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비평

예술비평

다른 표기 언어 criticism of the arts , 藝術批評

요약 예술작품의 미추·선악·장단점 등을 들추어내어 그 가치를 판단하는 일.

목차

접기
  1. 예술작품의 속성
  2. 예술작품의 정체와 기술
  3.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
  4.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
  5. 주의와 이념이 미학적 비평에 미치는 영향
  6. 역사와 전기가 미학적 비평에 미치는 영향

문학·음악·시각예술 또는 그밖의 예술에 대한 비평은 일반적으로 미학적비평이라고 불리는 예술작품 자체의 예술성에 대한 비평과 외재적 요인의 영향 아래 이루어지는 비평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미학적 비평을 '내재적 비평'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외재적 비평'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미학적 비평이 ① 비평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의 속성 및 정체, ② 예술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기술·해석·판단 등의 문제를 논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면, 비평에 대한 외재적 요인의 영향과 관련해서는 주의와 이념, 역사와 전기 등의 개념을 논의 대상으로 삼는다.

예술작품의 속성

모든 예술비평은 어떤 특정한 작품에 대해 '기술'하고 '평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평가 본연의 기능이 오로지 예술작품의 가치를 감정하거나 판단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작품에 대한 적절한 기술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어떤 종류의 평가도 불가능할 것이다.

사실상 무언가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하기란 지극히 어려우며, 특히 복잡하거나 낯선 예술작품과 전통에 대해 기술하려고 할 때 어려움은 가중된다. 이런 까닭에 어떤 비평가들은 주로 기술에만 자신의 주의를 집중하기도 한다. 아울러 예술작품에 대해 기술하고 평가하는 모든 예술 비평가들의 1차적 관심사는 '작품 자체의 예술성'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도덕적·정치적·종교적·이념적 문제 또는 그밖의 문제에 좀더 흥미를 느끼더라도 이 점은 변할 수 없다.

하나의 예로, 예술작품에 대한 도덕적 비평을 수행하는 경우, 비평가는 주어진 작품의 예술적 속성과 특질이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나서, 도덕적 기준에 따라 작품을 검토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정치적 기준 또는 그밖의 다른 기준을 적용할 때에도 우선 '검토 대상이 예술작품인 이유는 무엇인가'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미리 확정한 후에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술비평은 근본적으로 미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기술이나 평가의 객관성과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고 예술작품의 미학적 측면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과연 작품에 대한 타당한 접근 방법인가 하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지만 주어진 예술작품을 어떤 준거에 의해서든 감식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그 작품에 대한 개별적인 미학적 기술이 선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핵심 사항으로 결코 논쟁의 소재가 될 수 없다. 정체가 무엇인가를 규정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다면 판단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무엇을 예술작품의 속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논쟁도 제기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론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예술작품에 대한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다시 말해, 미리 상정한 무언가의 속성을 대상이 보여주지 않는다면, 주어진 대상에 대한 성실한 기술은 불가능하다. 무엇을 예술작품 자체의 속성으로 이해해야 옳은가에 대한 논쟁이 종종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요컨대 예술작품에 대한 기술조차도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예술작품의 정체와 기술

예술비평에서 개념상 핵심이 되는 문제는 '무엇을 예술작품이라고 할 것인가'와 '예술작품의 속성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로 요약될 수 있다. 이들 문제와 관련하여 원칙적으로 두종류의 어려움이 거론될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술작품의 정체를 밝히는 일에 관련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특성을 드러내는 일에 관련된 것이다.

먼저 앞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동일한 악보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연주하거나, 다른 종류의 악기나 작곡할 당시에 사용되었던 악기와 형태가 달라진 악기를 사용하여 악보를 연주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게 한다면 각 연주는 거의 예외 없이 서로 다른 특성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악보에 의거하여 연주된 이상, 이들 모두는 일반적으로 동일한 음악으로 간주된다.

