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봉 왕가

부르봉 왕가

다른 표기 언어 House of Bourbon

요약 부르봉 왕가는 카페 왕가의 한 갈래로 발루아 왕가 사람들에게 밀려나 1589년까지 프랑스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1589년 발루아 왕가의 마지막 왕인 앙리 3세가 죽자 프랑스 왕은 앙리 4세가 되었다. 발루아 왕가의 직계 남자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군주들은 모두 앙리 4세의 자손이다.
루이 9세의 여섯째 아들인 클레르몽은 부르봉 영지의 상속녀와 결혼했는데 영지의 이름을 따서 이 왕가를 부르봉 왕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왕가는 1589~1792, 1814~48년에 프랑스를 다스렸으며 1700~1808년, 1814~68년, 1874~1931년, 그리고 1975년부터 현재까지 스페인을 다스린 왕 또는 여왕을 배출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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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군주들
  2. 갈등과 화합

이 왕가는 1589~1792, 1814~48년에 프랑스를 다스렸다. 또한 1700~1808년, 1814~68년, 1874~1931년, 그리고 1975년부터 현재까지 스페인을 다스린 왕 또는 여왕을 배출했다.

이 왕가는 1731~35년, 1748~1802년, 1847~59년에 파르마 공작을, 1734~1808년에는 나폴리 및 시칠리아 왕을, 1816~60년에는 양(兩)시칠리아 왕국의 왕을, 1801~07년에는 에트루리아 왕을, 1815~47년에는 루카 공작을 배출했다.

부르봉 왕가
부르봉 왕가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를 다스린 카페 왕가의 한 갈래이다. 카페 왕가의 '직계'인 루이 9세는 여섯째 아들인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를 통해 부르봉 왕가의 조상이 되었다.

1328년에 카페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자, 족보에서 부르봉 왕가보다 손위인 발루아 왕가가 프랑스 왕위를 잇게 되었고, 부르봉 왕가는 발루아 왕가 사람들에게 밀려나 1589년까지 프랑스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발루아 왕가는 여자의 왕위계승권을 부인하고 장자상속권 제도에 따라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이른바 살리카 계승법을 확립했다. 이 원칙에 따라 발루아 왕가의 직계 남자 혈통이 단절되자 부르봉 왕가의 연장자가 프랑스의 합법적인 왕이 되었다.

루이 9세의 여섯째 아들인 로베르 드 클레르몽은 부르봉 영지(지금의 알리에 주 부르봉라르샹보)의 상속녀와 결혼했다. 이 영지는 1327년에 그의 아들 루이를 위한 공작령이 되었고, 영지의 이름을 따서 이 왕가를 부르봉 왕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공작령은 나중에 부르보네 지방의 핵심이 되었으며 이후 라 마르슈 백작령과 방돔 백작령도 이에 포함되었다.

1503년에 부르봉 공작의 칭호를 물려받은 샤를 드 부르봉 몽팡시에는 반역죄를 지었으므로 죽은 해인 1527년 왕실에 땅을 몰수당했다. 그후 부르봉 왕가의 지도적 지위는 라 마르슈 방돔 백작의 가계로 넘어갔다. 라 마르슈 방돔 백작의 가계는 15세기말부터 손위인 방돔 계열(이들은 1515년 공작작위를 받음)과 손아래인 라 로슈 쉬리옹 계열로 나뉘어 있었다. 라 로슈 쉬리옹 계열은 몽팡시에를 얻었고 1539년부터는 공작작위도 받았다.

방돔 공작이며 1537년에 부르봉 왕가의 우두머리가 된 앙투안 드 부르봉은 1548년에 나바라의 여왕 후아나(잔 알브레)와 결혼함으로써 1555년에 나바라 왕국의 이름뿐인 왕이자 여왕의 부군이 되었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 엔리케(앙리) 역시 1572년에 어머니의 뒤를 이어 나바라 왕국의 이름뿐인 왕이 되었고, 발루아 왕가의 마지막 왕인 앙리 3세가 1589년에 죽자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되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군주들은 모두 앙리 4세의 자손이다.

군주들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 왕위에 오른 것은 1700년에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 루이 14세와 왕비인 스페인 왕녀 마리 테레즈 사이의 자손들이 카를로스 2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르봉 왕가
부르봉 왕가

그러나 또다른 이유는 마리 테레즈가 루이 14세와 결혼할 때 스페인에서 갖고 있던 권리를 모두 포기했는데도 카를로스 2세가 유언장에서 마리 테레즈의 자손 가운데 하나를 후계자로 지명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열강들이 스페인과 프랑스의 결합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카를로스 2세는 루이 14세의 상속자나 그 상속자의 맏아들이 아니라,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를 스페인 왕위계승자로 지명했다. 필리프는 스페인 왕위에 올라 펠리페 5세가 되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끝난 뒤 맺어진 위트레흐트 조약(1713)은 펠리페가 스페인과 스페인령 아메리카를 그대로 보유하되, 그와 그 자손들이 프랑스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세습 권리를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나중에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가 된 스페인 왕자 돈 카를로스는 이탈리아에 부르봉 왕가의 재산을 처음 마련한 인물이었다.

