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조각사

서양조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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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서양에서 조각예술이 변천해온 역사.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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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동기 및 철기 시대 조각
    1. 에게 및 동지중해권
    2. 서지중해권
  2. 그리스의 조각
    1. 개요
    2. 기하학기
    3. 동방화기
    4. 아케익기
    5. 고전기
    6. 헬레니즘기
  3. 로마의 조각
  4.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과 서양조각
  5. 비잔틴 시대의 조각
  6. 중세 초기의 서양조각
  7. 로마네스크 시대의 서양조각
  8. 고딕 시대의 서양조각
  9.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조각
  10. 바로크 시대의 서양조각
  11. 신고전주의 시대의 서양조각
  12. 낭만주의 시대의 서양조각
  13. 현대의 서양조각
    1. 19세기말
    2. 아방가르드
    3. 구성주의와 다다이즘
    4. 보수적 반동
    5. 환상조각(1920~45)
    6.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조각은 넓게 정의해서 관찰하거나 상상한 대상들을 단단한 재료를 써서 3차원으로 나타내는 미술이다. 서양의 조각은 인간의 형상이나 행동을 본떠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체로 휴머니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경향을 띤다. 조각의 일반적인 2가지 유형으로는 조상(彫像)의 주위를 사방에서 돌아볼 수 있게 만든 환조와, 벽 등을 바탕면으로 하여 그것으로부터 돌출시켜 만드는 부조가 있다.

서양의 조각은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 시대까지, 그리고 중세부터 19세기말에 걸쳐 아케익 양식화로부터 사실주의로 전개되는 과정을 2번 반복하게 된다. 서양의 조각가들은 실제의 인체를 면밀히 관찰하여 처음에는 그 이상적인 모습과 비례를 찾으려 했고 나중에는 영웅적이고 비장하며 극적인 효과를 추구했다. 후대에 와서는 사소한 감정까지도 조각으로 표현했고 친밀감이 가는 세속적인 주제들을 애호하기도 했다.

헬레니즘기 이전의 그리스, 초기 그리스도교, 비잔틴, 초기 중세의 예술은 그리스·로마·르네상스의 휴머니즘적 자연주의와 대립적인 성격을 갖는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휴머니즘적 자연주의의 전통에서 일탈하여 새로운 재료와 기법, 새롭고 복합적인 심상을 실험해보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추상미술의 출현으로 '상'(figure)이라는 개념은 넓게 비언어적 재현까지도 포괄할 만큼 확대되었다.

환조의 개념도 독립적으로 서 있는 조각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범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조각의 부분들 및 그 전체의 실제적 운동을 작품의 구성요소로 부각시키는 키네틱 조각과, 주어진 환경을 일종의 매체로 삼아 이를 변경시키거나 그 안에 감상자가 참여하도록 환경을 제공하는 환경조각의 2가지 유형이 새롭게 등장했다.

청동기 및 철기 시대 조각

에게 및 동지중해권

에게 문명이란 대략 BC 3000~1100년에 에게 해 주변에서 형성된 선사시대 청동기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발생초기부터 이 문화는 3가지의 다른 문화권을 갖고 있었다. ① 크레타 섬의 미노스 문명(전설적인 미노스 왕의 이름에서 유래), ② 키클라데스 군도의 키클라데스 문화, ③ 그리스(헬라스) 본토의 헬라도스 문화가 그것이다.

에게 지방에서 처음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곳은 크레타 섬으로, 이곳에서는 BC 3000년부터 이집트 및 고대 근동의 영향 아래 서서히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곧 독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미노스 시대의 초기 1,000년간은 잠재적인 발전의 시기였는데, 이 시기의 가장 뛰어났던 예술로는 도기류를 들 수 있다. 초기 미노스 문화와 같은 선상에서 발전한 초기 키클라데스 문화는 그 지역의 여러 섬에서 나는 거친 대리석을 깎아서 만든 조각상과 항아리들로 유명하다.

그리스 청동기시대의 가장 정교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 조각상들은 대개 여신상으로 인체를 최대한으로 단순화시켜 표현했다. 그 전형적인 예인 〈키클라데스 우상 Cycladic idol〉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팔짱을 낀 나체의 여성상으로 높이가 수in(인치)에서 72in까지 아주 다양하다. 그리스 본토와 동쪽의 키프로스는 미노스 문명과 키클라데스 문명의 영향권 아래 있다가 점차 독자적인 문화를 수립했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도기류·금속류·건축 등이 조각보다 우세했으며, 키프로스 문화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각으로는 동석(凍石)으로 된 십자형 대모신상이 있다.

미노스 문명은 중기인 BC 2000~1600년에 이르러 미노스 정신의 완전 개화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이때 크노소스에서 출토된 BC 1700년경의 여신상(일명 '뱀의 여신상') 2점과 같은 뛰어난 미니어처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 여신상은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신성한 뱀을 쥐고 있으며 주름으로 장식된 치마에 벨트로 허리를 조이고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다. 키클라데스 군도와 그리스 본토 그리고 키프로스에서는 이 기간 동안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못했으나 도기류만은 그 수준이 상당히 높다.

크레타 섬은 BC 1450년경에 일어난 지진, BC 1375년경에 일어난 화재, 이 2가지 사건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고 침체기에 들어서게 된다.

그런 중에도 미니어처 조각상의 제작은 여전했고 이 조각상들도 유광택 도자기 대신 청동·상아·테라코타 등으로 만들어졌다. 주제도 다양해져 예배드리는 남자, 여신, 황소를 비롯한 동물 등을 표현한 조각이 나타났다. BC 1600~1450년에는 대리석·흑요석·동석 등의 여러 가지 석재를 깎아 만든 세련된 항아리들이 등장했다. 크레타가 점차 쇠퇴해가는 반면,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는 세력을 확장하여 BC 1375~1200년에는 시칠리아 섬과 남부 이탈리아에서 소아시아 및 레반트 해안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그후 미케네는 BC 1100년경에 몰락했다. 미케네인들은 기념비적인 조각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듯하다. 기둥을 사이에 두고 사자 2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모양을 한 사자의 문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밖에도 상아·청동·테라코타로 된 소형조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미노스 문화의 영향이 다분히 남아 있다.

서지중해권

중부 및 북부 유럽과 마찬가지로 서지중해는 훨씬 일찍 문화가 꽃핀 동지중해에 가려져 있었다.

청동기 및 철기 시대의 서지중해에서는 민족이 이동하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상업활동이 활발했다. 그래서 그들은 보호와 방어를 위해 도시를 만들었고 사르데냐 섬의 원형탑 '누라기'와 같은 요새를 곳곳에 지었다. 청동기시대에 탑·신전·묘지 등지에서 발견된 500여 점에 달하는 작은 청동조각상들은 사르데냐 지방의 독창적인 조각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은 동물상들은 장수·군인·사제·여인·영웅·신 등 사르데냐 섬 원주민의 각 계층을 나타내고 있는데 세련된 기하학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코르시카 섬의 멘히르·돌기둥·조각상 등은 매우 흥미롭다. 가볍게 처리한 두상과 표현적인 상반신의 인체로 묘사한 이 거석들에는 장식적인 요소나 무기류 같은 것이 약간 붙어 있다. 이러한 원시시대의 상들은 영웅화·신성화된 족장을 나타내는 남성상이다.

청동기시대에는 여러 중심지 중의 하나에 불과했던 이탈리아 반도가 철기시대에 들어와서는 상당히 중요한 문명권으로 발전하게 된다.