어떤 비평가는 모든 개별적인 연주는 일종의 '이상적인 연주'와 양립되는 것이어야 하며, 제대로 된 연주라면 모두 연주의 기초가 된 악보와 상응관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상적인 연주와는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연주 내용이 서로 다른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연주는 여전히 동일한 작품에 대한 연주로 인정될 수도 있다. 기호 체계에 의존하여 창작되는 모든 예술작품에 대해 동일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시의 판본이 여럿 존재하는 경우 이들 모두는 동일한 시의 구체적 실례들로 간주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주장을 우리는 연극·무용·영화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또한 청사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감에 따라 건축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상에서 제기한 문제로 인해, 비평의 객관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비평 대상을 확실히 밝힐 것이 요구된다. 즉 특정한 작품들에 대한 기술이나 평가를 시도할 때, 동일한 작품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판본이나 변형본을 다루고 있는지, 아니면 서로 다른 여러 편의 작품을 다루고 있는지를 명백히 밝혀야 한다. 예술작품의 정체는 치밀한 분석을 통해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표기법상의 자료나 문화적 배경을 검토함으로써 서로 다른 민요가 동일한 노래의 변형이라는 점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비평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품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작품에 대해 기술하고 그 가치를 판단하는 일이다.

물론 여기에도 어려움은 있는데, 작품에 대한 기술과 개인의 판단을 엄격하게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하나의 예로 주어진 작품의 중심 이미지를 완전히 서로 다른 방향에서 파악하는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안톤 체호프의 연극 대본 중 몇 편이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작가의 견해와 연출가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의 견해 중 어느 쪽을 따르는가에 따라 희극으로도 이해될 수 있고 비극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작품의 주제에 대한 비평가들의 기술이 상충되는 경우, 그들의 기술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일 수 없다. 따라서 대상 작품에 대한 별도의 관찰을 통하여 그들의 기술이 맞는 것인지 또는 틀린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하며, 누군가의 기술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면 그의 기술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보는 시각에 따라 동전을 원으로 기술할 수도 있고 타원으로 기술할 수도 있듯이 상충되는 비평적 진술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단순히 외관상의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동전과 같은 물리적 대상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규범을 상기시키기만 하면 된다. 즉 '정상적인 상황에서' 볼 때 견해 차이는 해소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비평의 경우에는 상충되는 견해상의 차이를 해소하는 데 필요한 공통의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

예술작품의 정체와 기술의 문제는 예술 작품에 대한 기술과 해석을 구분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원칙론에 의거해 양자의 개념을 정의한다면, '기술'이란 작품이 지닌 속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업을 가리키며, '해석'이란 비평가 개인이 느끼는 문제의식에 따라 작품을 설명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정의할 경우, 기술에서는 진술의 진위가 문제되며, 해석에서는 진술의 개연성이 문제될 것이다. 즉 기술과 관련해서는 주어진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기술이 옳은 것인가 틀린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면, 해석과 관련해서는 비평가의 해석이 그럴 듯한 것인가 엉뚱한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로 서로 모순되는 여러 종류의 해석이 있다고 하자. 이들 해석은 나름대로 모두 그럴 듯한 것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모두 다 옳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예술작품에 대해 해석을 하는 경우 비평가는 작품 자체의 속성이라고 할 수 없는 특질을 작품과 연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기술에서는 작품 자체의 속성이 문제시되므로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양단간의 판단이 문제시된다.

여기에서 어떤 비평가가 분석이나 비교, 역사적 혹은 문헌학적 해명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예술작품에 대한 기술을 시도하고 있다고 가정해보기로 하자. 그의 기술적 비평을 읽을 만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그는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 작품에 대한 해석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사실상 위대한 시·극·소설에 대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평문을 살펴보면, 비평가들이 명백히 작품에 대한 기술을 시도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경주되고 있는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간혹 해석이란 단순히 기술작업을 통해 작품의 속성을 파헤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처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의 주장은 쉽게 뒤엎을 수 있다. 요컨대 해석에는 기술이 포함되지만 기술이 해석의 전부일 수는 없다.

한편 예술작품의 본질과 관련하여 다음의 논리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모든 비평적 해석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즉 예술작품과 그 예술작품을 물리적으로 구체화한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일반 사물의 세계에서는 서로 다른 물리적 속성을 지닌 사물들은 동일한 대상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술의 세계에서는 서로 다른 물리적 속성을 드러내는 경우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결정적인 미감적 차이를 드러내는 경우들도 동일 예술작품에 대한 개별적인 구체화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논리는 문학·연극·음악, 그리고 경우에 따라 무용이나 건축, 말하자면 작품의 고유한 정체가 기호 체계에 의존하여 결정되는 모든 예술에 적용된다.

