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미술

인도미술

다른 표기 언어 Indian art , 印度美術

요약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을 포괄하는 인도 아대륙(亞大陸)의 미술.

목차

접기
  1. 인도의 건축
  2. 인도의 조각
  3. 인도의 회화
  4. 인도의 장식미술

이 광대한 지역에서 오랜 역사를 통해 동아시아나 서아시아와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미술문화가 형성되었다.

그 시원은 일찍이 인더스 문명(BC 2500~1800)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문명의 도시유적에서 출토한 유물들은 이미 후대 인도미술과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더스 문명은 아리아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되었고, 인도에서 다시 도시문명이 발흥한 것은 BC 6세기경이었다. 그뒤 BC 3세기 마우리아 왕조 치하에서 인도미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굽타 왕조시대(AD 4~6세기)까지 약 7, 8세기의 기간에는 불교 미술이 주류를 이루어 스투파(stūpa : 탑)를 비롯한 많은 불교 건축과 조각·회화 등이 발달했다.

굽타 시대는 인도 문화사에서 고전기로 일컬어지는 시기로서 여러 분야에서 인도 문화의 고전적 규범이 형성되었고, 미술활동에서도 황금기였다. 인도미술의 체계가 확립되고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이다. 이때부터 중세(7~12세기)에 걸쳐 인도미술은 각 지역에 분립하고 있던 여러 왕조들의 후원 아래 다양한 모습으로 화려하게 꽃피웠다.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많은 힌두 사원과 부수 조각들은 대부분 이 시기의 산물들이다. 8세기경 서아시아로부터 신드 지방에 처음 진출한 이슬람 세력은 12세기말에는 북인도를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그 세력을 남인도까지 뻗치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많은 이슬람식 건축이 인도에 세워졌고, 이러한 경향은 16세기의 통일 무굴왕조 치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결과 오늘날 인도를 대표하는 타지마할과 같은 많은 이슬람식 건축물들이 인도에 남게 되었다.

한편 17세기 이래 라자스탄과 파하리 지방에서는 인도 고유의 회화 전통에 바탕을 둔 독특한 양식의 채색화가 발전했다.

인도미술은 전개된 지역의 광대함과 역사의 장구함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한 통일성과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지역에서 제작된 미술품들이 필연적으로 나름의 개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 사이에는 그러한 다양함을 관통하는 통일적 양식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통일적 양식의 존재는 인도 문화가 일관되게 유지해온 통일성과 각 지역간에 끊임없이 이루어진 빈번한 교류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의 미술사와 정치사적 전개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관계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즉 어느 지역에서 미술의 전개는 그 시대를 지배했던 왕조와 본질적으로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양식의 전파나 교류도 정복이나 병합과는 대체로 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조가 바뀌고 예술 후원자가 바뀜에 따라 미술의 양식마저 바뀐 경우는 이슬람 지배시대를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었다. 또한 인도의 왕조사에 대한 일반인의 지식에는 불분명한 부분이 많으며, 각 왕조의 통치영역도 정확히 파악되어 있지 않다. 인도의 미술사를 설명하는 데는 왕조보다 지역이라는 범주가 더 유용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의 왕조명들은 미술사적으로 시대구분의 의미를 지닌다기보다는 편의상 사용된 것임에 유의한다.

인도미술에는 나무·벽돌·진흙·돌·금속 등 다양한 재료들이 쓰였다. 나무는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재료이므로 일찍부터 널리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초기의 목제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다만 목제품 양식을 모방한 석조물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진흙과 벽돌도 널리 쓰였다. 진흙으로 된 것으로는 작은 테라코타 상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벽돌은 인더스 문명기 이래 중요한 건축재였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올수록 가장 애용되었던 것은 석조이다. 인도인들은 석조건축이나 조각에 있어서 어느 문명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경탄을 자아낼 만한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이러한 재료의 특성이 미술품의 조형적 특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도미술에서는 조형 형식이 재료의 성격에 우선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같은 조형 형식을 표현하기 위해 종종 서로 다른 재료들이 사용되기도 했고, 다양한 재료들이 호환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목조품이나 소조품에 보이는 양식이 석조로 모방되기도 했고, 석조품의 양식이 청동제품으로 옮겨지기도 했으며, 반대로 석조품이 금속제품의 특질을 보이기도 했다. 인도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조형적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재료의 물질적 특성에 의한 기술상의 한계를 효과적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인도대륙에는 서아시아와 중앙 아시아를 비롯한 외래의 미술 전통이 끊임없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외래의 영향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전통에 맞추어 창조적으로 변형시키는 데 있어서 인도의 미술가들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역사적으로 외래미술의 수용이 두드러진 시기는 일찍이 마우리아 시대, 기원 직후 쿠샨 시대, 16세기의 무굴 시대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인도미술은 다른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의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스리랑카·미얀마·타이·인도네시아·인도차이나 등 동남아시아의 미술의 발전은 유입된 인도미술의 영향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으며, 따라서 넓게 보면 인도미술 문화권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불교 미술의 발전도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인도의 미술품은 불교·힌두교·이슬람교 및 민간신앙 등 종교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건축으로는 불교의 스투파와 사원, 힌두교 사원, 이슬람교 모스크 등을 들 수 있고, 조각으로는 수많은 불교와 힌두교 신상, 서사 부조 등이 제작되었다. 회화의 주제도 힌두 신앙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인도의 모든 미술품이 오로지 종교적이었던 것은 아니며 명목상으로만 종교와 관련된 경우도 적지 않다. 시대에 따라 소재가 표면상으로는 종교적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중심적인 정신에 따라 현실적인 삶의 즐거움을 표현한 것들도 발견된다.

