경주구황동금제불입상).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판불도 7세기 후반 신라에 수용된 새로운 불교도상과 당양식의 영향을 보여준다.

8세기에 제작된 중요한 불상조각은 대부분 석조인데 경주 감산사지에서 옮겨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불상실에 있는 감산사지아미타불입상과 미륵보살입상(719), 경덕왕대(742~764)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경주의 사면석불, 경주 남산일대에 환조나 마애불상으로 조각된 70여 구의 불상 등을 통해 당시 불교신앙의 유행과 함께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은 경주 토함산 위에 인공으로 축조한 석굴 속에 모셔진 39구의 석조불상군이다(석굴암 본존불, 석굴암불상군). 불·보살·신장·나한 등 불교의 모든 권속(眷屬)이 섬세하게 조각되었는데 조형적인 균형과 종교적인 정신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조각품으로 융성기를 맞은 당시의 불교미술을 대표한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는 지방호족의 후원 아래 선종(禪宗) 사찰이 여러 지역에 세워지면서 불교조각의 중심지가 경주로부터 주변지역으로 확산되면서 불교조각은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재료 면에 있어서는 불국사의 아미타불좌상과 비로자나불좌상, 백률사의 약사불입상을 제외하고는 거의 소형 금동불상들이다. 그뒤 철조로 된 불상이 대형 금동불상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실상사의 아미타불좌상, 도피안사의 비로자나불좌상, 보림사의 비로자나불좌상 등은 9세기에 제작된 대표적인 철조불상들이다. 석조 불교조각에서는 석굴암 불상군의 영향이 지속되기는 했으나 당당하고 균형 있는 자세에서 보이던 종교적 위엄은 사라지고, 조각수법에 보이던 세련미도 감소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굴표정에는 세속성이 가미되는 한편 불상조각 양식의 토착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구 동화사와 봉화 축서사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9세기의 대표적인 예이며, 불상의 도상에서는 지권인(智拳印)과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계열의 불상이 유행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불입상들과 함께 소형의 신라 후기 금동불상도 여러 점 있으나 조각적인 입체감이 감소되어 얼굴이나 몸체의 세부표현이 편평해지고 옷주름도 선각으로 처리된 경우가 많다.

또한 통일신라 후기에는 불교가 선종으로 발전하면서 이와 관련된 석조 조각물 중에 고승의 묘탑(墓塔)인 부도(浮屠)가 있는데 건축적인 구조의 벽면에 불교의 여러 도상이나 장식문양이 정교하게 조각된 것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는 염거화상탑(884)을 비롯하여 쌍봉사의 철감선사부도(868), 실상사의 홍척선사부도(875~880), 보림사의 보조선사부도(880) 등이 있다.

이들 부도가 있는 근처에는 고승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 비석들의 대좌인 귀부(龜趺)와 갓머리인 이수(首)에는 용·거북·구름 등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태종무열왕릉의 비신이 없는 귀부와 이수는 가장 이른 예이며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884),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886)의 귀부 및 이수 등이 있다. 또한 사자석등에 보이는 사자(獅子)의 표현에서도 신라인의 사실적인 뛰어난 조각솜씨를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동종(銅鐘)에서도 용뉴(龍)에 조각된 용이나 몸체에 부조된 비천·불·보살상의 표현에서 이 시대의 불교조각품의 종류와 다양한 양식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조각

고려시대의 조각품에도 불상조각이 많이 남아 있으나 고려자기의 조각적 표현에서 당시 미술에 보이는 사실성과 뛰어난 감성을 엿볼 수 있다. 청자향로 뚜껑에 조각된 사자와 염소, 연적을 원숭이나 오리 모양으로 만든 것, 승려와 동자의 초상조각에서 도자기를 매개로 한 고려 조각의 한 면을 알 수 있다. 또한 석류·참외 등과 같이 과일 모양을 소재로 하여 만든 주전자를 통해 자연에서 예술적 소재를 빌려오는 고려인의 뛰어난 창작성을 엿볼 수 있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

목조조각 중에는 경상북도 안동군 하회(河回)에서 만들어진 탈이 있는데 조각기법이 단순하고 기하학적이지만 고려시대에 제작된 인면(人面) 조각의 한 예로 중요하다(→ 하회탈 및 병산탈).