빌라노바 문명과 그후의 에트루리아 문명이 그것이다. 청동기시대 말기와 철기시대 초기에 중부 및 동부 유럽에 퍼졌던 죽은 사람의 유골을 항아리에 넣는 풍습을 가진 문화에 영향을 받은 빌라노바 문명은 BC 1000년대초에 그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테라코타로 만들어졌다가 나중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빌라노바의 유골단지는 그 형태가 매우 상징적이다. 양쪽에 뿔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고 위에는 컵을 엎어놓은 것 같은 뚜껑이 얹혀 있어 영락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 단지는 때때로 죽은 사람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오두막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에트루리아 문명은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에트루리아의 아케익풍 조각들은 그리스 아케익 시대의 다이달로스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

BC 550년경에는 양식의 변화가 생겨나 조각상들이 이오니아식 특징을 띠게 되었다. 에트루리아 조각은 그리스처럼 경기자와 신의 이상화된 모습을 재현하려 하지 않았고 침상과 같은 모양의 도관(陶棺) 덮개 위에 놓인 부부의 상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은 사람의 신체적 특징을 나타내려 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사자·표범·스핑크스 등의 동물묘사를 즐겼는데 아마도 그들은 이런 야수와 악마들을 묘지를 지키는 수호자로 상상했던 것 같다.

그리스의 조각

개요

그리스 미술은 미노스·미케네 문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BC 900년에 시작하여 로마에 의해 정복당한 BC 146년까지를 말하며 대체로 그 발전양식에 따라 기하학기·동방화기·아케익기·고전기·헬레니즘기 등 5단계로 나뉜다. 그리스인들은 석회석·대리석·청동·금·상아·테라코타·목재 등을 재료로 조각을 했는데, 특히 테라코타가 가장 많이 쓰였다. 작은 조각상에는 상아·호박·석회석·대리석·목재·은·금·청동·테라코타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썼다. 그외에 그리스 조각에서 특히 뛰어난 것은 신전 박공 위에 올려져 있는 조각상, 박공조각, 메토프와 프리즈의 부조와 같은 건축조각이다.

기하학기

그리스는 북쪽으로부터 도리아족의 침입을 당해 대혼란을 겪었으나 BC 9세기 들어서는 점차 안정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침입자들과 함께 묻어들어온 그들의 예술은 그리스에 와서 기하학 양식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의 주요예술품은 도자기이며 그외에 테라코타와 청동작품들이 있다.

동방화기

이 시대의 조각은 기법과 양식면에서 동방세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BC 700년경 그리스인들은 점토부조판을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주형을 뜨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스에서는 이 방법이 보편화되면서 인물묘사에 있어서 정형화된 양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즉 다이달로스 양식(이 양식이 특히 번성했던 크레타 섬의 전설적인 장인 다이달로스의 이름을 딴 것임)이라 불리는 양식이 자리잡게 됨으로써 기하학기의 미니어처 조각에서 그 가능성이 제시되었던 자연주의와 자유로운 표현이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 양식은 BC 7세기 중엽의 그리스 조각을 대표하는 양식이 되었다.

BC 640년경에는 또다른 동방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조각에서 영향을 받아 이집트인들로부터 단단한 돌을 다루는 기법을 배워와 그동안 쓰던 석회석·점토·나무 대신 흰 대리석과 같은 단단한 돌을 쓰기 시작했다. 최초로 기념비적인 그리스 조각이 나온 것은 이 시기이다. BC 630년경 인체 비례 및 자세면에서 이집트 조각의 영향이 뚜렷한 대리석의 남성 누드 상(쿠로스)이 나오게 되면서 기법과 양식면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다이달로스 양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주의 양식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아케익기

양팔을 붙이고 한 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는 나체청년상인 쿠로스 상은 아르케익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상이다.

초기의 쿠로스 상은 실제적 관찰보다는 이론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해부학적인 세부묘사를 했지만 인체의 유기적인 흐름을 무시한 상태의 양식화된 묘사에 머물렀다. BC 480년경 비로소 몇몇 조각가들이 인체의 유기적인 구조를 알아차리게 되면서 아케익 쿠로스의 엄격한 대칭을 깨뜨리고 몸의 무게가 한쪽 다리에 실려 있는 편안한 자세의 인체를 나타내는 데 성공했다.

쿠로스와 짝을 이루는 여성상(코레)은 누드 상이 아니므로 몸의 구조 대신 옷의 모양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는데 모두가 신전에 바쳐진 봉납상들이었다. 건축조각에 있어서 초기의 신전 박공조각을 한 조각가들은 다양한 크기의 여러 군상들을 3각형의 공간 안에 배치하는 까다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얼마 뒤 이들은 쓰러졌거나 쓰러지는 순간의 인체가 있는 전투군상을 집어넣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아케익 후기로 가면 움직이는 인체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격렬한 제스처의 독립상들이 박공을 장식하게 된다.

고전기

아케익에서 헬레니즘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이 시기에는 아케익기의 유형화된 인체나 딱딱한 몸짓 대신 조용하고 균형잡힌 감정이 있는 인간을 묘사하는 양식으로 변해갔다.

이 시기의 양식은 일명 '엄격양식'이라고도 불린다. 고전기의 초기에는 기술의 발전과정과 자연주의로 흘러가는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뛰어난 건축조각들이 많이 있다. 이 시기의 뛰어난 조각작품으로는 미론의 작품들이 꼽히는데 로마 시대의 모작으로만 전해지는 〈원반던지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에는 대리석보다 청동을 많이 썼는데 청동의 특성상 부식되고 녹이 슬기 쉬워 작품들이 대부분 없어져버렸다.

20세기 들어서 〈포세이돈〉·〈전차병〉 같은 작품들이 발견되었고, 1972년에 1쌍의 전사상이 바다에서 인양되어 그나마 그 시대의 청동상을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

BC 5세기 후반의 그리스 미술은 고전양식의 절정을 이룬다. 이 시기의 미술은 신을 인간화하고 인간을 신성화하는 그리스인의 생각을 가장 세련되게 표현한 것으로 이상적인 인체묘사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상적인 상을 나타내는 데만 치중하다 보니 극단적인 표현이나 개성은 무시되었다.

그래서 격하고 고통스러운 지경에 있는 사람들조차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 미술에서 '영웅적인 나체상'이 나온 것도 그리스인들이 이렇게 이상적인 인물묘사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조각가 페이디아스는 금과 상아로 된 아테네 여신상과 제우스 상을 파르테논 신전과 올림포스 신전에 각각 만들어놓았다. 또다른 중요한 조각가인 폴리클레이토스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이상적인 남성상에 대한 정확한 비례를 작품 〈도리포로스〉(창을 멘 남자)에 구현시켜 놓았다.

조각상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반면, 이 시기의 건축조각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대부분 페이디아스의 손을 거친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조각은 고전기의 이상화된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성상을 조각할 때 그리스 조각가들은 남성상을 조각할 때와는 달리 관찰을 통해서 여성적인 특징을 살려놓았다. 아케익기에는 그저 양식적인 패턴으로만 이용했던 옷의 주름이 이 시기에 와서 인체와의 유기적인 관계 아래 생생하게 표현되었던 것이다(드레이퍼리). BC 5세기말에 옷이 몸에 딱 달라붙어 몸 구조가 환히 드러나는 양식이 나오면서 조각에서 관능적인 경향이 나타나고 고전기 양식을 주도하던 절제된 표현이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다.

BC 4세기의 대표적인 조각가로는 프락시텔레스·스코파스·리시포스를 들 수 있다.

프락시텔레스는 기술과 해부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완전히 긴장을 푼 듯 유연한 형태의 인물상을 만들었는데 이는 그리스 조각사에서 볼 때 대리석을 통해 관능미를 한껏 구현한 최초의 예이다. 〈어린 디오니소스를 안은 헤르메스〉에서는 대리석으로 살아 있는 육체의 느낌을 생생하게 나타냈다. 스코파스는 인물의 표정을 강렬하게 묘사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움푹 팬 눈자위로 얼굴표정을 나타내 고전기 조각의 차가운 느낌을 강렬한 감정을 가진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마지막으로 리시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총애하던 조각가로 폴리클레이토스가 설정해놓은 고전기 조각의 기준에 충실하면서 이전처럼 조각상들을 고정된 시점이 아니라 사방에서 돌아가면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은 조각사적 관점에서 볼 때 실로 혁명적인 발전이었다. 그래서 리시포스는 초상조각에서 인물을 이상화시키지 않고 실물과 비슷하게 묘사해 조각사에 또 하나의 커다란 발자취를 남겨놓았다.