인도미술을 흔히 불교 미술, 힌두교 미술, 자이나교 미술 등으로 구분짓지만 이것은 단순히 표현된 주제상의 차이를 말할 뿐이지, 각 종교 미술의 표현양식상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만들어진 비슈누 상과 불상은 대체로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띠고 있다.

이것은 인도의 미술가들이 대부분 비종파적인 길드에 소속되어 경우에 따라 어느 종파의 작업이든, 즉 그것이 불교이든, 힌두교이든, 자이나교이든 일을 맡아 작업했던 데서 연유한다.

인도의 미술품은 대부분 미술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주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미술품의 제작의뢰는 소원의 성취나, 성전에 명시된 선덕의 수행, 개인 명예의 고취 등 다양한 동기에서 이루어졌다. 일단 의뢰를 받은 미술가는 오랜 도제생활을 통해 터득한 기술과 성스럽게 여겨지는 제작규범서에 따라 작업을 해나갔다.

작업에는 비례나 도상에 관한 정해진 규범이 있었고 이러한 규범은 종종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규범이 지닌 상징적 의미는 복잡한 형이상학적, 종교 교의적 관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술가 개개인이 그러한 점을 반드시 인식하고 작업했던 것은 아니지만, 규범에 따른 제작과정을 통해 상징적 의미를 미술품에 구현해낼 수 있었다. 충분한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은 이러한 완성 작품을 보면서 거기에 구현된 상징을 읽고 그것을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볼 때, 역사적으로 인도의 미술가들 개개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그들 대부분이 무명이었던 것은 결코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인도인들에게 중요시되었던 것은 기술을 지니고 있는 미술가들이 아니라 규정된 이상에 부합하는 미술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인도의 미에 관한 이론에 따르면 예술작품에는 각각 독특한 정취(rasa)가 있고, 이 정취를 향수하는 것이 미적 경험을 구성한다고 한다.

미술작품은 다양한 수준에서 작용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은 자신의 지적·정서적 소양에 따라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것을 향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형태와 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은 교육받은 교양인이 누리기에 적절한 활동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최상의 미적 경험은 신성의 체험과 같은 뿌리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인도의 건축

인도건축에서 가장 널리 쓰였던 건축재는 목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구성이 약해 쉽게 파괴·소실될 수 있는 목재 자체의 특성과 인도의 특수한 기후 때문에 목조건축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으며, 이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더욱 심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축물은 내구성이 보다 강한 돌이나 벽돌로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건축은 거의 다 종교적인 목적으로 지어진 것들이다. 불교 사원의 형태에서 민간 주거건축의 형태를 짐작할 수도 있지만, 이슬람 지배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궁성이나 민간 주거건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점은 다소 뜻밖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러한 세속 건축이 목재 등으로 지어졌던 탓으로 추측된다.

인더스 문명(BC 2500경~1800)에서는 도시건축이 발달해 있었다. 발굴 결과에 따르면, 이 문명의 주요 도시유적인 모헨조다로·하라파·칼리방간 등은 바둑판 모양의 도시구획과 발달된 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주거용 건물은 방형 평면의 가운데에 뜰을 두고 방들이 에워싼 형식이었다.

대규모 공공건물은 별로 확인되지 않았으나, 의식용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목욕장이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건물들은 주로 구운 벽돌로 지어지고 목재가 일부 첨가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장식이나 표면 처리에는 벽돌이나 회가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인더스 문명기부터 마우리아 시대(BC 321경~185)까지의 건축은 별로 그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이 시기의 건축이 대부분 목재나 벽돌 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석조 건축이 발달한 것은 마우리아 시대부터였다. 이 시대의 주요유적으로는 지금의 파트나(고대명은 파탈리푸트라)의 쿰라하르에 있는 궁성 유적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접견실은 80개의 석주가 늘어선 2층 건물로서 이란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세폴리스의 건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밖에 가야 근처의 바라바르와 나가르주니 언덕에 있는 석굴사원들도 명문에 의해 마우리아 시대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마우리아 시대부터 크게 발달한 건축물로서 주목할 만한 것이 초기 불교에서 활발히 숭배된 스투파이다. 스투파는 성자의 유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반구형으로 쌓은 일종의 분묘로 그 기원은 부처 출현 이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된다.

