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카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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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2. 8. 13, 오스트리아 빈
사망 1814. 9. 8, 빈
국적 나폴리, 이탈리아

요약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4세의 왕비.

나폴리의 실재 권력을 잡고 있었으며, 애인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총신 준남작 6세 존 액턴 경의 영향으로 영국을 가까이하고 프랑스를 멀리하는 정책을 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1768년 페르디난도 4세와 결혼했다.

왕은 권력의 상당부분을 아내에게 떠맡겼는데 혼인계약에 따라 마리아는 남아 상속자를 출산하면서(1777) 왕국의 통치기구인 국무위원회에 들어갔다. 그녀는 곧 자유주의 총리 베르나르도 타누치를 실각시키고 친(親)스페인 정책을 친영 정책으로 바꾸었다.

액턴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그녀는 프랑스인들이 동생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한 사건이 일어나자 프랑스 혁명에 대항하는 제1차 오스트리아-영국 동맹에 나폴리를 가입시켰고 나폴리 군함들을 파견해 툴롱 근처에 정박중인 영국함대에 합류하게 했다(1793). 나폴리는 제2차 동맹에도 가입했으나 프랑스군이 나폴리를 점령해 이를 파르테노페 공화국으로 선포하자(1798. 12) 마리아 카롤리나와 페르디난도는 피신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두 사람은 1799년 6월 공화국이 무너진 뒤 나폴리로 돌아왔으나 평화조약을 어기면서 공화국 지지자들을 대량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이 사건에 대해 적어도 부분적인 책임을 져야 했다. 1805년 영국과 러시아 함대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다시 한번 대프랑스 전쟁에 참전했으나 프랑스 군대가 또 왕국을 점령하자 왕의 가족은 다시 시칠리아로 도망갔다(1806. 1). 전하는 바로는 마리아 카롤리나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유격대 지도자 프라 디아볼로에게 연금과 토지를 주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유격대를 이끈 루포 추기경을 부추겨 칼라브리아를 약탈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녀는 마침내 영국 대사 조지 벤팅크 경과 불화를 일으켰고, 벤팅크에게 설득당한 페르디난도에 의해 시칠리아에서 추방되었다(1811). 그후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3년 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