헬레니즘기

헬레니즘 양식은 어느 특정한 유명인보다 지역 및 화파에 의해 결정된다.

현재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있는 제우스 제단의 부조, 갈리아족의 패배를 묘사하는 봉헌상의 모작들, 〈라오콘〉, 〈사모트라케의 니케〉 등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활기찬 행동과 승리·분노·좌절 등의 감정묘사가 잘 표현되어 있다. 운동감이 강조된 〈라오콘〉 군상은 시각적으로 주위공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작품으로 조각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밀로의 비너스〉를 보면 대리석의 매끄러운 표면처리로 여성상의 관능미가 한껏 과시되어 있으며, 낮은 어깨와 작은 가슴, 풍만한 엉덩이로 여성다움이 강조되어 있다. 이 시기에는 초상조각의 대상이 노쇠한 노인, 병자, 하류층 사람 등으로 확대되면서 당시로서는 새로운, 일종의 사실주의가 자리를 잡아갔다.

알렉산더 대왕 조각상
알렉산더 대왕 조각상

로마의 조각

로마의 미술은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정복하여 건설한 로마 제국 전역에서 나온 예술을 모두 포함한다.

시기적으로는 헬레니즘기가 끝난 후부터 5세기까지이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의 우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고 거기에 라틴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유럽의 고전문화를 완성시켰다. 로마의 초상조각은 영웅이나 전설의 인물보다 평범한 사람을 주제로 하여 얼굴의 주름살과 흉터까지도 묘사하는 사실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주었고, 이야기식 서술방식이 모든 예술 방면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부조와 회화에서는 대기, 공간의 깊이, 원근법 등을 통해 3차원적으로 묘사되었다.

로마인들은 원시사회에서 전해내려온 장례관습에 따라 밀랍이나 테라코타로 선조의 조상이나 데스 마스크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BC 2세기 중반에 들어와 후기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개성적이고 사실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데스 마스크). BC 1세기경에는 장례에 쓰던 사실적인 초상조각이 하나의 예술양식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급속도로 확산되어 대리석·돌·청동 등을 재료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두상이나 흉상조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초상조각 이외에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미술양식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묘사한 설화식 부조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초상조각들은 얼굴의 생김새가 잘 묘사되어 있고 이마 위로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등 자연주의에 입각한 고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황제는 실제의 나이 든 모습이 아니라 항상 이상화된 모습이다. 신성한 통치자의 모습인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상은 그리스 조각가의 작품으로서 고전적인 그리스 조각상의 자세와 비례를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황제의 이미지에 맞게 묘사했다.

BC 13년에 건립되고 4년 뒤에 봉헌된 제단 아라 파키스(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는 그 화려한 장식으로 로마의 공공기념물 중 가장 훌륭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전과 같이 대리석을 그리스에서 수입하지 않고 이탈리아산 흰 대리석으로 만든 이 제단의 부조에는 당대의 역사·전설 등이 사람들과 꽃 모양의 장식으로 뒤섞여 있는데 후대의 어떤 작품도 이를 능가하지 못할 만큼 아름답다.

아라 파키스에는 평화, 평온, 허식없는 위엄, 중용, 겸손, 어린이에 대한 사랑, 자연에의 찬미 등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모든 이상이 총망라되어 있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대표작으로는 다키아족과의 2차례에 걸친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트라야누스 기념주가 있다. 이것은 1m 높이의 띠로 된 부조가 원주 전면을 나선형으로 휘감아 올라가면서 2차례의 전쟁에 얽힌 이야기를 설화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23층의 나선띠 속에 2,50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 부조대에서는 승리의 여신상이 두 전쟁사를 구분해주고 있을 뿐 거기에 따른 이야기들은 구별없이 서로 겹쳐지면서 연속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113년에 이 기념주가 세워졌을 당시 이것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원주 꼭대기에 트라야누스 황제의 상을 세우고 아래기단에 황제부처의 유골을 둔 황제의 묘로 바뀌었다. 이밖에 기념조각으로는 로마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베네벤토에 있는 트라야누스 개선문에 새겨진 부조가 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에도, 로마 광장에 있었던 2개의 수평석판이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원형부조판 8개 등 기념부조가 많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조각된 석관이다. 2세기 후반부터 장례관습이 화장에서 매장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석관 조각이 등장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 시대의 초상조각상 중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청동기마상과 콤모두스 황제의 대리석 흉상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조각상들은 높이 올려친 머리카락과 수염의 굴곡이 심하게 조각되어 있어 잔잔한 얼굴 표정과 대조를 이루면서 불안정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당시의 공공조각으로는 콤모두스 황제가 부친의 업적을 기려 만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원주가 있는데, 이 원주를 양식적인 면에서 이전의 트라야누스 기념주와 비교해보면 2세기 로마인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원주의 11개 직4각형 부조판에서 웅크리고 있는 작은 인물상들, 빽빽이 밀집된 군상들, 동요하는 몸짓, 온통 전쟁의 공포와 비극에 초점이 맞추어진 듯한 묘사 등은 당시 로마 제국이 미래에 대한 확실한 자신감이 없었으며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원주부조에서 보였던 빽빽한 군상 처리, 활기찬 움직임, 대기와 공간적 깊이의 묘사 같은 양식상의 새로운 변화들은 세베루스 시대에 와 더욱 확고해졌다.

3,4세기의 초상조각은 자연주의적인 양식과 도식화된 양식 사이에서 맴돌았다.

그러다가 초상조각은 건축구조와 같은 형태로 해야 한다는 개념이 자리잡았고, 그리스 로마의 자연주의적인 묘사는 신성하고 초월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양식으로 바뀌었다. 그 한 예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초상이다. 그후 이 양식은 비잔틴 및 중세 도상의 전형이 되었다. 3세기의 공공조각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고 로마 시대 마지막 조각물의 하나로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부조 정도를 들 수 있다. 이 부조에 나오는 황제와 궁정사람들은 이 시기의 초상조각과 마찬가지로 경직된 자세에 초월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과 서양조각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이 시작된 시기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 직후인 1세기 후반으로 규정할 것인가, 아니면 양식적으로 로마 미술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 2세기말에서 3세기초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그 범위를 확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쨌든 그리스도교 미술이 로마 미술의 테두리 안에서 성장한 것만은 사실이고 지역적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 나름대로 독창적인 예술양식을 보여주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의 중심지가 콘스탄티노플이었던 만큼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린 후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미술을 초기 비잔틴 미술로 규정하는 문제가 또 발생하므로 그리스도교 미술의 정의가 더욱 힘들어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교 미술이 형식면에서는 그리스 로마 미술을 모태로 했으며 내용면에서는 새로이 성서를 따랐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고대 미술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미술로 등장하면서 그전까지의 전통적인 요소들을 과감히 없애버렸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는 공공기념조각이 없고 소품과 소소한 기념물에만 국한되었다. 그리고 그후 그리스도교 조각은 점차 교회건축의 전체적 틀 속에 흡수되었다.