부처 사후 그의 유골(사리)은 8등분되어 8개의 탑에 모셔졌고, 이때부터 부처를 상징하는 예배대상으로서 스투파 숭배가 시작되었다. 스투파의 건립과 숭배는 마우리아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발달했으며, 이 시기에 스투파의 기본형식이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반구형(안다 또는 覆鉢이라고 부름)을 기본 형태로 하면서 정상부에는 산개(傘蓋)가 올려지고 산개 주위를 작은 난순(欄楯)이 둘러싸며, 다시 스투파 주위를 커다란 난순이 둘러싸고 사방에는 문이 세워지기도 했다. 스투파는 시대가 내려올수록 원래의 복발 위에 몇 겹이 거듭 덧씌워짐으로써 증광이 이루어져 점차 대규모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써 바루트(BC 1세기)와 산치(BC 3~AD 1세기)의 스투파들을 들 수 있다. 이 스투파들은 석조로 된 난순과 문이 있는데 많은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여기에 새겨진 부조 중에는 건물이 묘사된 예가 많으므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세속 건축물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이 스투파들에서 석조물(난순·문 등)의 건축방식은 목조 건축방식을 모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투파는 바루트나 산치와 같은 중인도 지방뿐만 아니라 남인도의 안드라 지방(아마라바티, 나가르주나콘다 등지)이나 서북 인도의 간다라 지방에서도 활발하게 발달했다.

탑파 (stupa)
탑파 (stupa)

한편 서인도 지방에서는 불교 석굴사원의 조성이 활발했다. 석굴사원에는 예배당(차이티아)과 승방(僧房 비하라)의 2가지 형식이 있었다. 차이티아는 길게 늘어진 말발굽 형태를 한 평면으로 가장 안쪽에 있는 반원형의 평면 공간에 예배 대상으로서 작은 스투파가 안치되어 있었다.

차이티아 (caitya)
차이티아 (caitya)

비하라는 대체로 가운데에 방형 평면의 공간을 두고 입구 쪽을 제외한 3면에 작은 방들을 낸 모양을 갖추었다. 석굴사원의 천장이나 기둥 등의 조성방식을 보면 목조 건축방식을 모방하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대표적인 초기 석굴사원으로는 BC 1세기에 개착된 바자 석굴을 비롯하여 칼를리·베드사·콘다네·칸헤리·나지크·피탈코라 석굴 등을 들 수 있다. 5세기 후반에 이 지역에서는 또한번의 대규모 석굴 조영이 이루어진다.

마하 보디 사원(Mahabodhi Temple)
마하 보디 사원(Mahabodhi Temple)

아잔타 석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위 대승기(大乘期) 석굴, 엘로라 석굴 등에 주목할 수 있다.

4세기말 및 5세기초에 들어서면서 인도건축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제 석조 건축은 더이상 목조 건축의 단순한 모방따위를 멈추고, 독자적인 형식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나타난 건축형식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방형 평면의 건물(聖所) 위에 피라미드 모양의 상부구조(시카라)를 얹은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의 대표적 건물로서 비타르곤 사원, 데오가르의 비슈누 사원을 들 수 있다.

이 사원들의 시카라는 크기를 줄여가며 쌓아올린 석재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 표면은 찬드라샬라(고대 인도 목조 건축의 창문 모양에 기원을 둔 아치 장식)라는 장식의 모티프가 수직 방향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시카라와 찬드라샬라 장식은 뒤에 힌두 사원, 특히 북인도 사원 양식의 기본형을 구성한다. 한편 나츠나쿠타라에 있는 파르바티 사원은 상부구조가 석재를 수평적으로 반복하여 쌓은 형태인 점에서 남인도 양식의 선구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5~6세기에 비롯된 이와 같은 힌두 사원 건축은 중세(특히 9~11세기)에 들어와 절정을 맞이했다.

이 시대에 발달한 건축 양식은 2가지로 대별되는데, 하나는 주로 북인도에서 발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로 남인도에서 발달한 것이다. 이밖에 이 양자의 혼합적 형태로서 주로 카르나타카와 데칸 지방에서 발달한 제3의 양식을 꼽기도 한다. 이 세 양식은 학자에 따라 각각 산스크리트 건축서에 나오는 나가라·드라비다·베사라 양식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지만, 이 세 용어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북인도의 인도 사원은 일반적으로 비마나와 만다파의 2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마나는 주신상이 봉안되는 정방형 평면의 성소이고, 만다파는 성소에 하나 또는 2~3개의 방으로 잇따라 지은 집회·의식 공간이다. 비마나의 위에는 예외없이, 그리고 만다파 위에는 종종 높은 원추형 또는 4각추형의 시카라가 솟아 있다. 시카라는 북인도의 힌두 사원 양식을 분류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서, 수직방향의 운동감이 강조되었다는 점이 구조상 중요한 특징이다.

북인도 양식의 시카라는 윤곽선이 위쪽으로 갈수록 체감하는 곡선인지, 또는 단순한 직선인지에 따라 다시 라티나 형식과 팜사나 형식으로 나뉜다.