고려시대에는 불상조각 제작의 중심지가 경주에서 중부지방으로 옮겨지면서 강릉의 명주지역, 원주지역, 경기도 광주지역에서 통일신라의 전통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불상이 조성되었다. 한편 관촉사 석조보살상이나 대조사 석조보살상, 개태사 삼존석불은 고려초에 조성된 대형 석불 가운데 대표적인 예로서 그 조각양식이나 도상 면에서 전 시대와 연결되지 않는 고려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관촉사석조보살입상, 대조사석조보살입상, 개태사석조삼존불상). 고려 후기의 불교조각 가운데 장곡사 금동불좌상(1346)과 문수사 금동불좌상(1346)이 현전하는데, 이 조각양식의 계보는 중국의 요나라와 금나라의 불상양식과 관련되면서 고려양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문주사금동아미타불좌상, 장곡사금동약사불좌상). 또한 고려 왕실과 원나라와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원에서 받아들인 라마 불교의 성격을 띤 조각양식도 보이는데 금강산 회양출토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금강산출토금동관음보살좌상). 개성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온 경천사10층석탑의 탑신에 부조된 불상표현에서도 14세기에 조성되었던 불상의 새로운 양식적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석조조각물로는 통일신라시대에 선종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 선승들의 묘탑과 탑비를 들 수 있다.

보원사 법인국사보승탑과 탑비(978)의 귀부 및 이수,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977)과 탑비(975)의 귀부 및 이수 등을 통해 고려시대 조각의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에 있는 석등(1379)은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말선초의 석조 조각연구에서 중요하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조선시대의 조각

조선시대의 불교미술은 전시대에 비해 융성하지 못했지만 불상은 여전히 예배의 대상으로 조성되었다. 불상조각 가운데 임진왜란 이전의 상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매우 적은데 수종사탑에서 출토된 불감 내에 모셔진 금동불상군(1493, 1628), 기림사의 건칠관음보살좌상(150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목조아미타상(1492) 등이 있다.

불상조각의 대부분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그 표현양식의 변화가 별로 없다. 불신이 왜소해지는 한편 상의 구조에 따른 조각의 굴곡이 거의 표현되지 않았으며, 얼굴표정도 생동감이 결여되어 당시 사회에서 차지한 불교신앙의 위치를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용문사·남장사·실상사 등에 남아 있는 목각탱은 17세기 이후의 조선시대 불상의 다양한 자세와 도상의 실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예이다.

조선시대의 조각품 중에는 여러 왕릉의 입구에 놓여진 문무석인이나 동물상, 궁전 석조물의 일부로 배치되거나 장식된 십이지상과 사신상 등에서 조선 후기의 조각이 단순해지고 민속적인 성격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절이나 민속품으로 전해지고 있는 조선 후기의 목각동자상들은 근대로 이어지는 인물조각상으로 주목할 만한 예이다.

근대 한국의 조각

우리나라의 근대 조각은 불교조각과 능묘조각이 주류를 이루는 전통조각과는 달리 서구미술의 영향을 받으며 인물상 위주로 전개되었고 그 활동무대도 조선미술전람회(1925년 제4회 때부터 조각이 신설됨)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중심이 되었다. 전통적인 조형관념과 단절된 채 새로 유입된 서구적 조형의식과의 공존 및 대립 양상을 보여주었던 우리나라의 근대 조각은 1925년 김복진이 일본 도쿄[東京] 미술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귀국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김복진은 인물의 형태감과 표정 표현에 충실한 사실적인 작품들을 일본의 제전(帝典)과 선전에 출품했으며, 미술이론에도 정통하여 활발한 비평활동도 했다. 1930년대에도 사실적인 조각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김복진의 제자인 이국전·김경승·윤효중·이병삼 등이 그뒤를 이어 활발한 활동을 했다. 조각의 형태가 두상에만 머물지 않고 목재·석재·청동 등을 이용해 흉상(胸像)·전신상(全身像)·군상 등을 제작했다. 1940년대에는 정부수립과 함께 생겨난 국전이 기성 조각가들의 중요 발표무대이자 신인등용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조각가협회가 조직되었다. 1950년대에는 6·25전쟁으로 좌익계 조각가들이 월북하는 등 조각계의 재편이 이루어졌으며, 윤효중·김경승·김종영 등 일제강점기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중진작가들에 의해 조각계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들은 8·15해방 후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 신설된 조각과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국전심사에도 참여하여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당시의 조각 특징은 아카데미즘에 기초한 자연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후반부터는 이전의 인체 중심의 구상적인 기법에서 벗어나 앵포르멜·추상주의 같은 외래사조에 영향을 받아 조각의 본질적 조형탐구가 이루어져 많은 모뉴망 조각작품들이 제작되었다. 1960년대에는 전후 현대미술의 확장과 함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실험조각과 추상조각이 매우 활발했는데 특히 8·15해방 후 미대 출신의 최기원·박석원·이종각·송영수·엄태정 등과 같은 신진조각가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서양조각사,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