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루아 왕조

발루아 왕조

다른 표기 언어 Valois dynasty

요약 봉건시대 말기부터 근대초까지인 1328~1589년에 프랑스를 다스린 왕조.

발루아 왕조의 왕들은 선대 카페 왕조의 과업을 이어받아 프랑스를 통일하고 중앙집권화에 힘썼다(→ 카페 왕조). 발루아 왕가는 원래 카페 가문의 한 분파인데 카페 왕가의 왕 필리프 3세의 아들인 발루아의 샤를이 1285년 발루아 백작령을 하사받았다.

1328년 샤를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필리프 6세로 프랑스 왕위에 올라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고 이 왕가에서는 세 가문을 배출했다. 즉 ① 직계가문으로 필리프 6세가 시조이며 1328~1498년에 왕위를 차지한 가문, ② 발루아-오를레앙 분파로서 샤를 5세의 후손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아들인 왕 루이 12세(1498~1515 재위)를 배출한 가문, ③ 발루아 앙굴렘 분파로서 샤를 5세의 또다른 후손인 앙굴렘 백작 샤를의 아들인 왕 프랑수아 1세 때부터 왕권을 차지한 가문이다.

발루아-앙굴렘 가문은 1515~74년에 프랑스를 다스렸으며 이후에는 카페 왕가의 또다른 분가인 부르봉 왕조가 들어섰다.

발루아 왕조의 초기 왕들은 필리프 6세(1328~50 재위) 때 일어난 백년전쟁(1337~1453)에 주로 골몰했다. 이 전쟁 동안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대부분을 지배하며 왕권을 위협했다. 또한 아르마냐크파(派)와 부르고뉴파 같은 봉건 영주들은 다시 세력을 강화해 왕의 패권에 도전했다. 그러나 샤를 7세(1422~61)는 왕권을 위협하는 이러한 요인들에 맞서 왕실의 세력 회복을 주도했다. 그후 발루아 왕조의 왕들은 봉건 영주들의 특권을 희생시키며 점점 자신들의 권위를 높여나갔다. 징세와 전쟁을 수행할 권리가 왕실만의 독자적인 권리로 자리잡았다. 또한 카페 왕조 치세 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많은 기본 행정 제도들이 더욱 발전했다.

이 시대에 프랑스 전역에 퍼진 파를망(고등법원)은 왕실의 법률을 적용·시행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발루아 왕조의 위세는 샤를 8세(1483~98 재위), 루이 12세(1498~1515 재위), 프랑수아 1세(1515~47 재위) 때 가장 컸다. 이들은 치세 때(15세기말에서 16세기초까지) 이탈리아와 전쟁을 치렀으나 결국 실패했고 이 전쟁 때부터 생겨난 합스부르크 왕가(신성 로마 제국 통치 왕가)와의 적대 관계는 이후 프랑스 왕정이 몰락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탈리아 전쟁).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1547~59 재위) 때는 프랑스의 르네상스가 꽃피었다. 발루아 왕조 말기에는 종교전쟁(1562~98)으로 로마 가톨릭파와 프로테스탄트파가 무력으로 대치한 채 정계를 지배함으로써 왕권이 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