북인도 양식은 동쪽의 오리사 지방에서부터 서쪽의 라자스탄, 구자라트, 북단의 카슈미르 지방에 걸쳐 북인도와 중인도 전역에서 널리 만들어졌고 남쪽의 카르나타카 지방에까지 그 세력이 뻗쳐 있었다. 이 광대한 지역에서 북인도 양식은 그 기본형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했다.

특히 오리사 주의 부바네슈와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원들은 북인도 양식을 대표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부바네슈와르에는 7~13세기에 만들어진 100여 개의 크고 작은 사원들이 밀집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파라슈라메슈와르 사원(7~8세기)이고, 이를 이어 묵테슈와라 사원(10세기), 링가라자 사원(11세기) 등에서 건축 양식은 더욱 대규모로,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다. 또하나 주목할 만한 지역은 중인도의 카주라호이다. 여기에서는 10~11세기에 걸쳐 찬델라 왕조의 열성적인 후원 아래 80여 개의 사원들이 만들어졌고 그 상당수가 남아 있다.

이곳의 사원들은 중앙에 장대한 규모의 시카라가 솟아 있고, 그 주위에 작은 크기의 시카라들이 몇 겹으로 에워싼 형태로서(부미자 형식으로 분류됨) 강렬한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사원의 외벽과 내벽에는 신상과 여인상 등 수많은 인물 조각과 장식부조가 새겨져 있어 하나의 거대한 조각품을 방불케 한다.

남인도 양식도 성소와 만다파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북인도 양식과 같지만, 성소의 상부구조 형태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남인도 사원건축). 이 양식에서 상부구조는 쿠티나 형식으로 불리는데, 4각추 모양은 수평으로 전개되는 층단의 반복으로 구성되며 각 층단에는 사원의 세밀화가 줄을 지어 조각되어 있다.

남인도 사원건축 (South Indian temple architecture)
남인도 사원건축 (South Indian temple architecture)

따라서 북인도 양식에서 느낄 수 있는 수직운동감과는 달리 수평운동감이 느껴진다. 정상에는 반구형의 돔이 올려지는데 남인도 양식에서는 이 부분을 시카라라고 한다.

남인도 양식의 중심지는 남인도로 오늘날의 타밀나두 지방이지만, 그 세력은 안드라 지방, 동쪽의 카르나타카 지방에까지 뻗어 있었다. 타밀나두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마하발리푸람의 다르마라자라타(650경)와 해변 사원(700경)이다. 이후 남인도 양식은 9~12세기 촐라 왕조시대에 화려하게 꽃피게 된다.

탄죠르와 강가이콘다촐라푸람에 각각 같은 이름으로 세워진 라자라제슈바라 사원(모두 11세기초)은 규모와 설계의 웅대함, 표면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의 정교함 등에서 남인도 양식 사원을 대표할 만하다.

신드가 아랍인들에게 정복된 것은 712년의 일이지만, 현재 인도 반도 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오랜 이슬람식 건축은 12세기말의 것이다. 이때부터 인도에서는 델리를 비롯한 이슬람 세력의 점령지를 중심으로 모스크·분묘 등 이슬람식 건축이 하나 둘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16세기 무굴 왕조가 인도의 대부분을 통일하면서 더욱 진작되어 이후 제왕 아크바르의 아버지인 후마윤의 묘와 샤 자한의 애비(愛妃)인 뭄타지 마할의 묘인 타지마할을 비롯한 분묘, 델리의 자미 마스지드 등의 모스크, 아그라 궁성과 델리의 '붉은 궁성' 등 많은 이슬람식 건축물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인도건축).

인도의 조각

인도미술에서 조각은 특히 애호된 분야였다.

심지어 건축이나 작은 그림까지도 조각의 특성을 띠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남인도의 마하발리푸람에 있는 5개의 라타와 같이 암석을 쪼아 만든 건축물의 경우 이러한 점은 특히 두드러진다. 그러한 건축물은 거대한 크기의 조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석조건물은 수많은 조각들로 안팎이 장식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조각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 조각과 건축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10세기경부터 더욱 현저해져서 조각은 대부분 건축물의 일부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조각품은 비록 그 자체만으로 완전한 형상을 갖추었다고 해도 원래 그 조각이 부속되었던 건물의 원 맥락으로부터 따로 떼어서는 그 조각에 부여된 조형적인 의도와 효과, 조각이 전체 속에서 가졌던 의미 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인도조각의 소재는 거의 예외없이 종교와 관계된 것들이다.

불교·힌두교·자이나교 및 민속신앙 등의 종교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여러 종류의 신상과 신화를 도해한 부조 등이 대종을 이룬다. 물론 이러한 조각들을 원래의 종교적 의미를 떠나 단순한 예술품으로서 감상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 종교적 내용과 의도를 아는 것이 우리의 감상과 이해를 더욱 진작시킬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5,000년에 걸쳐 발전한 인도조각을 양식적 특징을 일반화하여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대체로 인도조각에 흐르는 2가지 경향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생동감 넘치는 조형성의 강조이다. 즉 산치 대탑(제1스투파)의 조각이나 쿠샨 시대 마투라의 조각은 마치 내적 생명력이 안으로부터 충만하여 부풀어오른 듯한 모습으로 유기적·감각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또하나의 흐름은 형태를 안쪽에서부터 성형하기보다 밖에서부터 깎아 들어간 모습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태에는 선적인 추상성이 강조된다. 바루트 스투파의 조각들은 그 좋은 예이다.