펠리페 5세와 그의 2번째 아내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마지막 파르마 공작의 상속녀인 어머니 덕분에 1731년에 파르마 공작이 되었다(파르마ㆍ피아첸차 공작령). 그리고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734년에는 스스로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양시칠리아 왕국)을 점령했다.

1735~38년에 맺어진 협정에 따라 그는 나폴리-시칠리아 왕으로 국제적 승인을 받기 위해 파르마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1748년 엑스라샤펠(아헨) 조약으로 파르마는 결국 그의 동생 돈 펠리페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돈 펠리페나 그의 후계자들이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이나 스페인 왕국을 물려받게 될 경우에는 파르마를 포기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돈 카를로스는 1759년에 마침내 스페인 왕위에 올라 카를로스 3세가 되자, 나폴리-시칠리아 왕국과 스페인 왕국이 절대로 하나의 군주 아래 통합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조건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을 셋째 아들 페르디난도에게 넘겨주었다.

프랑스는 파르마를 병합할 계획이었지만, 아직은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와 친선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파르마를 빼앗는 보상으로 부르봉 왕가를 위해 에트루리아 왕국을 만들었다(1801). 그러나 이 왕국은 나폴레옹이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를 몰아낼 준비가 되자마자 해체되었다(1807).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정통' 직계는 권리를 회복했지만 1830년 혁명으로 다시 왕위에서 쫓겨났다.

부르봉 왕가의 방계인 오를레앙 왕가가 정통 직계를 대신하여 프랑스 왕위에 올랐지만, 역시 1848년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부르봉 왕가
부르봉 왕가

파르마 공작령과 양시칠리아 왕국의 부르봉 왕가는 1859~60년에 사보이 왕가의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빼앗겼다.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는 19세기에 많은 동요를 겪은 뒤 1931년 마침내 통치권을 잃었다. 그러나 1947년 스페인에서 왕위계승법이 공표되고, 그후 프랑코 장군이 돈 후안 카를로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함으로써 1975년부터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의 통치자가 되었다.

갈등과 화합

앙주 공작은 할아버지인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단호한 지원이 없었다면 결코 스페인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부르봉 왕가
부르봉 왕가

그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를 다스린 부르봉 왕가의 군주들은 주로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세력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 사이의 화합은 프랑스가 4국동맹 전쟁에 가담하여 스페인과 싸운 1718~20년에 잠시 정지되었지만 결국 스페인 왕 펠리페 5세의 아들과 프랑스 섭정의 딸이 결혼(1722)함으로써 화해가 이루어졌다.

1733년에 프랑스와 스페인은 에스코리알 조약을 맺고, 과거에 누구와 어떤 약정을 맺었든지 간에 서로 협력하기로 맹세했다.

이 조약과 그와 비슷한 퐁텐블로 조약(1743)을 '제1차 가족협정'과 '제2차 가족협정'이라 하기도 한다. 그리고 7년전쟁 때인 1761년 파리에서 맺어진 3번째 조약에서는 실제로 가족협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3번에 걸친 조약을 통틀어 부르봉 왕가 협정이라고 한다.

이 마지막 조약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든 적에 대한 상호방위를 보장했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를 다스리는 부르봉 왕가가 이 조약에 가맹하는 경우에는 이탈리아의 부르봉 국가들도 똑같이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부르봉 왕가에 속하지 않는 나라는 이 조약에 가맹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협력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때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새로운 골칫거리를 낳았다.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가 자유주의에 굴복하자,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한 왕자가 자유주의를 분쇄하기 위해 1823년 스페인으로 쳐들어갔다. 그외 2가지 사건으로 부르봉 왕가의 굳은 결속은 깨어지게 되었다.

