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켈만

빙켈만

다른 표기 언어 Johann (Joachim) Winckelmann
요약 테이블
출생 1717. 12. 9, 프로이센 슈텐달
사망 1768. 6. 8, 트리에스테
국적 독일

요약 빙켈만은 고전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으며 예술에서 신고전주의운동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할레대학교와 예나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748년 뷔나우 백작의 사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 예술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리스 미학에 대한 철학적 정의를 내린 <그리스의 회화와 조각에 대한 의견>을 집필해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로마로 가 바티칸의 사서, 고대유물 책임자에 이어 알바니 추기경의 비서가 되었다.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 있는 후원자 덕분에 고전예술품들을 접하며 예술비평가이자 자문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저작을 통해 당대 지식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인 <고대 예술사>는 처음으로 고대 예술을 성장·성숙·쇠퇴의 유기체적 발전과정으로 정의한 개설서였다.

그의 저작은 대중들이 고전예술, 특히 고대 그리스 예술에 관심을 갖게 해주었으며 서구의 회화와 조각만이 아니라 문학과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에는 그리스어, 특히 호메로스의 글에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호메로스의 글을 알렉산더 포프의 영역본으로 처음 읽었다. 1738년 할레대학교에서 신학을, 1741~42년 예나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1748년 드레스덴 근처 뇌트니츠에서 뷔나우 백작의 사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 예술세계에 접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이후 사상에 바탕이 된 논문 〈그리스의 회화와 조각에 대한 의견 Gedanken über die Nachahmung der griechischen Werke in der Malerei und Bildhauerkunst〉(1755)을 썼다. "우리가 위대하게 되거나 적어도 독특한 그 무엇이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인을 흉내내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이 논문은 교육과 예술에서 그리스적 이상에 대한 선언문이 되었으며 곧 몇 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작센 왕실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나중에 추기경이 된 아킨토 밑으로 들어가 자신의 고향을 파리에 버금가는 문화 중심지였던 로마 시로 바꾸었다. 로마에서 그는 바티칸의 사서, 고대유물 책임자에 이어 엄청난 고전예술을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알바니 추기경의 비서가 되었다. 이러한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 있는 후원자 덕분에 그는 로마의 예술적 보물에 접할 수 있었고 예술비평가이자 유럽 귀족 방문객에 대한 자문가로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의 저작은 널리 읽혔으며 그는 당대 지식인의 존경을 받았다. 나중에 그의 흠모자였던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빙켈만은 아직 신세계를 발견하지는 않았지만 무엇이 올 것인지에 대한 징후에 의해 영감을 받는 콜럼버스와 같다. 그의 저작을 읽는 이는 새로운 것을 배우지는 못해도 새로운 사람이 된다."

그의 저서 〈고대 예술사 Geschichte der Kunst des Altertums〉(1764)는 처음으로 고대 예술을 성장·성숙·쇠퇴의 유기체적 발전과정으로 정의한 개설서였다(역사학). 그는 한 집단의 예술을 설명할 때 기후·자유로움·숙련도 등 문화적·기술적 요소를 고려했으며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정의하고자 했다.

이 저작에서 고대 예술의 시기구분이 시작되었는데, 그리스 예술사에 대한 통상 용어로 자리잡게 된 그의 시대구분에 따르면 먼저 BC 5세기의 위대한 그리스의 조각가 피디아스와 폴리클리토스의 고매한 혹은 장엄한 양식의 우아한 선(先)피디안(즉 아케익) 단계를 거쳐 조각가 프락시텔레스와 화가 아펠레스(둘 다 BC 4세기 그리스에서 활동)의 우아한 또는 아름다운 양식이 유행하며, 이어 그리스풍의 헬레니즘 양식과 로마 양식이 지배하는 모방기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예술작품 하나하나를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주의깊게 직접 관찰하여 묘사했기 때문이다.

라오콘, 아폴로 벨베데레, 니오비드, 벨베데레 토르소에 대한 그의 설명은 독일 문학사와 예술비평에서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독립된 학문으로서 예술사와 인문과학으로서 고고학 연구는 빙켈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관찰은 그리스 예술정신의 실체에 진정으로 접근한 것이었지만 사실상 거의 전적으로 후대의 헬레니즘 작품이나 그리스 명품의 로마 시대 모사품에 기초한 것이었다.

친구들은 그를 계속 그리스로 초청하여 다소 위험이 따르는 모험을 하도록 권유했지만 그는 그리스 방문이라는 야심을 이루기 얼마 전에 죽었다. 그리스 예술의 세계는 그리스 땅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항상 이상향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 이상향은 눈으로 보는 것이기보다는 마음으로 기리는 것이었다. 마음의 이상향으로서 그리스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빙켈만이 죽게 된 사정은 모호하며 동성연애자였던 듯한 그의 복잡한 성격에 대해 많은 추측이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오랜 체재 끝에 1768년 처음으로 드레스덴과 빈을 방문했다가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트리에스테에서 우연히 만나 사귀었던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그곳의 산주스토 대성당 묘지에 묻혔다.

어떤 비평가보다도 빙켈만의 천재성과 저작은 고전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으며 예술에서 신고전주의운동이 일어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빙켈만의 가장 중요한 두 저서는 〈그리스의 회화와 조각에 대한 의견〉·〈고대 예술사〉이다. 〈그리스의 회화와 조각에 대한 의견〉은 본질적으로 그리스 미학에 대한 철학적 정의로서, 자주 인용되는 빙켈만의 언명인 그리스 조각의 '고귀한 단순과 정숙한 장엄'에 대한 글이다. 이 저술에는 또 독일의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과 예술·문학·감정 사이의 관계에 대한 후대의 논쟁에 깊은 영향을 끼친 그리스 라오콘의 조각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다.

〈고대 예술사〉는 이미 낡은 책이 된 지 오래지만 예술사 연구의 기초와 그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책이다.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발견된 직후 이곳을 방문한 빙켈만은 '공개서한'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 아마추어 보물탐구자들의 잘못을 폭로하고 이들이 제대로 발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러한 일과 고대 보석의 분류목록 작성으로 그는 '근대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