인도조각사는 이 2가지 흐름의 상호작용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서 발굴된 조각품은 테라코타 소상, 동석제 인장 등 거의 소품들이다. 테라코타 소상들은 대부분 동물이나 사람의 얼굴을 나타낸 것으로 간략하게 성형된 위에 세부가 묘사되었다.

동석제 인장에는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가장 많이 새겨진 것은 등에 혹이 난 소 등의 동물류이다. 인장조각 중에는 요가 자세로 앉은 인물상과 같이 후대 인도에서 발달하게 되는 종교 전통을 예시해주는 것들도 있다. 이밖에 청동과 돌로 만들어진 소상도 몇 점 전하는데 그 예로 하라파에서 출토한 남자 토르소, 모헨조다로에서 출토한 춤추는 소녀상과 남자흉상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조각 유품에는 앞서 이야기한 인도조각의 2가지 흐름이 이미 뚜렷이 병존하고 있으며 때로는 이 두 흐름이 결합되기도 한다.

건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조각에 있어서도 인더스 문명기로부터 BC 3세기의 마우리아 시대에 이르는 기간에는 이렇다 할 만한 유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 시대에 접어들면서 수준높은 석조 조각이 갑자기 출현했다. 이 석조유품들은 아소카 왕이 불법의 홍포를 위해 세운 석주의 주두부를 장식했던 동물상들이다. 이 동물상에 조각된 동물들은 사자가 가장 많고 황소·코끼리 등도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소카 왕이 부처의 첫 설법지인 사르나스에 세운 사자 주두이다.

여기에서 등을 맞대고 앉아 포효하고 있는 4마리의 사자 조각은 절도가 있으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사실적인 표현을 보여준다. 이밖에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인도의 토속 남신인 약샤와 여신인 약시의 상들도 여러 점이 있다. 이와 같이 마우리아 시대에 석조 조각이 갑자기 발흥하게 된 것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로부터 유입한 외래 미술가의 역할 및 헬레니즘 미술의 영향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인도미술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미술가들이 이러한 외래의 영향을 자신들의 전통에 맞추어 신속히 소화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인도미술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마우리아 왕조의 멸망 이래 기원전후까지의 인도조각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개괄적으로 보아, ① 바루트·산치·마투라·보드가야 등의 북-중인도 지역, ② 바자·피탈코라·칼리 등 데칸 고원 서부의 지역, ③ 아마라바티·자가야페타 등의 안드라 지방, ④ 오리사를 중심으로 한 동인도 지역 등의 4개 지역을 꼽을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원각상보다는 부조 부문에서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졌다. 바루트와 산치의 조각은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유품들이다(바루트 조각, 산치 조각).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바루트와 산치의 스투파들은 난순이나 문에 화려하게 조각이 되어 있었고, 그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원형이나 방형의 화면에 부처의 일생이나 전생의 이야기들을 새긴 불전도와 본생도 부조였다.

바루트의 부조는 아직 공간 구성에서 오행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표현도 어색한 점이 있으나, 산치 대탑에서는 이러한 점들이 극복되어 보다 세련된 양상을 보여준다. 한편 산치 대탑 문의 양측면 까치발에 조각된 약시상은 자연스럽고 유연한 자세, 감각적인 표정 등에서 생동감 있는 관능미가 넘친다. 이러한 생동감은 다른 지역의 미술에서도 느낄 수 있는데, 칼리 석굴 입구의 미투나 상은 그 좋은 예이다.

AD 1~4세기에 걸쳐 인도조각은 북인도의 마투라와 서북인도의 간다라, 남인도의 안드라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중에서도 인도의 중원지방에 위치한 마투라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마투라에서 제작된 조상들은 널리 다른 지방에까지 운반되었고, 다른 지방에서 제작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마투라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현상은 인간적인 모습을 한 불상이 비로소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까지 부처는 스투파와 같은 상징물을 통해서 예배되었는데, 1~2세기에 처음으로 불상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불상은 마투라와 간다라의 두 지역에서 동시에 서로 독립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마투라에서 만들어진 초기 불상 중 대표적인 예로 발라라는 승려가 봉헌한 입상을 들 수 있다. 이 상은 풍만하고 중량감 있으면서도 생명감이 넘치는 표현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형적 특징은 기원전에 만들어졌던 석조 약샤 상들을 방불케 하는 것으로서, 이 조상의 표현 양식이 인도 고유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불상이 처음 만들어졌던 또다른 지역인 간다라 지방은 지금의 파키스탄 서북부에서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걸친 지역으로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이래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간다라 미술). 쿠샨 시대(1~3세기)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서는 불교 미술이 크게 발달했는데, 이 미술도 역시 지중해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창조된 불상도 그리스의 신상을 연상하게 하는 서방 자연주의적 형식을 띠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불교의 흥성과 발맞추어 수많은 석조 불상과 보살상들이 만들어졌고, 또 사원의 스투파의 기단부를 장식하기 위해 불전이나 본생담을 새긴 수많은 부조들이 제작되었다.