시각예술의 경우 다소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동판화와 같이 동일 작품에 대한 판본이 여럿 존재하는 경우 이상의 논리는 무난하게 적용될 수 있다. 예술작품은 명백히 물리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관계없이 각각의 양식에 따라 자체의 독자성을 가진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술작품이란 의도적인 조직화를 거친 대상이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즉 예술작품은 그 내면에 예술가의 의도를 조직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비평이란 이 조직적인 의도를 규명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 비평가에게는 단순히 작품 본래의 속성을 찾아내는 작업을 뛰어넘어 모종의 의도를 작품에 귀속시킬 것이 요구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 아래 비평은 자연스럽게 기술에서 해석으로 넘어가게 된다. 결국 예술의 본질 자체가 비평가를 해석으로 유도하는 가운데, 비평가로 하여금 해석을 합법적이고, 심지어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유도한다.

예술작품과 일반적인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좀더 결정적인 차이점을 들자면, 예술작품이란 무언가를 '표현', '상징' 또는 '표상'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술작품에는 무언가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미학). 그러나 이들 특질을 실제로 예술작품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비평가 자신이 작품에 부여한 것인지, 선뜻 판단을 내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예술가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비평가들은 자신들은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즉 자신들이 하는 일이란 작품 속에 이미 존재하는 특질을 찾아 밝혀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의 표현적·상징적·표상적 특성이나 의미가 실제로 작품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이상, 비평은 기술의 영역을 넘어서서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비평가들은 자신이 의도하는 것이 기술이라고는 하지만 동일한 작품에 대해 상충되는 견해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청동으로 된 조각 작품과 같이 예술작품의 고유한 정체가 그 작품의 물리적인 속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경우에도,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술은 다만 물리적 속성과 관련하여 의미를 지닐 뿐이다. 말하자면 예술작품 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논의하는 데 기술은 여전히 적절하지 못한 것이 된다.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자면, 누군가가 어떤 그림의 선(線)을 보고 '해학적'이라고 했을 때, 이는 선에 대한 기술에 해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해석에 해당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이 무엇이든지간에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비평적 해석도 무언가 최소한의 제약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비평적 해석이 주어진 작품에 대한 올바른 기술로 인정된 것과 관계없는 전혀 엉뚱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해석은 비평적 기술 중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어느 선까지의 비평적 기술을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즉 대립되는 수많은 비평관행 중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다양한 비평규범을 놓고 평가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빠지지 않은 채, 실용적 차원에서 비평관행의 기준을 확립할 수도 있다.

우선 자체의 정전(canon)을 공식화하되, 이를 비평 공동체의 성원 모두가 사용하게끔 한다. 나아가서 정전은 문제된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정전의 유연성을 확보하여 이를 확립할 당시에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던 작품이나 새로 산출된 작품을 검토하는 데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한다. 이러한 기준을 따르는 경우, 몇몇 비평적 접근방법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주어진 작품에 대한 몇 가지 상충되는 해석을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평관행을 고도로 한정된 몇몇 절차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쉽게 정당화될 수 없다. 말하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접근방법들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유용성을 지니고 있거니와, 그 정당성을 즉석에서 거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해석은 진술의 옳고그름을 떠나 개연성을 문제삼는 작업이기 때문에 예술작품에 대한 다원적인 접근방법은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상 주어진 예술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개연성을 지닌 것이라면 가능한 한 모든 접근방법을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다양한 비평 학파는 나름대로 어떤 특정한 예술 양식이나 양식상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다양한 비평관행을 검토하는 일은 곧 최상의 비평원리와 조화를 이루는 비평관행 이외의 모든 관행의 부적격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

'무엇을 예술작품이라고 할 것인가'의 문제나 기술 및 해석의 문제 이외에도 작품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예술비평에서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평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먼저 다음과 같은 점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술작품에 대한 가치판단이 다른 종류의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과 크게 달라야 한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일찍이 이마누엘 칸트는 미학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논리적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그는 개인의 '취향'에 관심을 가졌고, 아울러 전문적인 비평과 감식안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칸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미학적 판단에서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에서도 취향은 여전히 문제가 된다.