석관조각과 카타콤베 회화는 그 발전과정이 비슷하다. 처음에는 성서의 이야기들이 그리스 로마 미술의 구조 내에서 보였기 때문에 3세기 후반 그리스도교의 석관은 로마 석관과 거의 비슷하다. 4세기 들어서 석관조각의 도상은 매우 풍부해졌고 내용도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이라든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간 이야기 등이 긴 프리즈로 묘사되고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가 석관 앞면을 장식하면서 아주 서술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십자가상도 처음에는 죽은 그리스도의 몸 대신에, 죽음을 이긴 상징으로서 그리스도라는 문장에서 각각 첫 글자만 따서 만든 모노그램이 십자가 위에 왕관처럼 씌워져 있었다. 그러나 5, 6세기에는 십자가의 고난을 나타낼 때 점차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표현하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그리스도교 석관조각들은 3세기 전반에는 고전양식을 보였고, 그후 4세기에는 세속적이고 미숙한 수준에 머물렀으나 콘스탄티누스 이후 시대에 한결 다듬어졌다. 그래서 340~370년에 만들어진 것들이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형제〉(359, 크리스티아노 박물관)라고 불리는 유니우스 밧수스의 석관, 〈3명의 선한 목자들〉(바티칸 박물관)이라는 이름의 원주가 붙어 있는 석관, 로마의 산세바스티아노 교회에 있는 석관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비잔틴 시대의 조각

330년에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비잔티움의 자리에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했다. 그는 이미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했던 바 이 새로운 수도의 공식종교를 그리스도교로 할 것을 천명했다. 이로 인해 억압 속에서 싹트던 종교미술이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다.

비잔티움이라는 곳이 그리스의 옛 식민지였던 만큼 여기서 피어난 미술에서 그리스 양식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하기아소피아 대성당을 필두로 비잔틴 건축조각은 재현적인 테두리에서 벗어나 점차 추상적인 성격으로 양식화되어갔다. 비잔틴 초기에는 황제들의 초상조각도 있었고 하기아소피아 대성당 정면의 원주 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기마상도 세워져 있었다고 하나 이것은 그저 초상조각의 마지막 흔적일 뿐이었다. 이와 더불어 석관과 교회 벽면을 장식하던 부조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를 끝으로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하기아소피아 대성당의 주두와 코니스 장식 같은 기하학적 문양의 평부조 석판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 석판은 창문의 아래칸으로도 쓰였고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교회의 본체와 성소를 구분시키는 '이코노스타즈'라는 칸막이로 쓰였다.

이밖에 이 시기에는 유능한 조각가들에게 항상 후원이 뒤따랐기 때문에 공예적인 성격의 조각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 공예조각들은 중세 조각의 면모를 아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그중에서도 상아조각이 제일 중요하게 취급된다. 상아제품은 미사의 성찬식에 쓰이는 성작에서부터 라벤나의 대주교 막시미아누스의 옥좌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일반적으로는 1쌍으로 된 상아조각 패널이나 책표지 등에 많이 애용되었다.

의식용으로 쓰였던 황제의 상아조각 패널을 보면 한쪽이 5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황제의 초상, 그 양옆에는 집정관, 아래에는 공물을 나르는 사람들, 위에는 그리스도의 흉상을 들고 있는 천사들이 있다. 이러한 배열은 그리스도가 위에 있고 그리스도의 부섭정관으로서의 황제가 지배하는 세상이 그 밑에 있다는 당시 비잔틴 세계의 계급질서를 나타내고 있다. 그중 가장 세련된 것이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르베리니 상아조각판(루브르 박물관)이다. 이밖에 비잔틴 미술은 조지아, 아르메니아, 이집트의 곱트 지방 등지에서도 크게 융성했다.

중세 초기의 서양조각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리면서 문화의 주도권은 동쪽으로 넘어갔지만 옛 전통은 그대로 서쪽에 남아 있으면서 여러 침입자들의 문화와 융합되었다. 프랑크족의 메로빙거 예술은 6세기에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보석류와 그릇 등의 부장품을 남겼다.

568년 이탈리아를 침입한 롬바르드족은 그곳에서 게르만 문화를 퍼뜨렸으나 조각 분야에서는 지중해문화의 영향이 우세했고 부조장식에서는 비잔틴 요소가 섞이면서 재현적인 면보다는 추상적인 장식성이 더 강조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샤를마뉴 대제는 궁정학교를 개설하여 민족이동 이후 침체된 문화를 부흥시키고자 했다(768년에서 9세기 후반). 이때 고전적·비잔틴적 요소가 게르만족에 의해 동쪽으로부터 유입된 장식문양과 합쳐져 로마네스크 양식의 징후를 나타내는 문호가 형성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을 건설한 독일의 오토 왕조와 그 뒤를 이은 잘리에르 왕조 초기(950~1050)에는 카롤링거 왕조의 문화유산이 그대로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다. 카롤링거 왕조시대의 조각품은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오토 왕조시대에는 금은세공과 유사한 환조가 다시 부활했다. 이 시대의 특기할 만한 작품으로는 쾰른 대성당에 있는 목조 〈게로의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와 힐데스하임 대성당에 있는 청동부조 〈아담과 이브를 꾸짖는 하느님〉이 있다.

로마네스크 시대의 서양조각

1818년에 생겨난 로마네스크라는 용어는 당시 유럽에 널리 퍼진 로마의 건축 및 문화유산과 튜턴·스칸디나비아·비잔틴·이슬람교 등 여러 지방의 영향이 중세식으로 종합되어 나온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전 유럽 대륙에 산재해 있었던 중세의 수도원들은 문화의 실제적 중심지로 이 시기 문화부흥의 견인차 역할을 했고 후원자로서 존재했다.

11세기에는 많은 교회들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고 로마네스크 조각은 교회 현관의 팀파눔을 통해 프랑스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무아삭 교회의 팀파눔 조각(594쪽 사진 15)에서는 24명의 장로들과 함께 있는 〈요한의 묵시록〉의 그리스도를 묘사했는데, 여기서는 자연물체들이 현세성을 초월한 듯이 보인다. 그리고 모든 형태들은 물리적인 공간임을 거부하는 평면상에 놓여져 있으며 그리스도상을 중심으로 한 24명의 인물들은 너무나 작아 마치 나무에 잎들이 붙어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고딕 시대의 서양조각

'고딕'이라는 용어는 중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고딕 양식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의해 이미 밀려난 다음인 16세기에 역사가들에 의해 조롱조로 붙여진 말이다.

이 말은 고트족이 고전적인 로마 미술을 파괴하고 야만적인 미술을 전개했다 하여 붙여진 말이다. 로마네스크 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딕 시대의 우수한 조각가들은 주로 건축의 장식조각을 맡았다. 교회현관이 바로 이러한 조각들이 집결되어 있는 곳으로 상인방 위의 반원형 공간인 팀파눔, 팀파눔을 아치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작은 조각상들, 문설주 조각 등이 있다.

로마네스크 조각과 비교해보면 이 시기의 조각들은 점차 사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식상의 변화가 나타난 첫번째 예로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문설주 조각인데 여기서 그리스도와 사도상(1140~50)들은 사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하고는 있으나 아직도 기둥처럼 건축구조에 종속되어 있다. 2번째 양식의 변화는, 뫼즈 지방에서 베르됭의 니콜라라는 장인이 인물상을 곡선으로 휘게 하고 옷주름이 몸을 둥글게 휘감고 있는 모습으로 처리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사실주의를 추구한 데서 발견할 수 있다.

독일어의 '물덴스틸'이라는 용어는 바로 이런 종류의 옷주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후 랭스 대성당의 문설주 조각 〈방문〉에서는 물덴스틸의 소용돌이치는 옷주름 대신 V자형으로 무겁게 드리워진 옷주름양식이 나타났는데 이는 양식상의 또다른 변화로 그후 15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이 고딕 양식은 각기 독특한 지역적 특성을 보이면서 영국·독일을 비롯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전성기 고딕에 와서는 건축조각이 점차 쇠퇴하고 묘소나 기념물과 같은 사적인 조각들이 많이 나왔다. 프랑스의 생드니 수도원 교회에 남아 있는 루이 9세 때의 묘들, 그리고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있는 다양한 재료의 많은 묘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탈리아에서는 1250~1350년에 조형예술이 급격한 발전을 보였다.

이 시기의 중요한 조각가는 니콜라 피사노와 그의 아들 조반니 피사노로, 이들은 토스카나 지방에서 활동하면서 교회의 설교단을 많이 만들었다. 피사 세례당과 시에나 대성당에 설교단을 남긴 니콜라는 고전양식을 보여주었는데 그가 이런 양식을 추구한 것은 사실적인 묘사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조반니 피사노가 만든 산안드레아피스토이아 교회의 설교단은 기술면에서는 세련되지 못하지만 매우 극적인 감정표현을 보여준다.

