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베타

강베타

다른 표기 언어 Léon Gambe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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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38. 4. 2, 프랑스 카오르
사망 1882. 12. 31, 파리 근처 빌다브레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공화파 정치가.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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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생애
  3. 평가

개요

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때 프로이센에 맞서 방어전을 지휘했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을 수립하면서 3가지 중대한 공헌을 했다.

첫째는 여러 연설과 논설을 통해 많은 프랑스인들에게 온건민주공화주의의 이상을 갖도록 했고, 둘째는 정치적 영향력과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이용해 민주정당인 '공화연맹'(Republican Union)에 대한 지지를 모은 일이며, 셋째는 1871년 국민의회에서 임시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아돌프 티에르를 도와 왕당파와 보나파르트파에 맞서 새 정부체제를 의회제 공화국으로 바꾸는 데 이바지한 것이다.

1881년 11월 14일에서 1882년 1월 16일까지 잠깐 동안 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생애

어머니는 가스코뉴 지방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이탈리아인으로서 카오르에 이주해 식료품상을 경영했다.

고향의 고등학교에서 공부도 잘했고 야심만만하며 유창하게 말도 잘하던 청년 강베타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는 것밖에는 아무런 전망이 없는 고향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법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강력한 공화제 지지자였던 강베타는 활기차고 관대한 성격으로 파리의 학생들 사이에서 곧 큰 인기를 얻었다. 1859년 변호사가 되었으나 큰 성공은 못 거두다가, 1868년 '보댕 사건'으로 알려진 정치사건을 맡으면서 갑자기 유명해졌다.

장 바티스트 보댕은 1851년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이에 저항하다 피살당한 의회 의원으로,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를 순교자로 여기고 있었다. 8명의 언론인들이 그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려다 기소당한 것이 보댕 사건이었다.

그 가운데 1명의 변호를 맡게 된 강베타는 매우 강력한 어조의 변호를 통해 프랑스 제정(帝政)과 그 기원·정책 등을 비난했다. 여러 신문들이 그의 연설을 보도하게 되면서 강베타는 정치적인 행운을 잡았고 거의 하룻밤 사이에 그는 '공화당'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1869년 입법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치닫게 될 여러 조치를 취할 때마다 이를 반대했으나 결국 1870년 7월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가능한 한 빨리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노력했다. 프랑스군은 스당에서 참패했고 바로 그곳에서 나폴레옹 3세가 사로잡혔다(1870. 9. 1). 그러자 강베타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국가방위를 위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새 공화국의 내무장관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가장 급한 문제는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파리 방어였다.

정부관리들은 대부분 파리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강베타는 프랑스 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1870년 10월 17일 기구(氣球)를 타고 독일군 전선 위를 날아 파리를 빠져나왔다. 일단 투르에 자리를 잡은 그는 아직 점령당하지 않은 프랑스 지역에서 프랑스를 방어하기 위해 투쟁할 것을 국민들에게 역설했다. 그는 내무장관과 육군장관을 겸임하면서 무제한의 권한을 행사했다. 프랑스의 2개 주력군 가운데 한 부대는 스당에서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또다른 부대는 메츠에서 포위당해 항복할 지경에 이르렀다.

언제나 열정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강베타는 군대를 새로 구성해 훈련을 시키고 장비를 지급했다. 이들은 몇몇 지방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패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투르가 독일군의 위협을 받자 강베타는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보르도로 떠났다. 그는 계속 항전하기를 원했으나 프랑스는 이미 전쟁에 지쳐 있었으며 결국 임시정부는 1871년 1월 18일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휴전협정이 이루어지자 새 국민의회를 선거하게 되었다.

이 국민의회는 1871년 3월 보르도에서 개최되어 강화협약을 인준했다. 강베타는 알자스의 스트라스부르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알자스와 로렌 지방 대부분을 독일로 넘긴다는 강화협약이 승인된 뒤 의석을 잃고 은퇴하여 얼마 동안 스페인에서 지냈다.

1871년 7월에 실시한 보궐선거에서 그는 센 주(州)를 대표하는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의회는 공화제의 유지와 왕정복고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는데 의원들 중 대다수는 왕당파였다. 그러나 부르봉 왕가의 종가(宗家)와 분가(分家) 출신 가운데 누가 왕이 되어야 할지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강베타는 허약한 의회로 하여금 공화국을 인준하도록 밀고 나갔다. 1875년에 제정한 공화제 헌법은 1940년 제3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공화국의 토대가 되었다.

강베타는 의회의 음모로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으나 하원의장으로서 막대한 권한을 행사했다. 자신이 생각해오던 대로 '아테네의 공화국'처럼 포용력있는 공화국을 만들려 했다. 뚱뚱한 몸집, 흐트러진 턱수염, 제대로 손질하지 않은 외모였지만 따뜻하고 온화한 성품과 자유주의적 견해 덕분에 크게 인기를 끌었다.

대통령 줄 그레비는 강베타를 싫어하여 한동안 그에게 내각구성에 대해 문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베타는 1881년 11월 마침내 총리로 임명되어 외교면에서는 영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국내에서는 내정개혁이라는 야심에 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882년 1월 이 2가지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총리 자리에서 밀려났다.

1872년부터 그는 레오니 레옹이라는 예쁘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여자와 사귀기 시작했다.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뒤 그녀와 결혼할 생각으로 파리 외곽에서 같이 살았다. 그러나 권총을 만지작거리다 실수로 자기 팔을 쏘는 사고가 났고 건강이 아주 나빴기 때문에 상처가 아무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총상에서 회복하는 동안 충수염(蟲垂炎)에 걸렸으나 수술을 하지 않아 결국 1882년 12월 31일 44세의 나이에 죽었다.

평가

강베타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그의 명성은 거의 손상을 입지 않은 채 이어졌고 대부분의 마을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겼다. 그러나 이같은 명성은 실제 권력을 행사한 두 번의 임기(총 3년) 동안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야당생활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동안에 이룩한 업적으로 얻은 것이었다. 그는 보통선거권, 언론의 자유, 결사의 권리, 정치범에 대한 법원의 심리, 종교와 국가의 분리와 같은 완전한 근대적 민주주의와 프랑스의 국가적 통합을 열렬히 옹호했다. 국가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정치적 반대자들과 흥정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기회주의자라는 평판도 얻었다.

그는 프랑스의 의회 민주주의를 굳게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이같은 타협의 결과 프랑스는 변동이 심한 정당제도를 갖게 되었고 이는 민주정부를 허약하게 만든 한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