4~6세기에 인도의 상당 부분은 굽타라는 통일왕조의 치하에 있었다.

이 시기에 인도조각은 소위 고전기를 맞게 되어 새로운 조형적 이상이 확립되었다. 즉 이전의 조각의 주류를 이루던 감각적·현실적인 측면이 줄어들고 표현형식과 종교적 이상 사이에 밀접한 연결이 이루어졌다. 형태는 여전히 내적 생명력에 의해 안으로부터 부풀어오른 듯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현저하게 절도 있고 정리된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점은 고전시대의 절정기였던 5세기 중엽 마투라에서 만들어진 불입상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균정한 몸의 형태와 면밀히 계산된 비례, 규칙적인 옷주름, 숭고한 표정 등은 이 시대의 조형적 이상을 잘 보여준다. 이 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절대적으로 고요하고 안온한 종교적인 분위기이다. 마투라는 여전히 당대 미술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5세기 후반에는 사르나스에 또하나의 유력한 조각유파가 있어서 마투라와는 약간 다른 조형적 이상을 완성했다.

사르나스에서 만들어진 불상들은 약간 긴장을 푼, 콘트라포스토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고 몸이나 얼굴의 형태는 마투라 상보다 훨씬 우아하고 부드러워 여성적인 미를 느끼게 한다. 이 유파의 대표적인 작품이 잘 알려진 전법륜불좌상이다.

굽타 시대에는 다양한 힌두신의 도상도 발달하여 많은 신상과 신화를 도해한 부조들이 만들어졌다. 특히 비슈누에 대한 신앙이 유행하여 비슈누 상이 여러 모습으로 조각되어 남아 있다. 주목할 만한 예로 중인도의 우다야기리 석굴에 새겨진 〈바라하(돼지) 화현〉 부조와 데오가르 사원의 벽면에 새겨진 〈끝없는 잠에 빠진 비슈누〉 부조를 들 수 있다.

이들 부조에서는 화면 구성이나 인물의 자세에 유연함과 변화가 많고, 전반적으로 약동하는 힘과 에너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7~12세기는 흔히 인도미술사에서 중세라고 불리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조각은 대부분 사원건축에 부속된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제작된 물량도 엄청났다. 그러나 대량제작이 종종 질의 저하를 가져 온 것도 사실이었다. 조각 양식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양식은 건축의 경우처럼 북인도와 남인도로 크게 묶어서 파악할 수 있다.

중세 초기의 북인도 조각에는 2가지 흐름이 눈에 띈다.

한 쪽에서는 굽타 시대에 완성된 조형적 규범이 반복적으로 답습되면서 굽타 양식이 타락하고 해체되어갔으며, 다른 한 쪽에서는 새로운 양식의 모색과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후자의 흐름은 8세기경 처음 나타나 9세기 후반에 북인도 조각에 괄목한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우아한 형태, 풍부한 장식성, 넘치는 리듬감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새로운 양식은 10세기에 절정을 맞이했다. 아바네리의 조각군, 인도르의 시바 사원 조각과 괄리오르의 텔리카만디르 사원 조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선과 각의 강조가 점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눈에 띈다. 12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슬람 세력의 대대적인 침입 속에 북인도의 힌두 조각사는 사실상 끝을 맺게 되었다.

남인도의 중세 조각은, 특히 인물의 경우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며 우아한 운동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하발리푸람에 있는 〈아르주나의 고행〉(〈강가의 하강〉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음)을 묘사한 대암벽 조각에서 그 화려한 시작을 볼 수 있다.

이 조각에서 느낄 수 있는 가볍고 유연한 특성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안정감과 힘을 얻게 되고, 9세기 후반 촐라 왕조시대의 사원 조각에서 절정기를 맞이했다. 티루발리슈바람·코둠발루르·킬라이유르·슈리니바사날루르·쿰바코남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남인도의 조각에도 북인도처럼 평면성과 각의 강조가 점차 나타났다. 한편 촐라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상들은 이 시대의 조각을 논함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춤추는 시바의 상은 널리 알려져 있다.

원형의 불꽃을 배경으로 하여 우아하게 춤을 추는 시바의 모습은 창조와 유지·파괴·휴식이 반복되는 힌두의 세계관을 상징하고 있다. 이 상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모든 힌두 신상을 대표할 만한 조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북인도와 달리 이슬람 세력에 오랫동안 저항했던 남인도지역에서는 힌두 사원의 조각활동이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기술적인 숙달에도 불구하고 조각들은 대부분 기계적인 반복 속에 생기를 잃어버렸다.