가치의 본질과 관련하여 적어도 2가지의 근본적인 문제가 비평이론에 대한 논의에서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한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 좋아하거나 싫어함을 표현하는 일과 가치를 판단하는 일은 조심스레 구분되어야 한다. 이어서 주된 종류의 가치판단은 그 유형에 따라서 분류되어야 한다.

예술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감식 및 판단과 관련하여 야기되는 논쟁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가치판단이란 주어진 대상에 대해 무언가를 서술하는 가운데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서술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가치판단 그 자체와는 무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주어진 서술 내용이 전제된 이론에 근거하여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해석될 따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결핵에 걸렸다'는 판단이 주어졌다고 하자. 만일 건강상태를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면, 위의 판단은 일종의 가치판단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결핵이 건강상태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아니라 순전히 생물학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면, 위의 판단은 '가치판단'이 아닌 '사실판단'이 된다. 사실판단에서는 판단의 옳고 그름이 문제되는 반면, 가치판단에서는 정해진 규범이나 작품의 작품다움을 평가하는 기준이 문제된다. 또한 위의 예에서 보듯이,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이 함께 제시될 수도 있다.

무언가에 대한 가치판단을 할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취향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규범에 따라 판단함으로써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물론 전적으로 자신의 취향에 의존하여 대상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인적인 취향에 의존하는 가치판단과 그렇지 않은 가치판단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을 수 없다. 취향에 의존하여 이루어지는 가치판단을 '감상적 판단'이라고 한다면, 규범에 따라 내리는 가치판단은 '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발견과 사실판단은 전자가 정해진 규범이나 기준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서 서로 구분되기도 하나, 양자는 동일한 것으로 취급될 수도 있다.

원칙적으로 예술작품의 작품다움에 대한 규범적 판단은 사실에 대한 판단과 마찬가지로 엄밀하게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객관성과 검증 가능성을 문제삼을 수 없는 이상, 논리적으로 보아 발견은 곧 사실에 대한 판단과 다름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발견의 논리적 측면은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가치의 상대성이나 다양성의 문제는 우리의 논의 영역 바깥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움이나 유행에 대한 가치판단은 사회를 지배하는 주도적 취향에 따라 좌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발견이라는 이름에 값할 수 있는 가치판단은 개인적인 취향이 아닌 정해진 규범(물론 규범이 취향과 일치하는 수도 있지만)에 의거하여 내려지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감상적 판단은 전적으로 한 개인의 취향에 따라 내려지게 된다. "취향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논쟁도 불가능하다"는 유명한 격언은 다만 감상적 판단과 관계되는 것일 뿐이며, 발견에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

가치판단을 이와 같이 감상적 판단과 발견으로 나누어놓는 경우, 예술작품의 작품다움에 대한 순리적인 논쟁을 펼 수 있게 된다.

우선 비평 전통이나 규범이 확립되어 있다면, 비평적 발견은 그러한 전통과 관련하여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바꾸어 말해, 비평적 발견을 통해 우리는 어떤 작품이 작품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이 경우 판단은 사실에 대한 판단과 마찬가지로 관련된 준거나 증거에 주목함으로써 내릴 수 있다(물론 전통이나 규범 자체에 대한 반론도 가능하나, 이는 별개의 문제임). 그러나 개인이 갖고 있는 좋고 싫음의 감정에 따라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감상적 판단은 객관적인 준거나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

즉 감상적 판단은 개개인이 지닌 천차만별의 취향에 의존하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올바른 판단이라거나 틀린 판단이라는 식의 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감상적 판단을 비평적 발견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감상적 판단이 발견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모순된 판단들이 모두 올바른 것이어야 하나 이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요컨대 발견의 경우 뒷받침이 되는 이유가 공적으로 설득력 있는 것이어야 하는 반면, 감상적 판단의 경우 뒷받침이 되는 이유는 제한된 비평적 계층에만 해당되거나 설득력있는 것이면 된다. 그 계층의 사람들은 감상적 판단의 일관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유들이 옳다는 점을 입증할 수도 있으나, 취향의 차이 때문에 발견의 경우와 달리 감상적 판단의 경우 판단을 반드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모순되는 기술이 용인될 수 없듯이 서로 모순되는 발견도 용인될 수 없다.

