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키오

베로키오

다른 표기 언어 Andrea del Verrocchio 동의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요약 테이블
출생 1435, 피렌체
사망 1488, 베네치아
국적 이탈리아

요약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으로서 그의 작품 가운데 1496년 베네치아에 세워진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의 기마상이 특히 유명하다. 금세공인으로 추정되는 줄리아노 베로키에게서 금세공을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베로키오라는 이름은 스승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 베로키오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은 그의 생애중 마지막 20년 동안 만들어졌다. 그는 주로 피렌체의 주요한 미술 후원가인 피에로 데 메디치와 그의 아들 로렌초의 도움으로 유명해졌는데, 메디치가를 위해 그림과 조각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메디치가의 축제와 마상시합, 공식 연회 등을 위해 의상과 장식 갑옷도 설계했다. 또한 메디치가의 궁전에 있는 고미술품들을 관리하면서 고대 로마의 조각품들, 특히 인물의 흉상을 많이 복원했다. 베로키오의 명성은 15세기 후반에 널리 퍼졌으며, 많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유명한 미술가들이 그의 피렌체 공방에서 그림과 조각을 공부했다.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페루지노였으며, 페루지노는 라파엘로의 스승이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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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
  3. 메디치가의 후원
  4. 그림과 조각

개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으로서 그의 작품 가운데 1496년 베네치아에 세워진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의 기마상이 특히 유명하다.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Bartolomeo Colleoni)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Bartolomeo Colleoni)

초기

그에 대한 정확한 전기(傳記)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아버지 미켈레 디 프란체스코 초니는 벽돌과 타일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다가 나중에 세금징수원이 된 사람이었다. 집안의 경제사정은 좋은 편이 아니었고 베로키오는 여러 명의 형제를 부양해야만 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훗날 남동생 톰마소의 딸들을 교육시키고 그들의 혼인지참금을 마련해 주었다. 처음에 그는 금세공을 배웠다. 그를 가르친 장인(匠人)은 금세공인으로 추정되는 줄리아노 베로키였다고 예로부터 기록되고 있는데, 베로키오라는 이름은 스승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

또 한 전기에는 그가 초기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이탈리아 조각가인 도나텔로 밑에서 도제살이를 했다고 씌어 있는데, 베로키오의 초기 조각 양식이 도나텔로보다는 오히려 안토니오 로셀리노의 작품에 더 가까운 것을 볼 때 이러한 관계 설정은 미심쩍은 것 같다. 그가 처음 그림을 배운 것은 1460년대 중반으로 추측된다. 그는 피렌체파 미술가인 알레소 발도비네티의 제자였다고 전해지지만, 피렌체 근처의 프라토 시에서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인 프라 필리포 리피가 대성당의 벽화장식을 의뢰받아 일할 때 그의 밑에서 산드로 보티첼리와 함께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메디치가의 후원

베로키오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은 그의 생애중 마지막 20년 동안 만들어졌다.

그는 주로 피렌체의 주요한 미술 후원가인 피에로 데 메디치와 그의 아들 로렌초의 도움으로 유명해졌는데, 1466년 메디치가의 총애를 받아온 도나텔로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다. 그는 메디치가를 위해 그림과 조각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메디치가의 축제와 마상시합, 공식 연회 등을 위해 의상과 장식 갑옷도 설계했다. 또한 메디치가의 궁전에 있는 고미술품들을 관리하면서 고대 로마의 조각품들, 특히 인물의 흉상을 많이 복원했다.

베로키오는 피렌체 외의 다른 곳에 있는 후원자들을 위해서는 거의 작품을 만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로마에서 교황 식스투스 4세를 비롯해 여러 후원자들을 위해 작품을 만든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1480년대초에 베네치아로 이주하기 전까지 피렌체를 떠난 적이 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가 베네치아에 있을 때도 피렌체에 있는 그의 공방은 그가 총애하던 제자인 로렌초 디 크레디가 유지·관리했다. 디 크레디는 또한 베로키오의 재산 관리인이자 주요상속인이었다.

베로키오의 명성은 15세기 후반에 널리 퍼졌으며, 많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유명한 미술가들이 그의 피렌체 공방에서 그림과 조각을 공부했다.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페루지노였으며, 페루지노는 라파엘로의 스승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자 벽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한때 베로키오와 절친한 사이였다. 15세기 후반 피렌체 출신의 뛰어난 화가인 산드로 보티첼리와 시에나 출신의 유명한 미술가인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는 유명한 피렌체파 조각가인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와 안드레아 산소비노 등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발전 단계에서 베로키오의 미술에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림과 조각

기록에 따르면, 베로키오가 그린 것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림은 피스토이아 대성당의 도나토데메디치 예배당에 있는 제단화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Child with Saints〉인데, 베로키오 자신이 이 작품을 완성하지는 않았다.

이 그림은 주로 그의 제자인 로렌초 디 크레디가 그렸으며, 그 기법은 1550년 르네상스 시대의 전기작가인 조르조 바사리(1511~74)가 〈저명한 이탈리아 화가·조각가·건축가들의 생애…… Vite de'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ori italiani……〉에서 처음 언급한 이래로 지금까지 베로키오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1474/75경,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기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세례
그리스도의 세례

그러나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두 천사 중 하나와 원경(遠景)의 일부는 그의 도제인 젊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것이 틀림없다. 그밖에 베로키오의 것으로 여겨지는 그림으로는 베를린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박물관에 있는 성모상과 런던의 국립미술관에 있는 〈토비아와 천사 Tobias and the Angel〉 및 아르자노의 제단화(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경배하는 성 히에로니무스와 성 안토니우스) 등이 있다.

