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망소

클레망소

다른 표기 언어 Georges Clemenceau
요약 테이블
출생 1841. 9. 28, 프랑스 무예롱앙파레드
사망 1929. 11. 24,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클레망소는 프랑스 의회의원으로 정계를 주름잡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의 총리로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전쟁 후에는 베르사유 조약 체결에 큰 역할을 했다. 급진 공화당원으로 의회에 진출 한 후, 계속 선거에서 성공하며 승승장구 했으나 활발한 정부비판 활동 때문에 1893년엔 낙선했다. 그러나 그는 언론인이 되어 계속해서 정부를 공격적으로 비판했다. 1906년에 프랑스의 총리가 되어 전시 내각을 이끌었고, 제 1차 대전 때는 프랑스 국민의 사기를 돋구고,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 내는 등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노력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때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프랑스의 이익이 지켜지게 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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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정치입문
  4. 제1차 세계대전중의 지도력
  5. 평화협상

개요

프랑스 제3공화국 시절 의회의원으로 정계를 주름잡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의 총리(1917~20)로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전쟁 후에는 베르사유 조약의 골격을 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초기생애

프랑스 서부의 해안에 면한 방데 주(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방자맹은 볼테르를 지지하는 공리주의자로서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61년 11월 아버지는 의학공부를 시키기 위해 그를 파리로 데려갔다. 파리에서 의학 공부를 마친 클레망소는 그후 4년 동안(1865~69) 미국에서 보냈다. 그 시절은 남북전쟁이 한창인 때였는데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 1869년 미국인 메리 플루머와 결혼하여 3명의 아이를 얻었으나, 7년 뒤 이혼했다. 클레망소는 결혼 후 프랑스로 돌아와 방데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정치입문

그는 귀국 후 정치에 흥미를 느끼고 곧 파리로 갔다.

1870년 7월 나폴레옹 3세는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는데, 프랑스군은 스당에서 대패하여 2개월도 못 가 전쟁은 끝났고 나폴레옹 3세의 제국은 붕괴되었다. 그해 9월 4일 클레망소는 군중들 틈에 끼여 부르봉 왕궁까지 행진하면서, 공화국의 설립을 주창하는 과격한 지도자 레옹 강베타를 열렬히 지지했다(파리 코뮌). 그 직후 클레망소는 파리 제18구(몽마르트르)의 구장으로 선출되었고 1871년에는 급진공화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1876년 또다시 출마하여 이번에는 제18구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뒤 1885년 3번째로 의회에 진출하여 1886년에 발족한 샤를 드 프레시네 정부를 지지했다. 그는 또한 조르주 불랑제 장군의 육군부장관 입각을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불랑제가 공화주의를 지지할 줄 알았으나, 무책임한 군중선동가에다 민족주의자가 되어 왕당파의 핵심인물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클레망소는 반(反)블랑제 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를 계기로 정부 비판활동을 활발하게 벌여 많은 정적들을 만들게 되었다.

그결과 1893년의 선거에서는 낙선하고 말았다. 이에 클레망소는 언론인으로 변신하여 활발하게 펜을 휘둘렀다. 1894~1906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 때는 자신이 관여하는 언론지 〈정의 La Justice〉·〈새벽 L'Aurore〉에 드레퓌스를 지지하는 기사를 싣는 한편 정부를 맹렬하게 공격하고 나섰다(1897~1905).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공화파 인사들의 지지를 크게 받게 되었고 그결과 1902년 4월에는 바르 지역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 결과는 클레망소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발적으로 상원의원을 그만둔 1920년까지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했다. 또한 정치가로서의 역량이 정상에 도달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1906년에는 내무부장관으로 입각했고 1906~09년에는 총리를 역임했다. 프랑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3년이 지난 1917년에 프랑스 국민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자원은 바닥나 있었다.

바로 이때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레이몽 푸앵카레가 그에게 전시내각(1917~20)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냉정하고 끈덕지게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의 지도력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클레망소는 즉각 행동에 나서 전프랑스 국민에게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1년 전인 1913년에 자신을 편집인으로 하는 일간지 〈자유로운 인간 L'Homme Libre〉을 발간했는데, 그는 이 일간지를 통해 맹렬하게 반전(反戰)·반군(反軍)주의자, 사회주의자, 과격한 노동운동가 등에 대한 비난을 퍼붓는 한편 군비 확장을 서둘러야 한다는 논조를 폈다. 특히 대전중에는 전쟁에 대한 미국의 애매한 태도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미국 국민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향하여 미국의 참전을 간절하게 호소했다.

결국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그의 기쁨은 극에 달했다.

대전중의 클레망소의 공로는 무엇보다도 '이길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이 시간을 끌자 피로감·해이함·화평론(和平論)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클레망소는 이러한 태도를 단호하게 배격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푸앵카레 대통령이 1917년 11월 그에게 전시내각을 조각해달라고 의뢰했을 때 그는 이미 76세의 고령이었지만, 자신을 총리 겸 육군장관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전쟁에 이기는 것이었고 그밖의 다른 목적들은 전부 이 목적에 종속되어야만 했다. 반역자나 패배론자들에게는 일체의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오로지 승리의 희망만이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는 군통수권을 일원화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연합국 정부들과 관련 군사지도자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설득하여 받아들이게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마침내 1918년 3월 페르디낭 포슈가 단일 최고사령관으로 지명되었다.

1918년 5월에는 여러 번의 군사적 실패가 있었지만 클레망소의 결심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전쟁에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는 의지는 더욱 확고해져갔다.

평화협상

1918년 11월 11일 패전한 독일은 휴전합의서에 서명했다(독일사). 클레망소는 평화를 지켜나가는 것이 전쟁에 이기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전시의 연합체제가 평화시의 연합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그는 온갖 우여곡절이 많았던 파리 평화회의(1919)의 의장이 되어 잘 이끌어나갔다. 이에 따라 베르사유 조약이 준비되었는데 클레망소는 프랑스의 이익과 영국 및 미국의 이익이 서로 일치되도록 노력했다.

그는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와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설득하여 프랑스의 이익이 잘 지켜지도록 했다. 또한 독일의 무장 해제도 자신의 의사대로 관철시켰다. 베르사유 조약은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에서 체결되었는데 그곳은 1871년 독일의 빌헬름 1세가 자신을 독일 황제로 선포한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 의회는 이 조약의 체결과정에서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클레망소에 대해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또한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클레망소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때문에 의회의 지지를 잃게 된 클레망소는 1920년 1월 17일에 벌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고 이에 따라 총리직을 사임하고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클레망소가 방데의 고향으로 은퇴했을 때는 이미 80세의 고령이었다. 은퇴 후에는 유럽 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1922. 11)한 것을 제외하고는 고향에서 조용하게 지냈다. 특히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고전을 원서로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1929년 3월 28일 고향 방데의 콜롱비에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 옆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또한 공식적인 장례식이나 종교의식은 하지 말고, 묘지에는 비석 없이 간단한 울타리만 세워달라고 했다. 1929년 파리에 있는 프랑클랭 아파트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