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로댕

오귀스트 로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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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0년 11월 12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17년 11월 17일, 뫼동
국적 프랑스

요약 19~20세기 프랑스의 조각가로, 조각사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 조각가로 유명하며, 주요 작품은 <생각하는 사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로댕은 13세에 미술학교에 들어가 드로잉과 모형제작을 배웠다. 1880년 파리와 브뤼셀의 살롱 전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40세의 나이에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이후, <발자크 상>, <입맞춤> 등의 작품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작품은 샤를 데스피오와 아리스티드 마욜, 에밀 부르델 등의 프랑스 조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
  3. 성숙한 작품으로의 발돋음
  4. 대립과 성공
  5. 로댕에 대한 평가
로댕(Auguste Rodin)
로댕(Auguste Rodin)

개요

웅대한 청동상과 대리석상으로 유명하며, 조각사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 조각가로 평가된다.

당시 파리에 세워질 장식미술관에 놓기 위해 1880년에 의뢰받아 제작한 〈지옥문 La Porte de l'Enfer〉은 미완성인 채 남겨졌지만, 그중에는 그의 유명한 역작인 〈생각하는 사람 Le Penseur〉(1880)·〈입맞춤 Le Baiser〉(1886)이 들어 있다. 초상 조각들로는 빅토르 위고와 오노레 드 발자크의 기념상들이 있다.

입맞춤(Le Baiser)
입맞춤(Le Baiser)

초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로댕은 13세에 미술학교에 들어가 드로잉과 모형제작을 배웠다.

17세 이후 에콜 데 보자르 입학시험에 3차례나 떨어지자, 그 다음해(1858) 석조 장식일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 1862년 누이인 마리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수도사가 될 생각까지 했지만, 1864년 재봉사인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되면서 결국 그녀와 일생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식 결혼은 1917년 2월 그녀가 죽기 몇 주 전에야 이루어졌다.

로댕은 조각가 A.E. 카리에 벨뢰즈 밑에서 일하며 1864년 처음으로 살롱 전에 〈코가 이그러진 남자 L'Homme au nez cassé〉를 출품했으나 거절당했다.

초기 작품으로는 뵈레를 모델로 조각한 여러 점의 습작도 있다. 1871년 카리에벨뢰즈와 함께 브뤼셀에 가서 공공기념물을 장식하는 일을 맡았으나 카리에벨뢰즈에게 해고당했다. 얼마 후 청동장식물 만드는 일자리를 다시 찾았고, 로즈 뵈레도 브뤼셀로 와서 그와 함께 살았다.

1875년 35세가 되도록 장식일에만 쫓겨 독자적 표현양식을 개발하지 못한 그는 이탈리아(제노바·피렌체·로마·나폴리·베네치아) 방문을 계기로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에게서 감명을 받고 브뤼셀로 되돌아온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한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첫 작품이 바로, 다시 태어나려는 활력을 정복당한 고통을 표현한 청동상 〈정복당한 자 Le Vaincu〉이다. 이 작품은 처음에 브뤼셀의 미술계에서, 그리고 1877년 파리 살롱 전에 〈청동시대 L'Âge d'Airain〉라는 제목으로 전시되면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청동시대(L'Âge d'Airain)
청동시대(L'Âge d'Airain)

이 작품은 당대의 다른 조각상들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사실적인 표현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 몸에 틀을 떠서 만든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았다.

1877년 파리로 돌아와, 1879년부터 세브르 자기(瓷器)공장의 공장장이 되어 있는 옛 스승 카리에벨뢰즈의 부탁으로 자기 도안을 맡았다. 그러면서 런던과 파리에 세워질 기념비 제작에 여러 차례 응모하여 실패했으나, 마침내 파리 시청의 조각상 제작을 의뢰받았다. 한편 〈설교하는 세례자 요한 St. Jean-Baptiste prêchant〉(1878)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양식을 개척했으며, 1880년 파리와 브뤼셀의 살롱 전에서 이 작품과 〈청동시대〉가 인정을 받으면서 40세의 나이에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성숙한 작품으로의 발돋음

