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조각

상아 조각

다른 표기 언어 ivory carving , 象牙彫刻

요약 상아를 깎아서 만든 조각품·장식품·실용품.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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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 서양의 상아 조각
  2. 고전시대 이후 서양의 상아 조각
  3. 극동지역의 상아 조각
  4. 그밖의 상아 조각 전통

바다코끼리나 다른 포유동물의 엄니도 쓰지만, 주된 재료는 상아, 즉 코끼리의 엄니였다. 고대부터 상아는 고운 표면, 밝은 크림색, 매끄러운 감촉, 부드러운 광택 등의 특성 때문에 사치품으로 여겨져왔다. 고대 이집트와 중국·일본·인도의 여러 문화권에서 상아를 조각했다. 서양에서는 선사시대부터 로마와 카롤링거 왕조 및 비잔틴·고딕·르네상스·바로크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끊임없이 상아가 사용되어왔다.

고대 서양의 상아 조각

서양에서는 석기시대의 한 시기 이후로 상아·뼈·뿔로 만든 조각들이 많이 발견된다(→ 서양조각사). 이것들의 대부분은 프랑스 남부, 특히 도르도뉴 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다.

초기의 것들은 작은 여자 누드상으로서 대부분 미적 가치는 떨어진다. 동물 조각은 그뒤의 마들렌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중 상당수는 매우 뛰어나다. 이때 사용된 재료는 순록의 뿔이며, 매머드의 엄니도 이따금 사용되었다. 상아에 칼금을 내어 조각하는 기술은 환조로 모양을 새기는 것보다 늦게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선사시대에는 보통 상아에 동물 모양을 새겼는데 그 가운데에는 표현이 뛰어난 것들도 꽤 있으며, 때로는 풍경을 묘사하는 데 동물을 새겨넣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일찍부터 코끼리의 엄니와 하마의 이를 조각했다. 왕조 이전 시대와 초기 왕조 시대에 만든 빗과 U자형 머리핀 등의 실용품들이 여러 곳에서 많이 발견되었으며, 재앙이나 해를 피하기 위해 부적으로 가지고 다녔던 것으로 보이는 약간 조야한 여자 누드상도 그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초기 조각 중 걸작으로는 아비도스에서 발견된 작은 조상이 2점 있는데, 하나는 제1왕조의 왕을 나타내고, 다른 하나는 기자 시에 대형 피라미드를 세운 제4왕조의 쿠푸 왕을 묘사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상아로 만든 평평한 판에도 그림을 새겼으며, BC 3000년 이후 부조 기법을 창안했다. 후기 이집트의 상아 조각은 상당수가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데, 손잡이나 숟가락 및 손궤·가구의 상감세공 등에 사용되어 있지만 대부분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페니키아인들은 시리아와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상아를 사용했는데, 특히 목공품에 사용되는 상감세공의 상아 장식물을 많이 만들었으며, 거기에 청금석이나 유리를 박아넣거나 채색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이전의 에게 문명의 초기 상아 조각으로는 BC 1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에서 발견된 작은 곡예사상들이 있다. 상아로 만든 놀이상자와 거울 손잡이 및 사냥이나 전투 장면을 평부조로 새긴 장식액자들이 키프로스·스파르타·미케네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아시아의 양식에서 강한 영향을 받아 시리아나 소아시아의 남해안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의 초기 고전시대에 만든 중요한 상아 조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것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다만 고대 작가들의 글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고전시대의 상아 조각술은 BC 5세기에 페이디아스가 조각한 금과 상아로 된 거대한 조상들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또한 올림피아의 신전에 앉아 있는 제우스를 묘사한 조상이 있었으며,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 서 있는 아테나의 조상이 있었다.

로마 제국의 말기에 로마 황제들과 집정관들이 둘로 접는 상아 서판(경첩으로 연결한 2면의 서판에 새긴 부조)을 만들어 발행했는데, 집정관들은 해마다 직무를 볼 때 발행했고 귀족들은 혼인을 축하하기 위하여 발행했다.

고전시대 이후 서양의 상아 조각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상아 조각 중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브레시아에서 발견된 손궤(4세기)이다(→ 브레시아 손궤). 이것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오는 장면들을 부조로 새긴 작은 손궤이다.

그리스도교적인 주제들을 부조로 새긴 둘로 접는 서판과 패널화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이며, 그뒤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와 동정녀 마리아, 12사도에 대한 묘사가 유럽의 구상적인 상아 조각의 주요한 주제를 이루게 되었다. 7~9세기의 비잔틴 양식의 상아 조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10, 11세기에 부조로 새긴 웅장한 상아 조각은 여러 점 남아 있다. 인물은 강한 고전풍의 딱딱하고 틀에 박힌 양식으로 다루어져 있다. 11세기말과 12세기에 만든 비잔틴 양식의 작은 조상들은 드레이퍼리를 좀더 부드럽고 유연하게 다루고 있으며, 인물들은 길쭉한 형태를 띠고 있다.