인도의 회화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인도에서는 일찍부터 회화가 크게 발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후 등의 원인으로 인해 1000년 이전의 작품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석굴사원에 그려진 벽화가 거의 전부이다. 이 밖에 오늘날 전하는 그림의 대부분은 종려잎이나 종이에 그려진 작은 규모의 채색화들이다. 전반적으로 이 세밀화들에서는 필선이 중요시되지 않고 형태와 공간의 창조는 대부분 채색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림의 소재는 신·신화·전설 등을 그린 종교적인 것, 또는 시·연애담 등을 도해한 문학적인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무굴 화파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세속사도 즐겨 그렸다.

아잔타 석굴에는 일찍이 1~2세기경에 그려진 벽화들이 일부 남아 있다.

아젠타 석굴 불교 회화
아젠타 석굴 불교 회화

그러나 보다 본격적인 발전은 이곳의 대승기석굴(5세기 후반) 벽화들에서 발견된다. 회를 입힌 벽에 템페라 기법으로 그려진 벽화들이 대승기석굴의 벽과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소재는 물론 불교적인 것으로 불상·보살상·불전도·본생도 및 장식적인 것들이다. 이 벽화들은 양식 면에서는 입체성이 두드러지고 자유롭고 역동적이어서 인도에 이보다 1,000년 뒤 출현한 세밀화 양식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아잔타 계통의 벽화는 바그 석굴과 엘로라의 카일라사 사원에도 보이고, 그밖에 카르나타카의 바다미 석굴, 타밀나두의 시타나바살에도 6~7세기경에 그려진 벽화가 남아 있다.

벽화 이외에 불교의 경전화가 있다. 종이가 쓰이기 전 불교경전은 얇고 길게 자른 종려잎에 필사하여 만들어졌고 그 사이에 그림이 삽입되기도 했다. 11~12세기 팔라 시대에 동인도에서 그려진 그러한 경전화들이 오늘날 전하고 있다(팔라 회화). 팔라 시대 경전화들에는 이전의 벽화에서 볼 수 있었던 극적 효과가 대부분 사라졌고 정확하고 세밀한 표현이 강조되었다.

팔라 회화(Pala painting)
팔라 회화(Pala painting)

1000년 이후 약 500년간 인도회화 발전의 중심지는 서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이었다.

이 지방에서는 자이나교도들의 열성적인 후원 아래 자이나교 경전화가 많이 그려졌다. 자이나교의 교조 마하비라의 일대기인 〈칼파수트라〉와 자이나교의 성자 칼라카의 모험담인 〈칼라카차리야카타〉의 삽화가 잘 알려진 예들이다. 이 그림들에서는 공간이 평면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물들이 대체로 측면관에 이상스러운 눈 모양을 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맑은 색조와 제한된 색채가 쓰였다.

이러한 자이나교 경전화의 전통은 15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16세기에 접어들자 서인도에는 자이나교 회화 양식에 기초한 새로운 회화 양식이 출현했다. 〈바가바타 푸라나〉·〈초라판차시카〉를 도해한 그림들을 통해 잘 알려진 이 회화 양식은 측면관 위주에 오행(奧行)이 거의 무시된 점이 이전의 서인도 양식과 공통적이지만 그보다 훨씬 힘차고 활력이 넘친다.

한편 서아시아로부터 이슬람 세력이 진출해오자 인도에서는 이들이 후원한 독특한 양식의 그림도 그려졌다. 이들은 서인도 양식보다는 페르시아의 이슬람 회화 양식을 선호하여 페르시아로부터 화가들을 초빙해서 그림을 그리게 하거나 인도 화가들로 하여금 그 화법대로 작업하게 했다. 따라서 이 그룹의 그림은 '인도-페르시아 양식'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16세기 이래 인도는 무굴이라는 티무르계 이슬람 왕조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무굴 치하에서 발달한 무굴 회화는 이 왕조의 뛰어난 군주 악바르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 그림을 배웠고 성년이 된 뒤에도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악바르는 궁중에 대규모 아틀리에를 설치하고 인도 전역에서 화가들을 불러들였다. 초기에 이 아틀리에는 악바르의 스승이자 유명한 페르시아 화가인 미르 사이이드 알리가 이끌었다.

무굴 회화(Mughal painting)
무굴 회화(Mughal painting)

여기에서 악바르의 취향에 맞는, 서아시아와 인도의 전통을 결합한 독특한 회화양식이 태동했다. 이 양식의 회화는 페르시아 회화와 달리 자연주의적인 관심이 강하고 표현도 역동적이고 색채도 화려했다. 또한 당시의 전통적 인도회화보다 공간구성이나 인물 표현이 훨씬 현실적이고 관심도 세속적이었다. 그려진 그림들은 대부분 책의 삽화였는데, 소재는 영웅의 일대기, 역사, 연애담, 시, 신화, 전설, 동화 등을 망라했다.

