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리니

첼리니

다른 표기 언어 Benvenuto Cellini
요약 테이블
출생 1500. 11. 1, 피렌체
사망 1571. 2. 13, 피렌체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예술가. 매우 뛰어난 마니에리스모 미술가이며 자신과 당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자서전으로 가장 주목받는 르네상스기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첼리니의 명성이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것은 미술가로서의 그의 작품보다는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자서전에 힘입은 바가 더 크다. 1728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판된 첼리니의 자서전은 영어(1771)·독일어(1796)·프랑스어(1822)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당시 낭만주의 운동의 여파로 즉시 널리 보급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매우 뛰어난 마니에리스모 미술가이며 자신과 당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자서전으로 가장 주목받는 르네상스기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를 음악가로 키우려던 아버지의 계획을 거부하고 피렌체의 금세공인인 안드레아 디 산드로 마르코네의 공방에서 금속세공 도제가 되었다.

1516년 소란을 일으켜 시에나로 추방되었다가 1517∼19년 피렌체로 돌아왔으며 그뒤 로마로 옮겼다. 1523년 피렌체에서 싸움을 일으켜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다시 로마로 달아나서 그곳에서 살라망카 주교와 시지스몬도 키지,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위해 일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527년 로마 방어전투에 참가하여, 오랑주 공과 부르봉 왕가의 고관을 사살했다고 한다.

로마가 함락된 뒤 피렌체로 돌아갔으며, 1528년 만토바에서 곤차가 추기경의 도장을 만들었다(만토바 감독교회의 사료보관소). 1529년 로마로 되돌아가 교황청 주조소의 '마에스트로 델 스탐페'로 임명되었으며, 1530∼31년 클레멘스 7세의 제의에 달 유명한 쇠단추를 만들었다. 귀금속으로 만든 그의 다른 많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녹아없어졌지만, 그 도안은 18세기에 본떠 그린 3점의 드로잉(런던 영국박물관)으로 남아 전해진다.

그가 클레멘스 7세를 위해 만든 많은 작품들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534년에 만든 2개의 메달(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뿐이다.

첼리니는 경쟁자인 다른 금세공인을 죽였지만 교황 파울루스 3세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해 공증인에게 부상을 입히고 로마에서 피렌체로 달아나 거기에서 알레산드로 데이 메디치를 위해 많은 주화(파리 국립도서관 메달 진열실)를 만들었다. 로마에서 1년을 더 보낸 뒤 한동안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를 방문하여 프랑수아 1세의 초상 메달(1538, 피렌체 바르젤로)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여행에서 그가 남긴 유일한 작품이다.

1537년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횡령죄로 고발되어 감옥에 갇혔다. 탈옥을 시도하다 잡혀 다시 감옥에 갇혔지만 결국 1539년 페라라의 에스테 추기경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으며, 그 대가로 그를 위해 도장을 만들어주었다(1540경, 원품은 분실되고 납에 찍힌 도장 자국이 리옹에 있음). 1540년 다시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미완성 상태의 소금그릇을 가지고 프랑스의 퐁텐블로로 가서 왕을 위해 금으로 완성했다.

이것은 첼리니가 만든 귀금속 작품 중 유일하게 진품으로 확인된 작품(빈 미술사박물관)으로 르네상스기의 금세공인이 만든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이다. 1542년 프랑수아 1세로부터 귀화를 허락하는 인가장을 받았으며, 1544년 그로부터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로 장식한 12개의 은촛대를 만들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 가운데 주노 상의 도안은 파리의 루브르 궁에 있는 한 드로잉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543∼44년에는 루브르 궁의 입구에 청동으로 커다란 반달 모양을 한 퐁텐블로의 님프를 만들어놓았다. 1543년에는 퐁텐블로에 세울 분수를 위해 거대한 마르스 상의 모형(분실되었음)을 만들었다.

1545년 첼리니는 갑자기 파리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갔다.

피렌체에서 그는 코시모 데이 메디치의 환영을 받고, 가장 유명한 조각인 청동상 〈페르세우스 Perseus〉(아직도 피렌체의 로자데이란치에 세워져 있음)와 토스카나 대공의 거대한 흉상(피렌체 바르젤로)을 의뢰받았는데, 1546년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고 베네치아로 달아나는 바람에 1548년경에야 완성되었다. 같은 시기에 그는 팔레스트리나에서 출토된 고대의 토르소를 〈가니메데스 Ganymede〉(1546∼47,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로 복원하고, 대리석상인 〈아폴론 Apollo〉·〈히아킨토스 Hyacinth〉(1546)·〈나르키소스 Narcissus〉(1546∼47)를 만들었는데, 이 세 대리석상은 〈페르세우스〉의 실험용 주조품으로 만든 작은 부조 작품인 그레이하운드(1545)와 함께 현재 모두 피렌체의 바르젤로에 소장되어 있다.

첼리니는 또한 피렌체에서 은행가이자 예술후원가인 빈도 알토비티의 청동 흉상(1550경, 보스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을 만들었다. 〈페르세우스〉를 세상에 공개한 뒤(1554) 자신의 무덤(피렌체의 산타안눈치아타 교회에 있음)에 세워놓으려고 대리석 십자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현재 스페인 에스코리알의 왕립수도원교회에 있다. 이 〈에스코리알 십자가 Escorial Crucifix〉(1556)는 그의 미술이 당시 경쟁자였던 바르톨로메오 암만나티나 바초 반디넬리의 작품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피렌체 아카데미의 문장(紋章)을 위한 2개의 도안(대영박물관, 뮌헨 국립 그래픽 미술관)은 1563년에 완성되었다. 그의 자서전은 1558~62년에 제작되었으며 1565년부터 금세공과 조각에 관한 주요논문인 〈금세공에 관하여 Trattato del-l'oreficeria〉·〈조각에 관하여 Trattato della scultura〉를 쓰기 시작했다.

첼리니의 명성이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것은 미술가로서의 그의 작품보다는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자서전에 힘입은 바가 더 크다.

1728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판된 첼리니의 자서전은 영어(1771)·독일어(1796)·프랑스어(1822)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당시 낭만주의 운동의 여파로 즉시 널리 보급되었다. 비서에게 구술하여 씌어진 이 자서전은 문학적인 가식 없이 구어체로 서술되어 있으며, 작가 자신이 로마의 클레멘스 7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및 피렌체의 코시모 데이 메디치를 만나 현지에서 겪은 경험들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비록 과장이 심하고 자기자랑이 많기는 하지만, 놀랄 만큼 솔직하고 비할 데 없이 진솔한 인간 기록이며, 바로 이 때문에 첼리니라는 인물은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