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무령왕릉

다른 표기 언어 武寧王陵 동의어 송산리고분군 제7호분

요약 1971년 송산리 5, 6호 고분의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축조연대와 피장자가 분명하며 부장품이 고스란히 발견되어 삼국시대 고분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고분의 구조는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 형식을 모방하고 있다. 봉토의 평면은 직경 20m 가량의 원형이며 널방은 남북방향을 축으로 한 긴 네모꼴의 평면을 갖고 있다. 남북길이 4.2m, 동서너비 2.72m이며 높이는 2.93m이다. 왕과 왕비를 합장했는데 왕과 왕비 모두 옻칠된 목관에 각기 안치되어 있었다.
왕과 왕비의 장신구인 금제 관장식, 귀걸이, 은제 허리띠, 금동 신발, 목걸이, 팔찌 등이 발견되었으며, 그외 무기류, 청동제품, 자기류, 목제품 등 다양한 유물들도 있었다. 충청남도 공주시 왕릉로 37-2에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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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금제관장식
    1. 왕의 관장식
    2. 왕비의 관장식
  2. 금제귀걸이
    1. 왕의 귀걸이
    2. 왕비의 귀걸이
  3. 무령왕 금제 뒤꽂이
  4. 금제목걸이
  5. 무령왕비 베개
  6. 무령왕릉 지석
  7. 무령왕릉 석수
  8. 무령왕비 은팔찌
  9. 무령왕 발받침
  10.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1. 개요
    2. 청동신수경(靑銅神獸鏡)
    3.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
    4. 수대경(獸帶鏡)
무령왕릉(武寧王陵) 입구
무령왕릉(武寧王陵) 입구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옛 이름은 송산리)에 위치한다. 1971년 송산리 5호분·6호분의 배수구를 마련하는 작업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고분의 축조연대와 피장자가 분명하며 도굴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상태로 껴묻거리가 고스란히 발견되어 삼국시대 고분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고분의 구조는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塼築墳]의 형식을 모방하고 있다.

봉토의 평면은 직경 20m 가량의 원형이며 분구의 동남쪽에서 둘레돌[護石]이 발견되었다. 널방[墓室]은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는데, 남북방향을 축으로 한 긴 네모꼴의 평면을 갖고 있다. 남북길이 4.2m, 동서너비 2.72m이며 높이는 2.93m이다. 긴 벽인 동·서벽은 점차 위로 올라가면서 아치 모양으로 만곡하며 짧은 벽인 남·북벽은 거의 수직으로 올라가고 있다. 널길[羨道]은 남벽 중앙부에 설치되었으며 널길과 널방의 사이는 한 단 낮고 널길바닥과 널방바닥은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다. 왕과 왕비를 합장했는데 왕이 동쪽, 왕비가 서쪽에 놓였고 머리방향은 입구 쪽인 남쪽을 향하고 있다.

왕과 왕비 모두 옻칠된 목관에 각기 안치되어 있었는데 목관 표면은 꽃 모양의 금·은제 장식으로 꾸몄다. 널길에는 돌로 만든 석수(石獸) 1마리가 입구쪽을 향해 놓여 있었으며 그 앞에는 왕과 왕비의 매지권(買地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장신구로서는 왕의 것으로 금제 관장식, 심엽형 귀걸이, 뒤꽂이, 은제 허리띠[銙帶], 금동 신발 등이 있으며 그밖에 각종 금·은제 장식이나 구슬이 발견되었다.

왕비의 것으로는 역시 금제 관장식과 귀걸이, 목걸이, 금·은제의 팔찌 외에도 많은 수의 장식이 발견되었다. 동탁은잔(銅托銀盞)과 구리로 만든 은잔 받침은 왕비의 애장품으로 추정되는데, 은잔 받침에는 중심부의 연꽃무늬 주위에 인면조(人面鳥)와 용, 사슴, 새와 나무 등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인면조는 오른쪽 날개 부분에 연꽃이 놓여 있다. 인면조는 불교의 영향으로 전래된 상상의 새로, 머리와 팔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머리에는 새의 깃털이 달린 화관을 쓰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이밖에도 단룡문환두대도·철모·손칼 등의 무기류, 거울·용기(用器)·숟갈·다리미 등의 청동제품, 청자·백자 등의 자기류, 두침(頭枕)·족좌(足座) 등의 목제품 등 다양한 유물들이 부장되어 있었다.