그러나 감상적 판단들은 서로 모순된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판단을 가능하게 한 취향이나 비공식적인 정전과 일관성을 갖는 것인 이상 용인될 수 있다. 한편 학문적 전통의 맥락에서 미에 대한 판단은 발견이 될 수 있으나, 개인적 취향의 맥락에서는 미에 대한 판단이 감상적 판단을 유도할 따름이다. 한 예로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경우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취향에 따라 이러한 판단을 내린 경우 이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개인적 이유를 제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것이 학문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가치 전통에 의거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따라서 그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부정하기 위한 증거가 제시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취향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논쟁도 불가능하다'는 교훈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발견과 관련해서는 합리적인 논쟁이 가능하나 감상적 판단이나 취향에 따른 판단과 관련해서는 합리적인 논쟁이 불가능하다"고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발견과 감상적 판단 사이에 서술상의 근본적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무엇이 아름답다고 서술할 때 여기에서 암시되는 판단은 발견과 감상적 판단 어느 쪽에나 속할 수 있다. 다만 어떤 조건 아래 그런 판단을 했는가가 문제 해결의 관건이 될 뿐이다.

가치 및 가치판단에 대한 이제까지의 논의와는 별도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즉 가치는 과연 실제 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특정 사회의 이해관계를 표현한 것일 뿐인가? 만일 '실제로' 또한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가치를 입증해보일 수 있다면, 감상적 판단에 대한 논의 자체는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비평가는 다만 발견에만 관심을 가지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실제로 존재하는 가치와 조화를 이루는 판단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어떤 종류의 가치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는 입증되지 않았으며, 비평가들이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체계적으로 드러내는 감상적 판단에 주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가치판단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끝으로 비평가의 판단은 가치와 관계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가치와 관계되는 판단일 경우, 발견은 감상적 판단과 구분되어야 한다. 아울러 가치와 관계없는 판단일 경우, 기술은 해석과 구분되어야 한다. 한편 감상적 판단과 해석은 발견이나 기술과는 달리 자체의 진리치를 입증할 것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비평가는 논리적으로 약한 판단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비평적 정전을 적용하는 데 엄밀성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엄밀한 비평 행위는 논리적으로 약한 판단까지 감수할 수 있는 인내력을 요구한다.

주의와 이념이 미학적 비평에 미치는 영향

실제의 비평 작업과 관련하여 사람들은 미학적 비평에 내적으로 관련되는 고려사항과 외적으로 관련되는 고려사항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비평적 시야를 어떻게 잡아야 적정한 것이 되는가 하는 문제나, 비평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논쟁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모든 비평 학파들은 외적 고려사항과 내적 고려사항 모두를 비슷한 정도로 문제삼고 있다.

하나의 예로 루카치나 크리스토퍼 코드웰 같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은 그들 철학의 사회 경제학적 측면을 비평에 도입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으로 분석하기 위해, 또한 예술가의 생애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역동적인 사회 변혁의 맥락 안에서 작품의 역할을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명백히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을 구분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양자 사이의 구분은 개념적인 것으로서, 이념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 〈오레스테이아 Oresteia〉는 새롭게 대두되는 정치적 정의의 개념을 이상화시켜 제시하고 있다고 일컬어진다. 이런 종류의 외재적 해석은 다름아닌 작품에 대한 미학적 비평, 또는 미학적 비평의 원리를 위반하지 않는 내재적 해석을 미리 상정한 후에 제시된 것이다.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비평 작업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위에서 보인 비평적 언급은 예술비평으로서의 가치를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외재적 비평과 내재적 비평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원칙은 어떤 종류의 주의를 답습하는 비평적 접근방법에도 항상 적용된다.