니콜라 피사노의 공방은 그 명성이 이탈리아 전역에 퍼지면서 많은 작품을 제작했음은 물론, 아르놀포 디 캄비오와 티노 디 카마이노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도 배출했다.

국제 고딕 시기의 예술품들은 대부분이 유실되었으므로 그때의 예술적 상황을 짐작하기가 매우 어렵다. 14세기 후반의 대표적 인물로는 프랑스 궁정조각가인 앙드레 본뵈를 들 수 있으며, 1390~1406년에 왕성한 활동을 한 클라우스 슬뤼테르는 사실성이 짙은 작품으로 당대 조각양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국제 고딕 양식은 이탈리아에서의 예술의 발전, 특히 도나텔로의 초기 작품에서와 같이 고전사상을 조각에 도입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후기 고딕 양식은 건축과 회화 분야에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지만 그 조각품들은 파괴된 것이 많아 조각 발전의 흐름을 추적하기가 어렵다. 다만 이 시기의 조각들이 표현에 있어 절제된 양상을 보이지 않고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실적인 세부묘사와 장식적인 기교가 지나쳐, 전체적으로 볼 때 군더더기가 너무 많이 붙은 것 같은 복잡한 인상을 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를 위해 15년간이나 일한 슬뤼테르가 제작한 필리프 공의 묘로서, 이 묘의 양식은 그후 유럽 전역에 퍼졌다. 사실적인 세부묘사와 풍요로운 장식의 결합에 한계를 느낀 1400년경의 예술가들은 고대의 고전예술에서 그 대안을 찾았다. 그들은 고전의 '정확성'(rightness)에 매료되어 그전까지의 고딕 형태를 야만적이라 규정해버렸던 것이다. 모든 찬사는 고전예술로 돌아갔고 모든 비난은 고딕 예술에 퍼부어졌다.

그러나 후기 고딕에서 르네상스로의 이행은 상징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넘어가는 것 같은 급격한 변동이 아니라 한 종류의 사실주의에서 다른 종류의 사실주의로 넘어가는 정도의 변화였다(→ 고딕예술).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조각

15세기에 이탈리아에서는 고전에 관한 연구가 부활되면서 예술에서도 고전적인 이상이 꽃을 피웠다(고전주의). 로마네스크나 고딕 시대에도 고전적인 전통이 미미하게 이어지면서 아칸투스 잎이라든가 옷주름의 처리 같은 고전적인 형태가 종종 보이나 그것은 주로 로마 시대의 미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13세기 중엽에 활동한 니콜라 피사노는 로마 시대의 작품에 관심을 돌린 최초의 조각가였다. 피렌체에서는 르네상스 양식이 조각 부문에서 처음 나타났다. 르네상스의 시작을 피렌체 대성당 세례당의 청동문 디자인에 대한 경합이 있었던 1401년으로 보기도 하고, 도나텔로와 난니 디 방코에게 대성당 정면에 놓을 4명의 성인좌상 주문이 들어온 1408년으로 보기도 한다. 도나텔로는 친구인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와 화가 마사초와 더불어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들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피렌체 대성당과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조각장식을 맡아하면서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외부벽감에 있는 〈성 조지〉 상은 조각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이 상은 휴식과 행동 사이의 정지상태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도나텔로는 〈성 조지〉상 아래의 부조에서 평부조임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회화적 깊이를 느끼게 하는 새로운 종류의 부조기법을 창안해냈다.

그와 동시대인으로서 짧은 생애를 살았던 난니 디 방코는 1411~13년에 제작한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4인의 성자〉를 공간적인 유대관계 속에서 말없는 대화가 오가는 군상으로 처리해 조각이 당면했던 가장 어려운 문제를 풀어주었다.

세례당의 청동문 경합에서 이긴 로렌초 기베르티는 1403년 청동문 제작에 착수하여 1424년에 완성했다. 〈천국의 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기베르티의 2번째 청동문은 4각형의 틀로 된 10개의 부조로 되어 있다. 이 부조들은 바닥면이 전과 같이 그저 바탕으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감을 주어 하늘과 같은 느낌도 나게 하며 인물들도 원근법으로 묘사된 건물과 풍경 속에 배치되어 깊이가 느껴지면서 회화적인 느낌을 강하게 준다.

15세기 시에나의 중요한 작가인 자코포 델라 퀘르치아는 볼로냐의 산페트로니오 교회의 정문부조에서 그 활기있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묘사로 젊은 미켈란젤로를 매료시켰다. 도나텔로는 15세기 후반 피렌체에서 고대 이래 처음으로 벽에서 완전히 독립된 나체조상의 청동상 〈다비드〉를 제작했고, 파도바에서 산안토니오 교회 앞에 서 있는 〈가타멜라타〉 기마상을 만들었는데 이 두 상은 모두 고대의 정신을 아주 강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도나텔로는 〈가타멜라타〉 이후 피렌체로 돌아와서 목조상 〈막달라 마리아〉를 제작했는데 특별히 정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형태를 왜곡시켜 표현했다.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는 회화와 마찬가지로 조각에서도 근육적 동태와 선적인 움직임에 주력하면서 운동감이 풍부한 인체를 묘사하고자 했다.

그의 소형 청동작품 〈헤라클레스와 안타이오스〉는 격렬하게 싸우는 신화의 두 인물을 묘사한 것이다. 폴라이우올로와는 반대로 데시데리오 다 세티냐뇨는 여인들과 아이들의 초상을 많이 제작했다. 그가 제작한 산로렌초 교회의 '성체 감실'의 조각은 윤곽선을 강조한 편안하고 부드러운 인물묘사로 피렌체 조각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는 특히 운동감에 치중했으며 베네치아에 있는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마상과 분수조각인 〈돌고래를 안은 푸토 Putto with Dolphin〉등을 제작했는데 후자에서는 돌고래의 입에서 힘차게 물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으로 운동감 표현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15세기에 태어나 예술가로서 성장했지만 16세기의 성기 르네상스 및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피렌체의 조각가인 베르톨도 디 조반니로부터 배우면서 도나텔로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메디치가와 가까이 지내면서 고전예술에 관한 지식을 키웠다. 그가 21세에 조각한 〈바코스〉는 고대정신을 완벽하게 나타낸 조각이다. 미켈란젤로가 1501년 피렌체에서 만든 〈다비드〉는 원래 대성당의 높은 부벽 위에 놓이도록 계획된 것이었으나 완성 후에는 시의 원로들이 공화국 정부가 있는 베키오 궁 앞에 세우도록 했다.

〈다비드〉가 피렌체를 상징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5.49m의 높이, 커다란 손과 발, 소년의 몸과 청년의 얼굴을 한 젊은이로 묘사된 〈다비드〉는 잠재된 힘을 가진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체 부분들의 균형, 전체적인 조화로 인해 이 작품은 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힌다(→ 다비드상).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자신의 묘를 부탁해 왔기 때문에 로마에 갔다.

그러나 교황의 재정적인 어려움과 교황청의 반대로 인해 정작 그 일은 하지 못하고 시스티나 예배당의 장식을 맡게 되었다. 그후 1513년 율리우스 2세가 죽자 후계자들이 묘를 좀 작게 하되 빨리 완성시켜달라고 독촉을 해왔다. 1545년 원래의 계획보다 대폭 축소된 묘가 산피에트로인빈콜리 교회에 설치되었다. 이 묘에 쓰려고 만든 조각상들은 여기저기 흩어졌고 〈모세〉상만이 원래 설계된 자리에 세워졌을 뿐이다.