무령왕릉(武寧王陵)
무령왕릉(武寧王陵)
참고내용

무령왕릉의 금제관장식
무령왕릉의 금제관장식
왕의 관장식

국보(1974.07.09 지정). 1쌍. 높이 각각 30.7㎝, 29.2㎝.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금판 위에 초화형의 형태를 그려놓은 뒤에 예리한 조각도로 도려내어 만들었다.

관장식의 전반적인 형태는 비대칭의 인동당초무늬[忍冬唐草紋]이며 군데군데 구멍을 뚫고 얇은 금제 달개[瓔珞]를 금실로 꼬아 매달았다. 이러한 형태의 관장식은 출자형솟은장식[出字形立飾]으로 특징지어지는 신라의 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고구려의 유물인 평양 청암리토성 출토 초화형 금동관과 통하고 있다.

이 관장식이 2점 출토된 것으로 보아 비단으로 된 모자의 앞뒤에 꽂은 장식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자루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모자와 연결시키도록 되어 있다.

왕비의 관장식

국보(1974.07.09 지정). 1쌍. 높이 각각 22.6㎝, 22.8㎝.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얇은 금판 위에 형태를 그린 뒤 날카로운 조각도로 도려내고 뚫어 만들었다.

본체는 금제이나 자루 아래쪽에는 청동으로 만든 긴 자루를 잇대어 붙였다. 전반적인 형태를 살펴보면 인동당초무늬를 표현한 것으로서 왕의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정확히 대칭을 이루며 달개가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착용방법은 왕의 것과 동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제귀걸이

왕의 귀걸이

국보(1974.07.09 지정). 1쌍. 길이 각 8.3㎝.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왕의 것으로 2줄의 호화로운 드리개[垂飾]를 단 형식이다. 주가 되는 드리개는 누금세공으로 장식한 속이 빈 원통형의 중간장식 끝에 금판으로 된 커다란 심엽형 드리개를 달았다. 이 심엽형 드리개는 아무 장식도 없고 단지 앞뒷면에 안으로 굽은 술잔 모양의 작은잎[子葉]을 하나씩 붙여 변화를 주고 있다. 다른 드리개 가닥은 여러 개의 가는고리[細環]로 이루어진 구슬 모양의 장식에 5개의 나뭇잎 모양 달개를 5단으로 연결했으며, 끝에 금모(金帽)를 씌운 비취빛 곱은옥[曲玉] 1개씩을 매달아 금빛과 조화를 이루게 했다. 또 이들 드리개의 금모와 작은 달개 등에도 누금세공으로 장식했다. 이것은 그 모양이 조금 작은 것을 빼면 경주 노서동 금령총에서 발견된 것과 제작수법이 같다. 매우 호사스런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함께 발견된 왕비의 것과 함께 백제 귀걸이 제작기술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왕비의 귀걸이
무령왕릉의 금제귀걸이
무령왕릉의 금제귀걸이

국보(1974.07.09 지정). 2쌍. 길이 각각 11.8㎝, 8.8㎝.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가는고리식[細環式] 귀걸이로 1쌍은 길고 짧은 2줄의 드리개가 달려 있으며 다른 1쌍은 드리개가 1줄 뿐이다. 2줄 드리개 귀걸이의 긴 가닥은 4개씩의 원형 달개가 금사슬에 7단으로 연결되어 있고 끝에는 작은 고리를 연결해 8개의 둥근 달개를 단 아래에 탄환 모양의 드리개를 매달았다. 나머지 1쌍의 것과 거의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짧은 가닥의 수식은 탄환 모양의 장식 대신 잎사귀 모양의 달개와 담녹색의 둥근옥[球玉]을 달았다. 그리고 잎사귀형 달개 아래로는 사익형(四翼形)의 초실형드리개[草實形垂飾]가 있고 맨 끝에는 작은 돌기가 달려 있다. 입사귀형 달개와 초실형 드리개의 둘레는 누금기법으로 윤곽을 돌렸다. 고구려 유적에서나 볼 수 있는 이 탄환 모양의 드리개가 백제유적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무령왕 금제 뒤꽂이

왕의 목관 안 머리 부근에서 발견된 순금제 뒤꽂이. 국보(1974.07.09 지정). 길이 18.4㎝.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금판을 오린 뒤 뒷면을 두들겨서 무늬를 돋아나오게 하는 수법으로 만들었다. 위는 넓고 밑은 긴 역3각형 모양으로 밑이 3가닥의 긴 핀처럼 마무리되어서 마치 날고 있는 새를 본뜬 것처럼 보인다.