14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주로 조각에 전념해 강한 신념과 창조력을 보여 주었다.

베로키오의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거나 실제로 현존하는 조각품들은 거의 없다. 그의 동생인 톰마소에 따르면, 베로키오는 1464년에 피렌체의 산로렌초 교회에, 죽은 코시모 데 메디치의 묘지를 가리키는 상감무늬의 묘석을 만들었다고 한다. 1468년에는 피렌체에 있는 시뇨리아 궁을 위해 청동 촛대(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 뒤이어 처음으로 중요한 일을 의뢰받아 산로렌초 교회의 구(舊) 성구보관실에 있는 피에로 데 메디치와 조반니 데 메디치의 무덤을 장식했다. 1472년에 완성되어 아치 길에 세워진 이 석관은 호화로운 청동 장식과 더불어 유색 대리석과 반암을 창조적으로 사용한 것과 독창적인 구조가 인상적이다.

현존하는 베로키오의 조각 가운데 첫번째 작품은 작은 청동상 〈다비드 David〉(피렌체의 바르젤로)인데, 이 작품은 1476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번째 청동상인〈푸토와 돌고래 Putto with Dolphin〉는 일정한 자세를 사방에서 보아 동등한 비중으로 다룰 수 있게 해준 나선형 구조 때문에 르네상스 조각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것은 원래 피렌체 근처의 카레지에 있는 메디치가의 별장의 분수에 놓으려고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서 푸토는 때때로 큐피드라고도 하는데 팔·다리의 돌출부가 정확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처음에는 흐르는 물의 압력이나 물의 분사로 회전할 수 있도록 분수 위에 놓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중반에 그것은 피렌체에 있는 베키오 궁의 안뜰에 만들어 놓은 분수의 꼭대기에 다시 놓여졌다. 원래의 작품은 현재 베키오 궁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분수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모사품이다.

베로키오는 15세기의 뛰어난 부조 조각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은 토스카나의 고위 성직자인 니콜로 포르테구에리 추기경의 기념비(피스토이아 대성당)였음이 틀림없다. 이 기념비는 1476년에 주문을 받았으나 베로키오가 죽을 때까지도 완성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가 로렌초 디 크레디와 로렌체티 및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한 조각가의 손을 차례로 거쳐 완성되었다.

그 작품은 중간에 일련의 변화를 거쳐 베로키오의 원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았지만, 베로키오의 가장 중요한 부조는 어느 정도 남아 있다. 이 부조작품에서는 인물들을 원근법을 이용해 극적으로 통일된 구도로 배열함으로써 17세기의 바로크 조각가들이 벽에 새긴 동적인 구도의 부조가 자아내는 드라마틱한 효과를 예고하고 있다.

또다른 부조는 1478(또는 1479)년에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피렌체 대성당의 세례당에 있는 은으로 만든 제단을 확장하기로 결정하면서 추가된 4개의 장면 중 베로키오에게 맡겨진 한 장면이다. 〈참수당하는 세례 요한 Beheading of St. John the Baptist〉(피렌체의 오페라델두오모 박물관)을 묘사한 이 작품은 1480년에 성당측에 전달되었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누오바 병원에서 나온 테라코타로 만든 부조 성모상(피렌체 바르젤로)은 1477(또는 1478)년경에 만들어졌다.

1470년대 후반에 베로키오는 2점의 인물상을 만들었다.

테라코타로 만든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흉상(워싱턴 국립미술관)은 정확한 사실적 묘사가 두드러진 반면에, 〈달맞이꽃을 든 여인 Lady with Primroses〉(피렌체 바르젤로)으로 알려진 대리석 흉상은 개인의 이상화가 특징이다. 후자는 새로운 유형의 르네상스 흉상으로, 고대 로마의 흉상처럼 모델의 팔까지 포함되어 있어, 얼굴뿐만 아니라 두 손도 모델의 성격과 분위기를 나타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아마 베로키오가 피렌체에서 만든 것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은 피렌체에 있는 오르산미켈레 교회 동쪽 외벽의 한 벽감에 만들어놓은 〈예수와 성 토마스〉라는 청동군상일 것이다.

이 작품은 1467~83년에 만들어졌으며, 기법의 탁월함과 매우 지적인 구도 감각, 주제가 가지고 있는 미묘한 감정의 본질에 대한 이해 등으로 두드러진다.

1483년 베로키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고용된 용병대장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의 기념상을 맡았는데, 이것은 그의 2번째 주요 청동상이었다. 베로키오가 죽을 때까지도 그 작품은 모형으로만 남아 있다가 베네치아의 조각가인 알레산드로 레오파르디가 그 모형을 주조하여 돋을무늬를 새기고 광택을 내는 등 마무리했다.

그것은 1496년 베네치아의 산조반니에산파올로 광장에 세워졌다. 말의 동작과 콜레오니가 위엄있게 앞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그가 말을 타고 군대의 선두에서 지휘하며 싸움터로 달려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원근법을 따른 이 혁신적인 조각 개념은 17세기의 바로크 시대로부터 19세기의 낭만주의 조각 양식에 이르기까지 기마상의 발전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도나텔로가 만들어 파도바에 세운 용병대장 가타멜라타의 기념상(1447~53경)을 제외하면, 베로키오가 만든 콜레오니의 기념상이 르네상스기의 기마상 중 미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뛰어난 기교로 구성되고 힘차고 섬세하게 실체감을 표현한 이 작품은 베로키오의 조각 세계의 절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