이 묘를 위해 만든 〈죽어가는 노예〉·〈반항하는 노예〉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난 후 맡게 된 〈메디치가의 묘〉에서 그는 건축적인 구성으로 작품에 떨어지는 빛도 조절했으며 관람자가 이것을 보게 될 위치도 고려했다. 이 묘의 왼쪽에는 줄리아노 메디치의 묘, 오른쪽에는 로렌초 메디치의 묘가 있으며 그 밑에는 우의적인 조각상 〈밤〉·〈낮〉·〈새벽〉·〈저녁〉이 비스듬히 누워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론다니니 피에타〉(→ 미켈란젤로)는 조각에 대한 그의 심오한 생각을 잘 나타내주는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마음을 바꾸어 상의 넓은 부분을 대폭 깎아냈기 때문에 밋밋한 형태의 조각이 나왔던 것이다. 그는 죽기 10일 전까지도 이 작품에 매달렸으나 작품은 미완성인 채로 남았다.

벤베누토 첼리니는 자서전을 집필해 자신의 생애를 상세하게 알려준 예술가로 유명하다. 그의 청동작품 〈페르세우스〉에서는 페르세우스가 헤르메스의 날개달린 신발을 신고 있어 날아가는데, 일종의 경쾌함이 느껴지며 팔을 뻗어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음으로써 가운데가 비어 있는 열린 공간이 형성되고 있다.

이 조각의 전체적인 구성에서 빈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조각된 부분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이런 식의 구성은 청동으로나 가능하지 대리석으로는 생각해볼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또한 사방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새로운 시도라 하겠다. 16세기말에 이르러 피렌체에서는 잠볼로냐와 그의 조수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잠볼로냐는 미켈란젤로가 사용했던 위로 감아올라가는 구성을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잘 이해했던 조각가로 그의 대표작 〈사비니 여인들의 약탈 Rape of the Sabines〉은 세 사람이 뒤엉켜 위로 올라가는 형상으로 바로크 미술을 예시했다고 볼 수 있다.

바로크 시대의 서양조각

바로크의 예술가들은 회화·조각·건축 사이의 구분을 없애고 그 모두를 합쳐 극적인 회화세계를 창조했다.

17, 18세기의 위대한 조각가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는 초기작 〈아폴론과 다프네〉를 통해서 열린 형태, 3차원적 표현을 통한 회화적인 효과로 향후 200년을 지배할 혁신적인 조각의 원리를 수립했다. 그리고 성베드로 대성당의 〈성 롱기누스〉상에서는 실제 몸의 움직임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기적으로 인해 옷이 심하게 흐트러진 모양을 묘사하여 바로크 조각의 특징적인 양식을 잡아놓았다.

순간적인 마음상태를 극적으로 포착해서 묘사한 로마의 산타마리아델라비토리아 교회 코르나로 예배당에 있는 〈성녀 테레사의 법열〉도 건축·회화·조각을 통합하여 연극무대와 같은 복합적인 환상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데 성공한 대표적인 예이다(→ 조각).

17세기 후반에 들어 회화에서는 구성이 점차 장식적으로 되어가고 형태도 유연해졌는데 이런 양상은 조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에서의 로코코 양식을 예견하게 하는 필리포 카르카니의 조각들, 제노바·베네치아·나폴리 등지에 있는 필리포 파로디의 조각들이 그런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아고스티노 코르나키니와 피에트로 브라치는 훨씬 가볍고 극적인 작품을 표현했는데 그들이 트레비 분수에 조각한 우의적 작품 〈대양 Ocean〉은 베르니니의 조각을 익살맞게 흉내낸 작품이다.

18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조각은 기교적 발전을 통해 점점 더 회화적인 경향으로 흘러갔다.

17, 18세기의 스페인 조각은 회화 이상으로 후기 고딕 양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반종교개혁은 조각에서 사실주의를 요구했고 신앙심을 고무시킨다는 목적하에 조각에 유리로 된 눈을 붙이고 가발을 씌우며, 진짜 천으로 된 옷을 입히는 경우도 있었다.

스페인의 바로크 조각은 전적으로 종교적이면서 대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레고리오 에르난데스의 〈피에타〉와 같은 조각은 바로크적이라기보다는 고딕의 감동적인 사실주의에 더 가깝다. 후안 마르티네스 몬타네스는 활동이 많았던 조각가로 그의 작품은 사실성과 깊은 정신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17세기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통치하에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부상했다.

이 시기의 프랑스 미술은 이탈리아 바로크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고전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그 자체의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어 고전주의적 바로크, 혹은 바로크적 고전주의라고 불린다. 루이 14세의 궁정조각가인 지라르동이 제작한 〈리슐리외 추기경의 묘〉는 공간활용이 많고 회화성이 짙은 바로크적 요소와 보수적인 고전주의 요소가 잘 결합되어 있어 당시 프랑스의 바로크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적절한 예라 하겠다.

루이 14세의 재상, 특히 콜베르에 의해 세워진 미술 아카데미가 요구하는 틀에 박힌 양식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던 피에르 퓌제는 〈크로토나의 밀로〉에서 고뇌에 찬 표현으로 강한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루이 14세의 또다른 조각가 쿠아즈보는 공식적인 아카데미 바로크 양식으로 출발했으나 나중에는 18세기 취향의 대두와 함께 가볍고 경쾌하며 장식적인 양식으로 흘렀다.

바로크 양식을 정교하게 세련화시킨 18세기 로코코 양식은 귀족적인 살롱 예술이었다. 18세기가 흘러감에 따라 프랑스 조각에서 고전적인 성격의 중요성은 더 크게 부각되었다. 에티엔 모리스 팔코네의 대리석 조각 〈목욕하는 사람〉에서의 정교한 형태와 끊어짐 없이 계속 이어지는 윤곽선은 고전적인 전통을 로코코 취향에 맞춘 것이다. 장 앙투안 우동은 〈디아나〉에서 로코코 양식의 유희적인 분위기를 멀리하면서 고전주의를 더욱 정화시켰다.

그의 초상조각은 베르니니의 전통을 18세기의 취향에 따라 세련화시킨 것이다.

이당시 중부 유럽에서는 신·구교도 간의 30년 전쟁이 막을 내리고 그 폐허 속에서 회화와 조각이 서서히 부활하기 시작했다. 트리에르에 있는 라우쉬밀러의 조각에서는 베르니니의 영향이 보이지만 오스트리아의 작가들간에는 고전주의가 더 강하게 작용했다.

바이에른 지방의 바로크 양식은 에기트 퀴린 아삼과 코스마스 다미안 아삼 형제가 주도했는데 그들은 로르 수도원 교회의 중앙제단에서 베르니니의 무대적인 환상주의를 더 발전시켰다. 베를린은 브란덴부르크 대선제후의 치세 아래 정치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샤를로텐부르크에 있는 대선제후의 기마상은 만개된 안드레아스 슐뤼터의 바로크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는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을 연대적으로나 양식적으로 확실하게 구분지을 수가 없다.

18세기 남부 독일의 최고 조각가였던 이그나츠 귄터는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우아함과 세련미, 후기 고딕 조각의 사실성을 결합시켜 독특한 양식의 조각을 만들었다. 슈바벤 지방에서는 조각가와 치장벽토 예술가 간의 협력관계가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신고전주의 시대의 서양조각

신고전주의라 알려진 18세기의 조각운동은 바로크 양식의 말기 현상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며 고전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태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대의 지중해세계에 대한 고고학적인 탐사로 새로이 발견된 고전적인 예술형식과 주제들은 당시의 계몽사상과 호흡이 맞춰지면서 미술에서는 재빨리 새로운 표현을 추구하게 되었다.

신고전주의 조각은 부조에서 대기원근법이나 선원근법을 나타낸다든지 환조에서 휘날리는 머리카락이나 옷자락을 묘사한다든지 하는 회화적인 효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명확한 윤곽선, 평평한 바닥면에 역점을 두었다. 이들은 주로 고전사상과 로마 미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17세기의 프랑스 및 이탈리아 아카데미의 이론가들은 과거의 시대와 장소를 표현할 때 의상·세부·배경 등이 정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적성론'(decorum)을 물려받은 18세기 미술가, 특히 신고전주의자들은 새롭게 얻어진 고고학적인 지식에 힘입어 그 이론을 충실히 지켰다. 그러나 영웅이나 유명인물의 초상에서는 고대 옷을 입힐지 당시의 옷을 입힐 것인가의 문제가 생겨났다.