대부분의 작가들이 이미 많은 작품을 완성했을 나이에 로댕은 겨우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정부로부터, 그 당시 세워질 파리 장식미술관의 청동문 제작을 의뢰받자 2개의 작업실을 차렸으며, 작업 대금을 선불로 받아 재정적으로 안정되었다. 그는 약속한 1884년까지 완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1917년 그가 죽을 때까지도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그 문은 주제를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에서 따왔기 때문에 〈지옥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지옥문(La Porte de l'Enfer)
지옥문(La Porte de l'Enfer)

처음의 구상은 15세기 이탈리아의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가 피렌체 성당에 세운 〈천국의 문 Gates of Paradise〉에서 따오려 했던 것이나, 1881년 화가 알퐁스 르그로의 초청으로 런던을 방문하면서 그 계획이 크게 바뀌었다. 로댕은 영국에서 단테의 영향을 받은 라파엘 전파(前派)의 많은 회화와 소묘들, 특히 윌리엄 블레이크의 환상적인 작품들을 보고 그 영향으로 사랑·고통·죽음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인간군상들을 보여주기로 작품방향을 바꾸었다.

이 미완성의 작품은 커다란 네모틀 안에 독립적으로 제작된 인물상과 군상들을 짜맞추어 만든 것으로서, 그 가운데는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것은 원래 문의 윗부분에 놓여질 단테의 좌상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1884년에는 칼레 시로부터 기념물 제작을 의뢰받았다.

그것은 1347년 1년간의 포위공격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 도시를 구하기 위해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게 스스로 볼모로 잡혀간 시민들의 희생을 추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2년 안에 완성된 이 〈칼레의 시민 Les Bourgeois de Calais〉은 1895년에야 비로소 헌정되었으며, 1913년에는 당시 영국의 왕비가 남편 에드워드 국왕을 설득하여 그 영웅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중재한 것을 기념하여 런던의 국회의사당 정원에 이 작품을 청동으로 떠서 세웠다.

로댕의 명성은 올라갔으나, 그의 무절제한 사생활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잇달았다.

1885년쯤 그는 시인 폴 클로델의 재능있는 누이이며 자신의 제자인 카미유 클로델과 연인이 되어 잦은 말다툼을 하면서도 연애를 했지만, 결국 1898년 카미유가 미치면서 그들의 연애도 끝났다. 순식간에 프랑스인들의 관심을 모은 그들의 애정은 매우 열렬했으며, 로댕은 그 기간에 욕망으로 시달리는 연인상을 많이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감각의 〈입맞춤〉은 원래 〈지옥문〉을 위해 구상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상(像)으로서 그의 걸작으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이 작품으로 로댕은 수많은 추문에 휘말렸다.

대립과 성공

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국립미술아카데미인 프랑스 학술원과 일반대중, 심지어 국회와도 자주 충돌했다.

그는 10년을 바쳐 풍경화가인 〈클로드 로랭 Claude Lorrain〉·〈아르헨티나 대통령 도밍고 사르미엔토 President Domingo Sarmiento of Argentina〉·〈빅토르 위고 Victor Hugo〉·〈오노레 드 발자크 Honoré de Balzac〉 등 4점의 기념상들을 제작했으나, 모두가 비평가들의 심한 공격을 받았다.

〈클로드 로랭〉은 프랑스 낭시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 도밍고 사르미엔토〉상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각각 큰 소동을 야기시켰고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는 훨씬 더 심한 충돌을 낳았다. 1886년 그는 프랑스의 위인 기념관인 팡테옹에 위고의 기념비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고, 나체상을 제작하려 했으나 큰 물의를 빚게 되자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9년에 나체상이지만 앉아 있는 〈빅토르 위고〉가 뤽상부르 공원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결국 팔레 루아얄 미술관에 놓여졌다.

1891년 로댕은 저술가 협회로부터 발자크상을 의뢰받고 여러 개의 발자크 초상화를 조각으로 옮기는 대규모 작업에 몰두했는데 그는 발자크가 다니던 양복점에 가서 고인의 정확한 신체 치수까지도 알아냈다. 그는 조각상에 어울리는 자세를 잡느라고 온갖 상상과 실험을 거친 뒤, 마침내 옷을 반쯤 걸친 발자크의 모습을 구상해냈다. 간결하게 구상된 이 조각의 원형은 선사시대의 유물인 멘히르 또는 수직 석제대(石祭臺)와 닮았으며, 현대미술의 간결함을 앞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작업이 늦어지고 조각상의 구도가 드러나자 저술가 협회는 그를 법적 소송에 걸었다. 1898년 그 원형이 국립미술협회전(展)에 선보여 격렬한 논쟁을 야기시켰을 때, 후에 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가 나서서 그를 도와주었다. 결국 로댕은 저술가협회에 손해배상을 해주고 그 원형을 철회했다.