윗면 가운데에는 보주형 돌기가 있는데 마치 새머리 같고, 양옆으로 활 모양을 그리면서 굴곡져 있어 날개처럼 보인다.

무령왕릉 금제뒤꽂이(국보 제159호)
무령왕릉 금제뒤꽂이(국보 제159호)

옆선은 안으로 부채꼴을 이루며 휘어졌는데 윤곽을 따라 융기선이 1줄 찍혀 있다. 3각형부는 아래위로 구분해 위에는 팔화형(매화꽃 비슷한 8잎 모양)을, 아랫부분에는 중심선을 두고 S자형의 인동무늬(당초무늬)를 양쪽에 대응시켰다.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풍기는 이 뒤꽂이는 끝이 3줄로 갈라진 것으로 보아 머리나 관에 꽂아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데 썼던 것으로 짐작된다.

금제목걸이

왕비 쪽에서 발견된 금제목걸이. 국보(1974.07.09 지정). 1쌍 전체지름 각각 약 14㎝, 16㎝.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9마디로 된 것과 7마디로 된 것 2종류가 있다. 발굴 당시 7마디 목걸이가 9마디 목걸이 밑에 겹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먼저 착용했던 것 같다. 만든 방법과 구조는 2개가 거의 같다. 활처럼 휘어진 6각의 금봉 각 마디마다 중간부는 굵게 하고 끝으로 갈수록 실처럼 가늘게 늘여 고리를 만들어 일정한 간격으로 다른 것과 연결시킨 다음, 풀리지 않도록 남은 부분을 금봉에 감아 돌렸다. 연결부 중 1군데는 목에 걸기 위한 가는 고리가 끼워져 있다. 금봉에 고리와 매듭을 겸한 솜씨가 매우 세련되고 뛰어나며 현대적 감각이 돋보인다.

무령왕비 베개

두침
두침

왕비의 머리를 누인 받침대. 국보(1974.07.09 지정).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왕과 왕비 모두 나무로 만든 두침을 벤 상태로 안장되어 있었으나 왕의 것은 부식이 심해 원상을 알기 어렵고 왕비의 것은 상태가 양호하다. 길이 40㎝, 높이 33.7㎝의 나무를 U자 모양으로 둥그스름하게 파내어 머리가 얹힐 부분을 만들었다. 나무표면에 붉은칠을 하고 금박으로 거북등무늬[龜甲紋]를 구획한 후 그 안에는 각종 그림을 붓으로 그렸다. 상단의 평탄면 2군데에는 나무로 만든 봉황머리장식을 하나씩 올려놓았고 이 장식이 놓인 두침의 부위에는 '甲', '乙'이라는 묵서명문이 있었다.

무령왕릉 지석

무령왕릉 널길 중간에 있는 돌짐승상 앞에서 발견된 왕과 왕비의 지석. 국보(1974.07.09 지정). 왕의 지석 너비 41.2㎝, 높이 35.1㎝, 두께 4.5㎝. 왕비의 지석 너비 42.4㎝, 높이 35.5㎝, 두께 4.3~6㎝.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직4각형의 각섬석 앞뒷면에 세로선을 긋고 해서로 음각했다. 왕의 출생연도나 경력에 대한 기록은 없고 장례에 필요한 기사만 있다. 왕의 지석 앞면에는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로부터 받은 작호, 사망시 나이와 시신을 능묘에 안장한 시기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동·남·북에 방위간지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능묘에 관한 방위도 혹은 능역도를 겸한 것이다.

왕비의 지석 앞면에는 무령왕 사망 후 3년 뒤에 왕비가 사망한 사실과 그로부터 3년 뒤에 왕과 합장한 사실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전일만문'이라는 묘지 대금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묘지매매기록으로 보인다. 또한 지신으로부터 토지를 매입해 능묘를 삼았기에 문권을 작성해 증거로 한다는 내용도 있다.