조각가들은 제복을 입히기도 했고 나체상으로 그냥 두기도 했다. 거의 벗은 상태로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인상을 묘사한 이탈리아 조각가 카노바의 〈비너스 빅트릭스의 모습을 한 파올리나 보르게세 Paolina Borghese as Venus Victrix〉는 그당시 여인의 초상과 이상화된 고대의 비너스를 결합시켜 놓은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조각이다.

신고전주의자들은 바로크 미술의 과장성과 광기는 야만적이고 거친 미술을 낳는다고 하면서 배척했고 로코코 양식은 경박스럽다고 경멸했지만 그 뿌리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빙켈만이 고대미술을 모방하라고 한 것은 거기에 나타난 이상미와 그 정신을 모방하라는 것이었지, 고대작품을 보이는 대로 모사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어떤 미술가들은 빙켈만의 주장을 잘못 이해하여 정신성과 생명력이 없는 미술품을 양산해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신고전주의 미술가들은 동작과 감정표현을 극도로 억제시켰고 고전적인 평온함을 추구했다.

프랑스에서는 회화와 건축 분야에서 신고전주의가 맹위를 떨쳤으나 조각 분야에서는 그리 괄목할 만한 신고전주의 조각가가 나오지 않았다. 님프와 같은 소형의 고전상을 많이 만든 클로디옹, 고전상과 고대 흉상을 본떠 당대인의 초상을 많이 제작한 장 앙투안 우동이 유명한 조각가로 꼽힐 정도이다. 신고전주의의 흐름에서 18세기말까지 유럽 미술을 대표한 미술가는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카노바였다.

18세기말에 그가 차지했던 위치는 17세기에 베르니니가 누렸던 것과 비견된다. 베르니니는 군주를 비롯한 수집가들을 위한 조각을 초기에만 제작했지만 카노바는 거의 전생애에 걸쳐 그런 작품을 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생애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다. 베르니니가 교황의 통제하에서 외국의 유력자들을 위해서는 작품제작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반면, 카노바는 후원자가 주로 외국인이었고 유럽의 모든 궁정에 작품을 공급했다. 엄격하기도 하고 감상적이기도 하며 때로는 격렬하기도 한 다양한 양식을 펼쳐보인 조각가였던 카노바는 고전적 구상과 프리즈, 묘, 초상 등 폭넓은 작품을 제작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서양조각

19세기에도 여전히 궁정이나 귀족의 후원자들의 입김이 예술가의 명성을 좌지우지했지만 아카데미가 연례적으로 개최하는 살롱전은 그 공적인 성격으로 인해 예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살롱 전에서 상을 받은 작품들은 대개 그리스·로마 신화나 역사에서 주제를 따온 누드 상으로서 서술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작품들은 주제를 당대의 사건이나 문학작품에서 따온 것들이 많았다.

아카데미는 교육과정에서 영웅적 성격의 절제된 신고전주의를 가르쳤으나 반대로 전람회를 위해서 새로운 것, 감정적인 것, 선풍적인 것에 관심을 모았다. 전시할 때는 석고모형 작품을 전시했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주문자의 요구대로 대리석이나 청동상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미술관에 소장되기도 했고 수집가들 집의 정원이나 멋있는 응접실에 놓여지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작품을 작게 축소시키는 기계가 개발되고 경비도 절감시키는 기술이 고안되어 실내장식용 조각이 범람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의 개발은 조각의 질뿐만 아니라 건축·가구·금속세공품 장식의 질도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세기에 가장 저조했던 분야는 교회나 공공건물의 대형부조 같은 기념조각이다. 이런 종류의 일은 개인의 자주성에 치중하는 당시의 낭만적인 분위기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장이나 공공장소에 세워지는 초상조각은 공공조각이면서도 이당시에 많이 세워졌다. 왕족 이외의 인물을 기념하는 이런 종류의 초상조각이 세워진 것은 고대 이래 처음으로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리버풀과 버밍엄에 세워진 넬슨 제독의 상이 그것이다.

19세기말에는 박애주의자, 기업가, 이름없는 장군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초상조각이 제작 되었다.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공공조각으로는 카를로 마로체티의 〈엠마누엘레 필리베르트 공작〉(1833, 토리노), 크리스티안 다니엘 라우흐의 〈프리드리히 대왕〉(1836~51, 베를린)과 프랑스의 잔 다르크상 몇 점이 있다.

이것들은 마테오 알론소가 제작하여 1902년 칠레와 아르헨티나 사이의 국경에 세워진 거대한 〈안데스 산맥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시사적이고 정치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 뉴욕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은 그 커다란 규모로 대중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현대의 서양조각

19세기말

근대미술은 주제와 양식면에서 아카데미의 전통을 거부한 데서 시작되었다.

1860년대 후반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인상주의 회화운동은 색채와 붓질, 그리고 형태가 갖는 내재적인 성질을 탐구했다. 인상파의 확장된 시각개념은 조각에도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프랑스 조각가인 오귀스트 로댕은 실물 모델링의 새로운 기초를 찾아냈고 양식적인 통합을 꾀했다. 도미에로부터 대담한 표현의 모델링을 배운 로댕은 작품의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마무리되어가는 상태를 보여주는 듯한 조각을 했다.

나중에 가서 로댕은 부서진 토르소와 같이 인체의 한 부분을 조각하기도 하여 인물상 조각의 범위를 최대한으로 넓혀갔다. 그때까지의 조각은 속이 채워진 덩어리와 빈 부분 간의 상호작용에만 의존했으나 로댕에 와서는 주변공간까지도 작품 속에 융합되었다. 〈아담〉(1880)·〈이브〉(1881), 그리고 현대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미완성작 〈지옥문〉 등이 이와 같은 새로운 방법을 발전시킨 대표작들이다.

로댕의 많은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에밀 앙투안 부르델과 샤를 데스피오였다. 1907~14년에 로댕 공방의 책임자였던 데스피오는 고전주의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작품을 만들었다.

아방가르드

1910년대에는 르네상스로부터 로댕까지 이어져온 인체묘사의 전통이 사라지고 입체파·브랑쿠시·구성주의자들이 크게 부상했다.

그중 입체파는 관찰이 아닌 상상에서 나온 형태와 관계들로 이루어진 구성으로 두드러진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혁명적인 조각의 최초의 예는 피카소의 〈여인 두상〉(1909)이다. 피카소는 전통적인 조각 방법이나 인체에 대한 그의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대상을 철저히 개념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두상이 해부학적 묘사와는 관계없이 각이 진 면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강한 인상을 준다. 마티스의 두상 조각 〈자네트〉(1910~11)도 비례를 주관적으로 조정하여 얼굴 부분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브랑쿠시도 설명적인 형태를 버리고 본질적인 형태의 핵심만 집약시켜 표현했다. 그의 작품 〈입맞춤〉(1908)은 2개의 덩어리 같은 모양의 남녀가 포옹을 하고 있는 조각으로 원시미술의 응집된 표현력을 갖고 있다.

그의 청동작품 〈공간의 새〉는 그 추상적 형태를 본 미국 세관이 미술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면세혜택을 받지 못하게 한 사건으로 인해 더 유명해진 작품이다. 레이몽 뒤샹 비용의 〈말〉은 실제 말의 모습이 전혀 아닌 휘감겨진 애매한 기계 형태로 기관차축의 마력을 형상화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기계화된 현대생활을 암시한 것이다.

뒤샹 비용은 기계의 힘과 에너지를 사랑한 이탈리아 미래파 운동의 중심인물인 움베르토 보초니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보초니의 〈공간에서 연속성의 특이한 형태 Unique Forms of Continuity in Space〉는 운동감을 형상화한 것으로 조각가는 주변 공간과의 연관성 속에서 대상을 파악함으로써만 실재의 동적인 힘을 나타낼 수 있다는 그의 이론을 작품화한 것이다.

