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네

프레시네

다른 표기 언어 Charles-Louis de Saulces de Freycinet
요약 테이블
출생 1828. 11. 14, 프랑스 푸아
사망 1923. 5. 15,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정치가.

4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낸 것을 비롯해 서로 다른 12개 정부에서 일했다. 1890년대 프랑스의 중요한 군사개혁은 주로 그의 덕분에 이루어졌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한 후 채광기술자로서 정부 부처에 들어가 1883년에는 광업담당 검열총감으로 승진했다.

프랑스-독일 전쟁중이던 1870년 9월 프랑스 공화국이 수립되자 그는 레옹 강베타를 위해 일했고, 레옹은 프레시네를 타른에가론 주의 주지사로 임명했다. 또한 같은 해 레옹에 의해 투르에 있던 국가방위 임시정부에서 군사회의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프레시네의 조직력은 강베타가 진군해오는 독일군에 대항해 군사력을 결집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871년 프레시네는 자신의 체험을 적은 〈1870~71년 파리 포위 기간 동안 지방에서 벌어진 전쟁 La Guerre en Province pendant le siège de Paris, 1870~1871〉(1871)을 출판했다.

1876년 그는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쥘 뒤포르 행정부에서 공공사업장관으로 '프레시네 계획', 즉 정부가 철도를 구입하여 새 철로를 확장하고 수로를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1879년 12월 처음으로 4년 임기의 총리가 되었지만 종교단체에 대한 국가의 지원 문제가 발생하여 곧 실각했다. 프레시네는 다시 새 정부를 이끌었고 1882년 1~8월에는 외무장관직을 겸임했다. 그러나 그가 수에즈 지대를 점령하기로 결정하자 이 정부도 실각했다. 이후 17년 동안 그는 정부에서 직책을 맡기도 하고 공직을 떠나 있기도 했다.

1887년에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사디 카르노에게 패배했다. 1888년 4월 그는 1848년 이래 최초의 민간인 출신 육군장관이 되었다. 이후 5년 동안에는 자신이 직접 이끈 내각(1890~92)을 비롯한 5개 정부에서 3년간의 군복무제 도입, 참모제도 확립, 육군 최고위원회 설립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인상적인 군대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1893년 1월 그는 파나마 운하 건설을 둘러싸고 일어난 재정 스캔들 때문에 육군장관직에서 사임했다. 1899년 잠시 동안 다시 육군장관으로 일했고 1915~16년에는 무임소장관을 지냈다.

1890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으며, 회고록 〈추억 1848~78 Souvenirs, 1848~1878〉(1912)을 비롯한 다수의 과학기술서를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