우선 1830년 3월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는 펠리페 5세가 1713년 스페인에 도입한 살리카 계승법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아들이 없는 그가 동생인 몰리나 백작 돈 카를로스가 아니라 맏딸 이사벨(살리카 계승법을 폐지한 뒤에 태어남)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페르난도는 1832년 9월 살리카 계승법을 잠시 부활시켰지만, 불과 13일 뒤에 다시 폐지했다. 1833년 페르난도가 죽자 실망한 돈 카를로스의 지지자들은 이사벨의 즉위에 항의해 전쟁을 일으켰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1830년 7월혁명으로 부르봉 왕가의 정통 직계가 타도되고 부르봉 왕가의 방계 오를레앙 왕가의 우두머리인 루이 필리프에게 왕위가 넘어갔다(오를레앙공).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인 자칭 '평등공' 필리프가 1793년에 루이 16세를 처형하는 데 찬성했기 때문에 이미 혐오감을 사고 있던 오를레앙 왕가는 1830년의 왕위 찬탈로 정통왕조파들에게는 훨씬 더 불쾌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1883년에 샹보르 백작의 죽음으로 프랑스 왕실의 정통 직계 혈통이 끊겼을 때에도, 일부 정통왕조파는 오를레앙 왕가 사람을 정당한 프랑스 왕위권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가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포기한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을 아직도 준수해야 한다면, 이제는 오를레앙 왕가의 우두머리가 정당한 프랑스 왕위권자였다. 그래서 이들 일부 정통왕조파는 이 권리 포기를 무시하고 스페인의 한 왕자를 정당한 프랑스 왕으로 간주하는 쪽을 택했다. 이 정통왕조파를 프랑스에서는 '스페인의 부르봉 왕당파'(Blancs d'Espagne)라고 부른다.

그러나 대다수 정통왕조파는 샹보르 백작의 유언에 따라 오를레앙 왕가의 프랑스 왕위 요구권을 인정했다.

지위를 빼앗긴 부르봉 왕가 사람들, 즉 스페인의 카를로스파와 프랑스의 정통왕조파는 당연히 서로를 동정했지만 그들의 반대파인 이사벨 여왕과 오를레앙 왕가도 서로에게 강하게 끌렸다. 그결과 가운데 하나가 1840년대에 일어난 '스페인 왕가 결혼사건'이었다.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과 여동생 루이사 페르난다는 아직 미혼이었지만, 스페인 왕위계승은 유럽의 세력균형에 관심이 많은 열강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될 가능성이 많았다. 루이 필리프와 스페인 여왕 자매의 어머니인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원래 제의했듯이, 이사벨과 루이사 페르난다가 오를레앙 왕가 사람들과 결혼했다면 스페인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해졌을 것이다. 이것을 원하지 않은 영국 정부는 이사벨이 작센코부르크 왕가의 레오폴 공과 결혼할 것을 제의했다.

이어서 1843년에 프랑스와 영국은 합의를 보았다. 이사벨은 '중립적'인 인물, 되도록이면 같은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의 사촌과 결혼해야 하고, 루이사 페르난다는 언니 이사벨이 아이를 낳은 뒤에야 루이 필리프의 아들인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과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사벨의 결혼 상대가 될 수 있는 사촌 가운데 몬테몰린 백작은 카를로스파라는 이유로 스페인 정부가 반대했다.

그 다음 후보자인 돈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자식을 낳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3번째 후보자는 세비야 공작 돈 엔리케였는데, 그의 자유주의는 영국 정부의 마음에 들었지만 스페인 정부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그러나 1846년 영국과 사이가 틀어진 프랑스는 영국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스페인 왕실의 결혼을 성립시켰다.

이사벨과 루이사 페르난다는 같은 날(1846. 10. 10)에 돈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와 몽팡시에 공작을 각각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오를레앙 왕가는 몽팡시에나 그의 아들을 장차 스페인 왕으로 삼을 작정인 게 분명했으므로 일찍이 오를레앙 왕가에 호의적이었던 일부 영국인들은 당장 심각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돈 엔리케와 결혼하기를 원한 이사벨은 원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자 남편과 오랫동안 떨어져 방탕하게 지냈다.

이사벨은 1857년에 아들을 낳았으나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의혹이 생겨났다. 이런 의심은 1936년에 돈 카를로스의 대가 끊겼을 때 극단적인 카를로스파에게 도움을 주었다. 살리카 계승법에 따르면 돈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의 자손이 돈 카를로스의 상속자가 되어야 했고 그들은 이사벨의 아들이 돈 프란시스코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봉 왕가의 다른 군주들은 거의 모두 이사벨의 권리를 이미 인정했거나, 스페인 왕위와 겸임할 수 없는 다른 왕위에 대한 계승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카를로스파는 더 먼 곳에서 새로운 왕위권자를 찾아야 했다.

부르봉-파르마 왕가의 일부 군주들은 카를로스파의 제안에 응했지만, 파르마 공작령의 칭호를 포기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1748년의 협정에 따르면 스페인 통치권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르마 공작령의 칭호를 포기해야 했다. 오를레앙 왕가는 1713년에 맺어진 그와 비슷한 협정에 따라 프랑스 왕위를 요구할 권리를 가졌기 때문에 1748년의 협정도 존중해야 했고, 따라서 이 협정을 존중하지 않는 부르봉-파르마 왕가 사람들에게 불만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