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링거 왕조 미술

카롤링거 왕조 미술

다른 표기 언어 Carolingian art

요약 중세 샤를마뉴(카를) 대제의 재위 기간(768~814)에 형성되어 9세기 후반까지 계속된 고전적 양식.

서유럽에 로마 제국을 부흥시키려는 샤를마뉴의 이상은 그의 정치적 목표와 예술사업 모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미술을 강력하게 후원했는데 초기 그리스도교의 원형들을 모사할 때 고대 로마의 고전주의를 상당히 되살려놓았으며 동시대의 비잔티움 양식과 그리스 로마 양식의 영향을 촉진시켰다. 그런데 이 고전주의는 선적 표현과 유형화를 선호하는 그 지방의 전통들과 카롤링거 왕조의 혁신들로 말미암아 일부 수정되었다.

그러므로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는 사실상 고전주의의 부활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혁신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서유럽에 고대의 유산을 복원하고 그에 대한 관심을 후대 미술에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샤를마뉴가 죽을 무렵 이 양식은 뚜렷해졌으며, 제국의 중앙집권력이 약화됨에 따라 지방의 유파들은 더욱 독립적으로 되었지만 9세기 후반의 혼란기까지 발전을 계속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를 복원할 때 사용한 T자 모양의 설계는 고대 로마 건축의 영향을 보여준다. 풀다의 수사들은 성베드로 대성당을 이 지방에 복원하기 위해 로마에 가서 그것을 직접 측정했다. 비잔티움 건축 양식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예를 들면 라벤나에 있는 산 비탈레 성당의 8각형 설계(526경~547경)는 샤를마뉴 대제가 아헨에 있는 그의 궁정에 세운 팔라티노 예배당(805 헌당)의 원형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특별한 필요에 따라 생겨난 카롤링거 왕조의 독창적인 특징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네이브[身廊]로 들어가기 위한 안쪽 공간과 밖에는 탑들이 있는 서쪽의 성채 같은 구조, 동쪽 앱스[後陣 : 교회의 한쪽 끝에 있는 돌출부]의 위와 아래로 넓은 예배당이나 외부의 지하실 구조 등이 있다. 서쪽 구조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하실 구조는 성인들에 대한 공경이 늘면서 이를 위한 예배 장소와 성인들의 유품 근처에 유골을 매장하기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투르·메츠·코르비에 있는 필사본 제작소들도 황제의 후원을 받았지만, 필사본을 베끼고 장식하는 필사실과 황제의 청동 주물공장은 아헨에 있었다. 필사본의 채색(→ 아다 사본집)과 상아·금속 제품의 부조상들은 고전적인 모티프와 원형을 베끼는 데 관심을 나타냈는데, 예를 들면 위트레흐트 시편에 삽입된 풍경들(830경, 위트레흐트국립대학 도서관)은 고대 로마의 대저택을 장식했던 벽화들을 생각나게 한다. 모자이크와 벽화도 제작되었지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