그 발자크 초상은 1939년에야 비로소 청동으로 주조되어 파리에 있는 몽마르트르 네거리에 세워졌다.

1900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는 로댕의 조각 150점과 수많은 드로잉들이 특별 전시되어 그의 국제적인 명성을 증명했으며, 전시되었던 작품들은 1896년에 그가 뫼동에 사 두었던 집으로 옮겨졌다. 그의 집은 그의 제자들과 조수들로 붐비는 거대한 작업장이 되어 로댕은 조각가라기보다는 차라리 조각 청부업자에 가까웠다.

그 자신은 마음에 드는 형태를 찾느라고 오로지 원형만을 수없이 만들었다. 청동 주조를 전문가들에게 맡겼을 뿐 아니라 대리석의 절단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지휘만 했다. 산업 공장과도 같은 이 작업장에서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오스트리아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여러 사람의 비서들이 그를 보조했다.

1900년 이후로 로댕은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미국·독일·오스트리아·영국·프랑스 등에서 흉상 제작 의뢰가 쇄도했고, 특히 영국에서 아주 유명해 많은 영국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1902년 그를 축하하는 런던의 한 연회장에서는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환호했다. 그는 1907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세운 시인 윌리엄 헨리 기념상 개막식에 참석했고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 상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 등과 함께 옥스퍼드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8년 5월에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직접 뫼동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당시 로댕은 커다란 정원에 둘러싸인 18세기 파리풍의 아름다운 비롱 저택의 한 층을 빌려쓰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 정부는, 이 저택을 로댕 박물관으로 만드는 조건으로 로댕의 전작품을 기증할 것을 제의했고 로댕은 이에 동의했다. 그후, 그의 마지막 추종자인 미국인(나중에 슈아쇨 공작부인이 됨)의 이기적인 음모로 이 협상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나 그의 연대기 편집자이며 이 협상의 성공을 위해 활동한 주디트 클라델과 그의 유산을 노리는 여자들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한 마지막 비서 마르셀 티렐의 도움으로 결국 성사되었으며 1916년 저택을 양도받고 작품들을 기증하였다.

이 미술관은 자치기관으로서 로댕이 남겨놓은 석고 주형에서 떠낸 주조물을 팔아 유지하고 있다. 로댕의 장례식 날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는 그를 추도하는 엄숙한 추모식이 치러졌다.

로댕은 일생 동안 조각 외에도 책 삽화와 드라이포인트, 동판화, 여인의 누드 드로잉 등을 많이 남겼다. 또한 문학적 자질이 있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중세 미술에 심취했으며, 주요역작으로는 〈프랑스의 대성당들 Les Cathédrales de France〉(1914)이 있다.

로댕에 대한 평가

20세기초에 로댕은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현대의 미켈란젤로이자 조각의 거장 또는 비범한 천재성의 화신으로 오랫동안 추앙받았다.

그의 유별난 여성 편력조차 뛰어난 재능의 상징으로 용납되었다. 그러나 그후 70~80년이 지난 근대에는 그에 대한 평가가 이전처럼 한결같지는 않아 어떤 비평가는 로댕의 작품에서 장식조각가로서의 경력이나 전문적 수업의 결여를 드러내는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대의 조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나라 출신의 수많은 제자들을 통해 그의 조각양식은 널리 퍼졌다. 그의 작품은 특히 샤를 데스피오와 아리스티드 마욜, 에밀 부르델 등의 프랑스 조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주요미술관들마다 그의 복제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파리·필라델피아·도쿄[東京]에는 로댕 미술관이 있다. 로댕의 주요한 업적이라면 서양 조각의 근본적인 힘이 되어온 인체에 대한 지식과 그 풍부한 묘사를 되살려 놓은 데 있다.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나 〈니진스키 Nijinsky〉와 같은 작품들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