자크 립시츠는 1913년에 곡선과 각진 면으로 된 실험적인 성격의 소형 청동상을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입체파식의 인체구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체는 마치 기하학적인 틀 속에 갇혀 있는 듯하다. 〈기타를 든 남자〉·〈서 있는 사람〉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구성주의와 다다이즘

1912~14년에는 아카데미의 가식적인 진지함과 공허한 도덕적 이상을 공격하는 구성주의라는 반조각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13년에 블라디미르 타틀린이 제작한 부조에서 시작되었다. 구성주의자들은 대리석이나 청동보다 플라스틱·유리·철·강철 등 공업적으로 생산된 재료들을 선호했다. 그들의 조각은 깎고 만들고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비틀고 자르고 용접하는, 즉 글자 그대로 구성하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구성주의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구성주의자들은 이전까지의 조각과 달리 덩어리를 조형요소로 인정하지 않았고 공간 표현으로서 입체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기하학과 역학의 원리를 이용했다. 미래주의자들은 기계의 힘에서 미적인 요소를 느꼈으나 구성주의자들은 기계 자체에서 미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미는 우아함·경쾌함·복잡성의 속성을 지녔고 궁극적으로 정확성과 계산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이다. 구성주의자들은 완전히 순수한 실재를 표현하기 위해 감정적인 요소는 물론 문학적인 연상을 일으키는 어떠한 요소도 철저히 배제했다.

나움 가보의 작품이 종종 수학의 도형과 비슷하고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작품이 건축모형과 같은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다다이즘은 구성주의의 형상 파괴적 열기를 같이 공유하면서도 그들이 표방하는 합리성에 대해서는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연상작용에 따른 우연적·임의적·충동적인 것을 신봉했다. 입체파 콜라주에서 나온 다다이즘의 아상블라주는 그 말이 시사하듯이 작업실에 널려 있는 나무·판지·못·철사·종이 등의 재료들을 '조합'한 것이다.

쿠르트 슈비터스의 〈폐기물 구성 Rubbish Construction〉(1921), 마르셀 뒤샹의 〈교란된 균형 Disturbed Balance〉(1918)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보수적 반동

1920년대에는 사회 전체가 큰 변화를 겪었던 만큼 미술세계도 큰 변동이 있었다.

전쟁 이후 사람들은 안정·지속성·질서를 추구했기 때문에 반란적 성격의 예술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급격히 자신의 예술 방향을 선회하기에 이르렀다. 립시츠는 〈게르트루드 스타인〉과 같은 초상조각에서 볼륨과 얼굴의 특징적인 생김새를 회복했고 제이콥 엡스타인도 사실적이고 정교한 묘사로 초상을 조각했다. 이 시기에 아리스티드 마욜은 약간 둔탁한 느낌의 표면처리로 편안한 자세의 여인상을 계속 제작해나갔다.

환상조각(1920~45)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의 초현실주의적이거나 환상적인 조각의 한 흐름은 일상에서 취한 물체인 오브제로 된 작품이다.

다다이스트처럼 이 부류의 예술가들도 일상적인 사물들을 낯선 곳에 갖다놓아 결합시킴으로써 생기게 되는 우연적 효과를 노렸다. 시인 로트레아몽이 자신의 시에서 '해부대 위에서의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을 이야기했듯이 이 놀랄 만한 우연의 만남이 다름아닌 그들이 지향하는 미의 세계였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흐름인 알베르토 자코메티, 장 아르프, 립시츠, 헨리 무어, 바바라 헵워스, 피카소, 곤잘레스, 알렉산더 칼더 등의 조각은 아주 중요하게 평가된다.

이들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자들과 가끔 일치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시각·환각·꿈·기억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환상조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자코메티의 〈오전 4시의 궁전〉은 공적인 외부세계의 언어가 아니라 신비스러운 개인적 언어로 표현되는 예술가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무어가 심취한 원시적인 고대의 의식, 칼더 작품에서의 어린애 장난감 같은 뜻밖의 놀랄 만한 요소, 아르프와 자코메티가 몰두한 비합리성에 대한 표현으로 인해 조각은 경이롭고 불가사의한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이후에는 전통적인 재료를 이용한 조각도 계속되었지만 금속을 용접 혹은 절단하여 철재 자체로 직접 구성한 철조각이 크게 유행했다.

곤잘레스와 피카소는 이미 이런 철조의 기술적·표현적 가능성을 실험해 본 바 있다. 철은 유연하고 영구적이며 작업하기가 쉽고, 주조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어 다양하게 쓰였다. 이 시기에 나타난 또 하나의 두드러진 현상은 이탈리아·프랑스·미국 등지에서 부조가 부활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부조는 건물벽에 붙은 부조가 아니라 독립적인 형태의 대형부조를 말하는 것이다.

한 예로 미국의 루이스 네벨슨은 신중하게 배열된 오브제들로 가득 채운 상자를 이용하여 대형의 목재벽을 만들고 그 위에 똑같은 색을 고르게 칠한 대형부조를 제작했다. 유럽의 두드러진 작품으로는 알베르토 부리, 포모도로 형제, 세자르, 마누엘 리베라 등의 철제 부조를 손꼽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철조가 발전함에 따라 자연계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리폴드는 우주의 질서정연함과 완전성을 〈태양〉(1953~56)과 같은 작품을 통해, 랏소는 천문학적 현상에 대한 관심을 〈마젤란의 구름〉(1953)과 같은 철제 구조물을 통해 나타냈다. 이사무 노구치가 〈밤의 세계〉에서 조각을 통해 순수한 풍경을 보여준 데 이어 데이비드 스미스는 〈허드슨 강 풍경〉(1951)을, 루이스 부르주아는 〈밤의 정원〉(1953)을, 레오 아미노는 〈정글〉(1950)이라는 작품을 통해 이러한 시각을 표현했다.

1960년대 미국의 많은 조각가들은 자연세계를 주제가 아닌 일종의 매체로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했다. 로버트 스미슨과 같은 작가는 자연 그 자체의 지형을 변경하는 작업을 했고 크리스토는 오브제건 자연물이건 닥치는 대로 '포장'하려고 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이런 부류의 조각은 환경을 그 구성요소로 하기 때문에 환경조각이라 한다.

형상조각이 대상 그대로의 모방에서 벗어나자 인물상 형태에도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에트루리아의 우상을 연상케 하는 자코메티의 깡마르고 긴 인물상은 두텁게 살붙임을 한 매끄러운 표면의 둥근 인체에 대한 그의 반감을 보여준다. 영국의 조각가 케네스 아미티지와 린 채드윅은 옷이 차지하는 범위를 넓혀 전체적인 동작의 한 부분으로 처리했다. 그 예로 아미티지의 작품 〈산책하는 가족〉(1953)에서는 인물들이 빨래줄에 널려 있는 옷이 바람에 휘감겨 있는 모양으로 나와 있다.

팝아트에서 출발한 미국의 조지 시걸은 실제로 인체 위에 석고를 떠서 아무런 특징이 없는 하얀 석고 그대로를 가구 및 소도구들이 비치된 일상적인 공간에 배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몇몇 조각가들은 초기 지중해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헨리 무어는 그리스 아케익 조각에 심취하여 〈기대어 누운 인물〉·〈왕과 왕비〉 등을 제작했고, 아르프는 〈우상〉(1950)을 제작했다.

우상이나 토템을 다시 만들어내는 작업은 현대인의 합리적인 사고로는 생각할 수 없는 고대의 신화, 신비, 마술적인 분위기를 예술세계에 부여했다. 립시츠·랏소·퍼버와 같은 작가들은 근대미술에 종교적 소재가 적합하지 않다는 통념을 뒤엎었다. 랏소의 〈불기둥〉은 불꽃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착각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조각이다.→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