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노

피사노

다른 표기 언어 Giovanni Pisano
요약 테이블
출생 1250경, 피사
사망 1314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조각가.

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의미의 고딕 조각가로 평가된다.

아버지인 니콜라 피사노의 고전주의 영향 아래 조각을 시작했으며, 아버지가 죽은 뒤로는 이 고전 양식을 당시 북부의 고딕 양식과 재통합하여 꾸준히 이어나갔다.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얻은 조각 개념을 철저히 자기화시켰기 때문에 초기 작품은 아버지의 작품과 거의 비슷하다. 니콜라 피사노가 시에나 대성당의 설교단을 의뢰받았을 때(1265) 처음으로 아버지의 조수로서 일했다고 전해진다. 그당시 그가 독립된 장인(匠人)이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아직 10대의 소년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쨌든 1285년 9월경 그는 피사의 시민권을 거부하고 시에나에 머물렀다. 이무렵 그는 시에나 대성당의 정면 설계와 조각 장식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나타난 화려하고도 질서정연한 양식은 이후 중부 이탈리아에 생겨난 고딕 건축 정면 장식의 원형이 되었다. 조각 장식이 정면 전체를 뒤덮고 있는 프랑스식 설계와는 달리 시에나 대성당 정면의 도안은 훨씬 더 건축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낮은 층은 작은 기둥과 차분한 잎무늬로만 꾸며져 있으며, 잎무늬는 작은 기둥의 방향을 따라 수직으로 새겨져 있다.

문 위의 상(像)이 새겨진 상인방(上引枋)을 제외하면, 조상은 실물보다 약간 큰 예언자상들이 있는 입구 위의 아치선에서 시작해 정면의 나머지 부분에 두루 새겨져 있다. 조상은 분리된 벽감(壁龕)에 각각 들어 있지만, 앞으로 구부리고 있는 불안한 자세로 말미암아 정면의 넓은 공간을 가로질러 서로 대면하고 있으며, 그와는 달리 정면구조를 결정하는 명확한 건축선(建築線)들을 완화시키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시에나 대성당 정면의 조상과 프랑스(특히 옥세르 대성당)의 잎무늬 장식 및 인물상 부조의 도안이 서로 비슷함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1268~78년에 대한 참고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 기간에는 프랑스를 두루 여행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에나 대성당의 정면에 이어 1301년에 완성한 피스토이아의 설교단은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이 설교단에 새겨진 5편의 서술적 부조는 전체적인 건축 구조와 마찬가지로 그의 아버지인 니콜라 피사노가 40년 전에 피사의 설교단에 새긴 조상들의 주제와 거의 비슷하지만, 그 양식은 피사 설교단에 내재해 있는 표현 내용을 새로운 수준의 강도로 나타내고 있다.

〈수태고지 Annunciation〉·〈예수 탄생 Nativity〉·〈예수탄생 소식을 들은 양치기들 Annunciation to the Shepherds〉 등에서는 피스토이아 설교단의 모든 부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격앙된 감정이 패널 전체에 고동치고 있다. 인물·동물·드레이퍼리·풍경 등이 불가능한 상태로 비틀려 있고, 울퉁불퉁한 표면과 깊이 새겨진 부조 위로 빛이 흩어지고 있으며, 각각의 인물은 그가 관여하고 있는 개개의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처음의 피사 설교단의 부조에서 피스토이아 설교단의 부조로 양식이 바뀌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전의 좀더 크고 무거운 구조의 형태들과는 대조적으로 표면을 깊게 파서 전체적으로 울퉁불퉁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피사노는 피스토이아 설교단에서와 같은 조상들을 다시는 만들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아버지의 초기 작품에 내재해 있던 보다 장중하고 고전적인 정신으로 되돌아갔다. 그 이유를 상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가장 그럴 듯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조반니가 피스토이아 설교단을 완성할 무렵 이미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조토의 거대하고 장엄한 양식을 경험한 것을 들 수 있다.

실제로 피사노는 조토가 파도바에서 감동적인 프레스코를 그린 것과 거의 같은 시기(1305경)에 그곳의 아레나 예배당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 Madonna and Child〉라는 대리석상을 새겨놓았다. 그밖에 14세기의 전환기에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시작한 준제국(準帝國) 정치운동에도 자극을 받아 더욱 공공연하게 고전주의로 되돌아갔을 것으로 보인다.

1302~10년 다시 피사로 돌아와 대성당의 설교단을 만들었다.

이 설교단은 그뒤 해체되었다가 현재 어느 정도 복원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피스토이아 설교단의 부조 양식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표현을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작품은 1311년 제노바에서 룩셈부르크의 마르가레테를 위해 만든 묘비(현재 '팔라초 비앙코'에 파편들이 있음)였다. 1314년 시에나에 있었다는 것을 끝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끝나는데, 아마 그후 곧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시에나에서 만든 작품에 뚜렷이 나타나듯이 그는 이탈리아의 유일한 고딕 조각가였으며 이탈리아 중부의 모든 예술사조에 깔려 있는 고대 로마의 유산을 항상 의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