북부 유럽에서는 카롤링거 왕조가 통치하던 르네상스 시대에 상아 조각이 다시 부흥했는데, 코끼리의 엄니 대신 바다코끼리의 엄니를 사용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카롤링거 왕조의 조각가들은 상아로 성해함, 십자가, 부조 패널, 시편집의 책표지를 만들었는데, 모두 〈신약성서〉에 나오는 장면과 인물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10세기의 오토 대제 시기에도 계속되었는데,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따온 장면들을 새긴 몇 점의 인상적인 시툴라(성수통)가 아직도 남아 있다. 성해함, T자 모양의 십자가, 주교장 등 로마네스크 양식의 상아 조각들은 각 나라의 다양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로마네스크 시기와 그뒤의 고딕 시기에 서양에서는 미술의 중점이 신성한 물건의 장식과 윤색에서 성당 건축, 기념비적인 그림, 스테인드글라스로 옮겨졌다. 그리하여 12세기경 이후로는 상아 조각이 미술 양식 또는 의식에 쓰이는 물건으로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2, 3개의 상아 패널을 연결하여 종교적 내용을 고딕 양식으로 새긴 부조는 계속 제작되었다. 또한 상아를 조각하여 손궤·빗·거울갑·서책·컵 및 단도의 손잡이, 체스의 말 등을 만들었다. 이러한 실용품의 표면에는 이따금 궁정 연애나 로맨스에 관한 장면들도 조각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상아 조각은 중세의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세련되고 섬세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이무렵 가정용품과 상감세공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상아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17세기의 독일과 플랑드르에서 상아 조각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서 고도로 숙련된 조각가들이 나뭇가지 모양의 촛대, 장식액자, 작은 조상, 큰 술잔 등 정교하고 사치스러운 조각품을 많이 만들었다. 18세기말경 유럽에서는 상아 조각을 단지 진기하고 별난 장식품 정도로 여겼다.

19세기에는 상아가 다시 인기를 끌었는데, 주로 오래되고 귀중한 상아 제품의 모사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또한 코담배갑·부채손잡이·향수병 등의 사소한 물건뿐만 아니라 손궤·시계갑·지휘봉을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20세기 무렵 상아를 깎는 기계가 사용되고 통일된 장식 전통이 쇠퇴하면서, 서양에서 상아 조각은 기술적 세련미는 여전히 필요하지만 미적 가치는 거의 없는 공예품으로 그 가치가 떨어져버렸다.

극동지역의 상아 조각

상아 조각
상아 조각

상아 조각은 중국의 가장 오랜 미술 양식의 하나이다.

대(殷代:BC 18~12세기) 왕들의 무덤에서 뛰어난 솜씨의 상아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디자인과 기술이 뛰어나서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황하 유역의 숲에 코끼리가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상아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대(周代:BC 12~3세기)의 궁정에서는 왕자와 고위 관리들이 상아로 만든 좁고 긴 메모판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유행했다.

이것을 '홀'(笏)이라 하여 보통 장식띠로 몸에 두르고 다녔다. 대(漢代:BC 206~AD 220) 때에는 이 상아판이 신분의 표시로서 정장에는 이것을 꼭 지녔다. 그뒤 대(唐代:618~907)와 대(宋代:960~1279)에는 이 상아판이 매우 길어졌으며, 궁정 관리들이 메모판으로뿐만 아니라 일종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지니고 다녔다. 이 상아판은 17세기에 명(明:1368~1644)나라가 무너질 때까지 계속 궁정의 고위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로서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상아로 만든 작은 입상들도 약간 남아 있다. 그외에 평평한 상아판에 거무스름한 색을 입힌 뒤 복잡한 모양의 새, 동물, 기하학적 도형을 새기거나 그 위에 다시 다른 색으로 염색한 것도 있다.

송대 이전에 코끼리들은 당시 난차오[南詔] 왕국의 영토인 중국 남서부(지금의 윈난[雲南])의 황야지대로 멀리 쫓겨갔다. 따라서 상아의 새로운 공급원을 해외에서 찾아야 했는데, 이무렵 아랍 상인들이 처음으로 아프리카 코끼리의 엄니를 잔지바르에서 중국으로 가져왔다.

