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랑제

불랑제

다른 표기 언어 Georges(-Ernest-Jean-Marie) Boulanger 동의어 조르주 에르네스 장마리 불랑제, 복수 장군, Général Revanche
요약 테이블
출생 1837. 4. 29, 프랑스 렌
사망 1891. 9. 30, 브뤼셀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장군·육군장관·정치인.

불랑제[Georges(-Ernest-Jean-Marie) Boulanger]
불랑제[Georges(-Ernest-Jean-Marie) Boulanger]

1880년대에 짧은 기간동안 큰 호응을 받으며 권력장악을 시도해 제3공화국을 붕괴 위기까지 몰고 갔다.

생시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56년 육군에 들어가 이탈리아와 알제리, 인도차이나 등지에서 복무했으며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에 참전했다. 1871년 파리 코뮌을 진압하다가 부상을 입었으며 1880년 5월 준장으로, 1882년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2년 후 튀니지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튀니지 주재 사무관인 피에르 폴 캉봉과의 의견차이 때문에 소환되었다.

파리로 돌아와 조르주 클레망소와 급진당의 후원을 받으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886년 1월 샤를 루이 드 솔세 드 프레시네 내각의 육군장관이 되었다.

그는 모든 계층의 이익을 도모하는 개혁정책을 도입하고 공공연하게 인기전술을 구사하여 국민들에게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패배를 설욕해줄 인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당시 공화주의 체제에 적대적인 세력들의 도구로 전락했다. 1886년 12월 프레시네가 실각한 뒤에도 새 총리 르네 고블레에 의해 육군장관에 유임되었으나 이 무렵 클레망소는 지나치게 타협적인 불랑제의 태도가 못마땅해 후원을 중단한 상태였다.

1887년 5월 고블레가 총리직에서 물러나자 파리 군중들은 소리높여 자신들의 '용감한 장군'(brav' général)의 유임을 요구했으나 오랫동안 불랑제에게 적대적이었던 모리스 루비에는 그를 자기 내각에 포함시키기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불랑제는 제18군단 사령관으로 클레르몽페랑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불랑제 일파의 '운동'은 더욱더 활기를 띠었다.

많은 보나파르트파가 그를 지지했고 그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한 뒤제 공작부인(마리 안 클레망틴 드 로슈슈아르 모르트마르)을 따라 왕당파도 그를 지지하게 되었다.

불랑제는 휴가도 아니면서 변장하고 3번이나 파리에 온 일과 스위스 프랑쟁에 있는 나폴레옹 공(公)을 방문한 일 때문에 1888년 사령관직을 박탈당했다. 그의 이름은 육군 명부에서 삭제되었으나 거의 동시에 노르 주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88년 6월 그가 제출한 헌법개정안이 의회에서 부결되자 즉시 의원직을 사퇴했다.

총리 샤를 플로케와의 언쟁으로 7월 13일 결투를 벌여 나이많은 총리에게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같은 치욕과 형편없는 연설솜씨에도 불구하고 추종자들의 열광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1888년 내내 그는 프랑스 정계를 뒤흔들었다.

1889년 1월 불랑제는 압도적인 다수의 지지를 얻어 파리 의원으로 복귀했다. 선거결과가 발표되자 그를 지지하는 대중들은 미친 듯이 환호하면서 그에게 즉각적으로 정권을 인수하라고 촉구했다. 불랑제는 이 요구를 사양하고 대신 그날 밤을 연인과 함께 보냈다. 그가 이 결정적인 순간에 권력장악에 실패한 것은 추종세력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피에르 티라르를 수반으로 에르네스트 콩스탕스가 내무장관을 맡은 새 정부는 불랑제를 기소하기로 결정했으며 2개월이 못 되어 의회는 불랑제의 의원 면책특권을 박탈하도록 요청받았다. 불랑제는 친구들을 경악시키면서 4월 1일 파리를 떠나 브뤼셀을 거쳐 런던으로 달아났다. 그는 고등법원 대역을 수행한 상원에서 반역혐의로 기소되어 궐석재판을 거쳐 1889년 8월 14일 추방선고를 받았다. 1889년과 1890년의 선거에서 그의 지지자들은 타격을 입었으며 그를 옹호하는 대중적 열기도 식었다.

1891년 불랑제는 브뤼셀의 익셀 공동묘지에 묻힌 연인 마르그리트 드 본맹의 무덤 위에서 그녀가 죽은 지 2개월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