어쩔 수 없이 다원적인 비평적 시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서 볼 경우,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이 날카롭게 대립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 된다. 어떤 특정한 접근방법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이견을 보일는지 모르지만, 특정한 하나의 접근 방법만을 유일하게 정당한 것이라고 옹호하기란 어렵다. 이 점과 관련하여 어떤 특정한 접근 방법을 선호한다는 자체가 감상적 판단일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인간 사회를 관찰하기 위한 이론은 옳고 그름의 논리에 따라 획일적으로 저울질될 수는 없다. 주어진 작품에 대한 비평을 시도할 때 비평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만 작품 이해에 가장 적절한 이론일 따름이지, 옳고 그름의 논리에 따라 진리치가 판명된 이론은 아니다. 즉 예술가나 청중의 상상력에 무언가 유익한 자극을 줄 수 있는 한 어떤 종류의 주의나 이념도 나름대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주의나 이념이 얼마만큼 개연성을 지닌 것인가, 또한 얼마만큼 주어진 작품에 일관성있고 포괄적인 내적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인가,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것인가일 따름이다. 예를 들면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읽을 때, 아이스킬로스가 반드시 유사한 사회학적 신념을 지녔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할 필요는 없다.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어떤 비평가가 형식주의적 접근방법으로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을 해석할 때, 그의 해석의 옳고 그름은 형식주의 자체의 옳고 그름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역사와 전기가 미학적 비평에 미치는 영향

예술비평의 영역에서 역사적 요소와 전기적 요소를 문제삼는 경우, 어느 쪽을 중시하는가에 따라 2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역사적 요소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예술작품의 의미란 그 작품이 생산된 문화적 맥락 안에서 당대 사람들이 비평적으로 수용했던 의미와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 전기적 요소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의미란 예술가의 의도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 요소와 전기적 요소는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만일 예술가의 의도란 예술가 자신이 밝힌 사적 의도를 통해서가 아닌 작품을 지배하는 인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입장에 서게 되면, 양자 사이의 구분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오직 하나의 단일한 해석만을 작품에 부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예술가가 의도적으로 기존의 사회적 인습과 거리를 두는 복잡한 사회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비평을 통해 다양한 여러 가지 해석 중 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버릴 수 있다는 데 역사적 비평의 장점이 있다는 식의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즉 문제를 역사적 맥락 안에 국한시켜 해결하려고 해도, 그럴 듯한 해석이 여럿 존재하기 때문에 비평가들은 끊임없이 곤혹스러운 상태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품이 생산되고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제시된 해석도 역사적 비평의 산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또한 어떤 예술작품은 여러 세대에 걸쳐, 심지어 여러 시대에 걸쳐 비평가들과 청중의 주목을 끌기도 하는데, 이경우 역사적 또는 전기적 기원은 별로 중요한 문제거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요컨대 치밀하고 정확한 역사적 비평이 지니는 힘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비평가나 청중의 작품에 대한 수용 태도를 무시하는 비평은 바람직한 것이 될 수 없다.

이는 부당하게 또한 자의적으로 비평의 시야를 좁히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비평과 관련하여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면, 예술작품에 대해 역사적으로 잘못 이해하거나 부정확하게 이해하는 것과 역사적으로 변화한 작품의 의의를 파악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한 예로, 〈햄릿 Hamlet〉에 대한 그릇된 역사적 이해는 단순히 잘못된 것이지만, 이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프로이트적 체계를 몰랐다고 해서 그의 작품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역사적 비평과 동일한 뿌리에서 유래된 유형의 비평으로 전기적 비평을 들 수 있는데, 이를 옹호하는 비평가들은 대체로 대화, 서한문, 또는 그밖의 자료를 통해 예술가의 의도를 파악한 후 이를 통해 예술작품에 대한 비평을 시도한다.

그러나 예술가의 의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를 찾기란 쉽지 않으며, 설사 그런 경우가 있다손치더라도 그 내용이 막연하거나 모호한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작품의 진가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런 이유로 작가의 의도를 작품 이해와 결부시키는 비평 태도를 단호히 배격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신비평'이라는 비평 방법론으로 널리 알려진 일군의 미국 비평가들이 그 좋은 예가 되는데, 이들은 예술가의 의도에 관심을 보임으로써 비평가가 작품에 대해 지녀야 할 적절한 미학적 거리를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의도적 비평 역시 선택 가능한 다양한 비평 유형 가운데 하나이며, 비록 이를 옹호하는 비평가들의 논리가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이들의 방법론 자체를 무시해버릴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