지석에 나타나는 월삭 및 일간지는 백제 역법이 중국 남조 송나라 원가력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보여준다. 아울러 무령왕의 생몰년을 토대로 검토해본 결과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 된다는 견해가 제시되어 백제 정치사의 새로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이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중 최초로 피장자와 축조연대를 밝혀주고 있으며, 백제문화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무령왕릉 석수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돌로 만든 상상의 짐승. 국보(1974.07.09 지정). 높이 30㎝, 길이 47.3㎝.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널길 중앙에서 바깥쪽을 향한 자세로 발견되었다.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의 역할을 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반적인 형상은 투박한 인상을 주는데, 코와 입은 뭉툭하며 눈과 귀는 튀어나와 있다. 머리 한가운데에는 쇠로 만든 수지형의 뿔이 꽂혀 있다. 등에는 초생달 모양의 돌기 4개가 표현되어 있고 몸통의 측면에는 날개 모양의 형태가 표현되어 있다.

무령왕비 은팔찌

왕비의 왼쪽 팔목에 끼웠던 은으로 만든 팔찌. 국보(1974.07.09 지정). 바깥지름 8㎝.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팔목이 닿는 안쪽의 테두리 부위에는 수직의 짧은 선무늬를 가지런히 돌렸고 바깥면에는 3마리의 용이 힘차게 새겨져 있다. 내면에는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耳"라는 명문이 들어 있어서 이 팔찌가 다리라는 공인이 대부인, 즉 왕비를 위해 경자년(520)에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 발받침

사자의 발을 올려놓은 받침대. 국보(1974.07.09 지정).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왕과 왕비의 것이 하나씩 발견되었다. 왕의 것은 길이 40㎝, 높이 20㎝ 가량 되는 나무를 W자 모양으로 파내고 전면에 검은칠을 했다. 발이 놓이는 부분과 족좌의 바닥면을 제외하고 금박으로 거북등무늬를 구획했다. 금박의 선이 꺾이는 지점과 거북등 구획의 중앙에는 꽃잎이 6개인 금제 연꽃무늬 장식을 배치했는데, 연꽃무늬 장식의 중앙에는 금제 달개가 하나씩 달려 있다. 왕비의 것은 전면에 붉은칠을 하고 테두리에 금박을 입힌 후 내부에는 검은색의 구름무늬를 채워넣었다.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개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3개의 청동거울. 국보(1974.07.09 지정).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청동신수경(靑銅神獸鏡)

왕의 족좌 북쪽에서 발견된 거울. 지름 17.8㎝. 원래는 나무상자 안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거울 뒷면에는 신선사상이 표현된 문양이 나타나 있다. 가운데 원형의 고리를 중심으로 방형의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는 12개의 돌기가 돌아가며 돌기와 돌기 사이에는 12지의 글자가 씌어 있다. 방형 구획 밖에는 1명의 신선과 4마리의 짐승이 표현되어 있다. 신선은 상의를 벗고 하의만 입은 채 긴 창을 들고 짐승들을 사냥하고 있는 듯하다. 신선과 짐승의 주위로는 신선사상이 내포된 명문이 돌아가고 있다.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국보 제161호)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국보 제161호)

왕의 머리쪽에서 발견된 거울. 지름 23.2㎝. 둥근 고리의 주위에 9개의 돌기를 돌리고 그 사이에는 작은 짐승을 표현하고 '宜子孫' 3자를 넣었다. 그 외곽에는 7개의 돌기를 꽃잎무늬 위에 배치하고 그 사이에 7마리의 신수(神獸)를 조각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거울 중에 가장 크며 가운데 고리구멍에는 직물의 조각을 접어서 만든 끈이 부식된 채 붙어 있다.

수대경(獸帶鏡)

왕비의 관장식 아래에서 발견된 거울. 지름 18.1㎝. 둥근 고리 둘레에 9개의 작은 돌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빗금무늬대와 소문대(素紋帶)를 계속해서 돌렸다. 외곽에는 7개의 돌기를 두고 그 사이에 4명의 신선과 3마리의 짐승을 하나씩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