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도 1세

페르디난도 1세

다른 표기 언어 Ferdinando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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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1. 1. 2/12, 나폴리
사망 1825. 1. 4, 나폴리
국적 시칠리아

요약 양(兩)시칠리아의 왕(1816~25 재위).
(영). Ferdinand Ⅰ.

그전에 나폴리의 왕(1759~1806 재위) 페르디난도 4세로서 프랑스 혁명과 혁명의 자유주의 이상에 반대해 나폴리를 반혁명 진영에 가담시켰다. 조금 유약하고 무능한 통치자였던 그는 왕비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는데, 왕비는 자신이 총애하는 영국인 고문관 존 액턴 경의 정책을 추진했다.

페르디난도는 1759년 부왕이 카를로스 3세로 스페인 왕위에 오르자 소년으로서 나폴리의 왕이 되었다. 미성년시절에는 섭정단이 나폴리를 통치하며 선왕의 자유주의 개혁을 계속 실행해나갔다.

1767년 페르디난도가 성년이 되고, 1768년 마리아 카롤리나와 결혼함으로써 정책 전환이 시작되었다. 사내아이를 낳아 결혼 당시의 조건에 따라 권력을 쥐게 된 마리아 카롤리나는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1777). 그녀는 이전에 섭정을 맡았던 베르나르도 타누치를 실각시키고 나폴리가 1793년 반프랑스 혁명 진영인 오스트리아-영국 동맹에 가담하는 데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다.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나폴리에 도착하자 용기를 얻은 페르디난도는 1798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로마 공화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21일에 프랑스가 나폴리를 침공해 파르테노페 공화국을 선포하자 페르디난도는 시칠리아로 도망쳤다. 1799년 이 공화국이 전복되자 나폴리로 돌아온 페르디난도는 항복의 조건을 무시하며 공화국 지지자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1806년 나폴레옹군은 나폴리를 점령했다. 다시 시칠리아로 피신한 페르디난도는 그곳에서 전제주의 통치를 완화하라는 영국의 압력에 굴복해 마리아 카롤리나를 국무에서 배제하고 자신의 아들 프란체스코를 섭정으로 임명했으며 시칠리아 헌법을 부여했다.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나폴리에 돌아와 통일 왕국 양시칠리아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가 되었다(1816. 12). 다시금 그는 전제주의적 통치를 부활했으나, 1820년 헌법을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헌법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 프란체스코에게 권력을 넘겨준 뒤 페르디난도는 새로운 헌법을 보호하겠다는 구실로 1821년초 의회로부터 라이바흐 회의 참석 허가를 받았다. 라이바흐 회의에서 그는 다시 한번 오스트리아의 원조를 구했고 3월에 오스트리아는 나폴리의 신헌법 정부를 전복했다. 뒤이어 벌어진 입헌파에 대한 앙갚음은 그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기 전까지 공식적으로 행한 가장 중요한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