민족주의 성향을 띤 새로운 나라는 몽골의 원(元:1271~1368)나라를 무너뜨린 뒤 계속해서 14세기에 상아 조각술을 부흥시켜 훌륭한 기술을 되살렸다. 현존하는 명대의 상아 조각들은 대부분 색을 입히지 않고 상아의 자연색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훌륭한 조상들이다. 명대의 훌륭한 조각 전통은 대(淸代:1644~1912)의 전반기에도 계속 이어졌던 것 같다. 이무렵 상아에 색을 입히는 기술이 되살아났으며, 정교하게 새긴 조각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염료와 래커를 동시에 사용했는데, 많은 전문가들은 이것들이 중국의 조각품 중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베이징[北京]과 광저우[廣州]는 상아 조각의 주요중심지였으며, 개인 또는 집단이 이것을 만들었다. 그러한 것으로는 원통형 붓통, 식탁 칸막이, 의자 팔걸이, 그밖의 책상 부품들, 홀, 아편용 코담배병·코담배접시·부속물들, 아름다운 도자기를 올려놓는 작은 탁자, 궁정의 귀부인들을 위한 향수상자, 거울갑, 그밖의 화장용품 들이 있었다.

상하이[上海]에서는 젓가락·마작도구·빗·인장과 같은 실용적인 물건이 많이 만들어졌다.

베이징과 광저우는 1912년 청나라가 무너진 뒤에도 계속 중국 상아 조각의 최고 중심지였다. 그 시기에는 황제의 후원이 없어지면서 제작량이 줄어들었다. 그때부터 이 업종은 주로 해외 거주자와 관광객들에게 상아로 만든 지팡이와 카드 집 등의 물건들을 대주는 일을 맡았다.

이 구매자들은 감식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미 19세기 중반 이후 쇠퇴해가고 있었던 상아 조각의 수준은 더욱 급격히 저하되었다.

일본에서는 고대에 상아 조각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의 조각가들은 약간 늦게서야 상아 조각술을 배웠지만,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의 상아 조각가들은 이 기법을 놀랄만큼 빨리 습득했으며 그당시에 만들어진 많은 소형 미술품은 지금까지도 감탄을 자아낸다.

일본에서는 주로 샤미센[三味線]의 현을 켜는 데 쓰는 픽이나 전통적인 두루마리 그림을 감는 축의 끝부분 등을 만드는 데 상아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술에서는 주로 도쿠가와 시대에 남자들의 복장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네쓰케라는 비녀 단추 모양의 장식품에 사용되었다. '네쓰케'는 남자들의 장식띠에 약상자(인로)와 담뱃대 및 담배쌈지를 붙들어매는 데 사용되었다. 거기에는 대개 인물·풍경·동물 등을 정교하고 세련된 솜씨로 새겼다.

1867년 도쿠가와 체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의상이 유행하고 궐련이 들어오자 네쓰케는 점차 사라졌다. 그러자 상아 조각가들은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점점 해외 거주자와 관광객들을 위한 물건을 만들게 되었으며, 빅토리아조의 기호에 맞추어 보석함, 궤, 카드 집, 체스의 말, 단추, 브로치 등을 만들었다. 1900년경 수많은 모조품과 대량생산을 위한 기계 도구의 사용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상아 조각술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일본의 상아 조각은 대부분 죽은 미술가들의 서명을 넣어 옛날의 네쓰케를 복제하거나 상아로 만든 중국의 고미술품을 모방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밖의 상아 조각 전통

상아 조각
상아 조각

마호메트 시기나 그이전부터 중동과 이슬람교도가 지배하던 스페인에서는 가구·문·손궤·민바르 등을 장식하는 데 상아가 널리 사용되었다. 장식은 기하학무늬나 식물 형태의 당초무늬[唐草紋]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때때로 새와 동물들이 새겨지기도 했다.

인도에서는 항상 상아가 풍부했고 상아 조각술이 4,00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도 현재는 힌두교와 불교에 관련된 조상들, 작은 상자들과 부조 몇 개만 남아 있다.

북아메리카의 초기 이누잇(에스키모라고도 함)족은 쓸모 있는 금속이 거의 없어서 바다코끼리의 엄니와 땅에 묻힌 매머드의 엄니에서 얻은 상아를 이용하여 물통 손잡이, 활비비, 파이프, 작살대, 바늘상자 등 다양한 실용품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여기에 가는 선으로 기하학무늬나 우아한 곡선무늬를 새겨넣었다(→ 스크림쇼).

그외에는 19세기 미국의 고래잡이 선원들이 가지고 다니던 것으로, 고래의 이빨이나 바다코끼리의 엄니에 여러 모양을 새긴 세공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