가장 초기작은 1560~70년에 그려진 〈투티나메〉와 〈함제나메〉이다. 특히 무하마드의 삼촌인 함자의 전설적인 모험담을 그린 〈함제나메〉는 무굴 회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큰 크기(65×40cm)에 무려 1,400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그중 200장가량이 남아 있을 뿐이다. 1590년대에는 유명한 〈악바르나메〉, 즉 악바르의 일대기가 그려졌다.

악바르의 아틀리에에서 일한 화가들의 이름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유명했던 화가로 다스반트와 바사반을 기억할 만하다.

무굴 회화는 악바르를 이은 자한기르, 샤 자한 치하에서도 발전이 이어졌다. 자한기르는 자신을 신격화한 초상화를 그리게 해 이런 종류의 그림들과 궁중 장면들이 많이 그려졌다. 유명한 타지마할을 세운 샤 자한은 그림보다는 건축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 양식은 눈에 띄게 경직되어 있고, 퇴조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무굴 제국의 쇠망과 함께 궁중미술로서의 무굴 회화도 끝을 맺게 되었다.

서인도의 라자스탄에는 무굴 왕조에 용맹스럽게 저항하다 끝내 악바르에 복속된 라지푸트족의 소왕국들이 분립해 있었다. 이 소왕국들에서는 16세기경부터 인도의 전통에 기초한 회화 양식이 발전하고 있었다(라지푸트 회화). 그 초기인 17세기까지 이 양식의 회화에서는 무굴 회화의 자연주의적 양식과는 대조적으로 추상성·평면성이 강한 양식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림의 소재는 힌두교의 신화와 전설이 대부분이다. 특히 크리슈나의 신화적 생애와 연애담을 내용으로 하는 〈바가바타 푸라나〉·〈기타고빈다〉가 가장 애호되었다. 크리슈나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들의 유행은 크리슈나에 귀의함으로써 구원을 얻기를 갈구하는 신앙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밖에 인도 전통음악의 음조인 여러 가지 라가(rāga)를 그림으로 옮긴 〈라가말라〉도 주요한 주제였다.

라자스탄 회화는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화풍으로 발전했다. 주요화파로는 메와르·분디·코타·비카네르 등을 들 수 있다. 초기에는 무굴 회화의 영향이 별로 보이지 않으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영향은 짙게 나타나고 그후 양자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지기에 이르렀다.

그림의 기법이나 소재 면에서 라자스탄 회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 잠무에서 가르활에 이르는 히말라야 산록지대에 발달한 파하리 양식이었다.

이 회화양식은 대체로 17세기 바솔리를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역시 〈기타고빈다〉·〈바가바타 푸라나〉의 이야기들이 애호된 소재였고, 양식은 색채와 구성, 감정 표현 등에서 라자스탄 회화보다 강렬함을 보여주었다. 18세기 중엽 바솔리에서는 회화가 점차 쇠퇴했고 파하리 회화의 중심도 캉그라로 옮겨지게 되었다.

캉그라 양식은 곡선적이고 색채가 온화하며 달콤한 서정성이 넘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양식은 19세기말까지 지속되었으며, 1775~1820년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19세기말 영국의 지배 아래 인도의 전통회화는 급격히 쇠퇴하고 서양 미술사조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발로서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20세기초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이끈 벵골 화파였다. 벵골 화파는 인도미술의 전통을 재발견하여 그것을 현대에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노력은 인도인, 그리고 미술가들로 하여금 인도 전통미술의 영광을 재인식하게 했고 이후 인도 현대미술의 발전에 중요한 방향을 설정해주었다.

인도의 장식미술

인도미술은 장식미술 분야에 있어서도 어느 문화에도 뒤지지 않는 높은 수준의 화려한 유산을 남겼다. 힌두 사원이나 자이나 사원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는 각종 석조 장식과 문양들은 정교하고 꼼꼼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인도의 미술을 지탱해온 무명의 장인미술가 집단의 전통이 이루어낸 것이었다.

소품으로는 상아장식을 들 수 있는데,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베그람에서 1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상아제품은 상아세공이 일찍부터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전통은 각 지역에서 근대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금속세공도 일찍부터 발달했으나 재료의 특성상 유물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금으로 된 장신구들이 이미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서 출토되었고, 콜하푸르에서 출토된 2세기경 제작된 청동 코끼리 소상 등도 놀랄 만한 초기의 예술적 수준을 보여준다.

인도의 섬유미술은 오늘날도 유명하지만 이미 고대부터 명성이 나 있었다. 그러나 인도의 다습한 기후 때문에 14세기 이전의 유품은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나 현재의 유품을 통해서도 인도의 섬유미술이 견직·사라사·날염·모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룩한 높은 수준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무굴 시대에 들어서는 옥공예가 크게 발달했다. 무굴 왕조에 의해 세워진 각종 건축물의 장식 또한 볼 만하다. 이 장식의 소재는 서아시아에 기원을 둔 아라베스크 문양, 아랍 문자의 도안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서아시아의 장식문양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2차원적인 문양에 입체적 조형성이 현저하게 부여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