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8세

샤를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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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70. 6. 30, 프랑스 앙부아즈
사망 1498. 4. 7, 앙부아즈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왕(1483~98 재위).

16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프랑스의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루이 2세와 사보이의 샤를로트 사이의 외아들인 샤를은 왕위를 계승할 당시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체질이 허약하고 지적인 면도 부족했다. 그는 법적으로 성년의 나이였음에도 즉위 후 처음 몇 해 동안에는 누이 안과 그녀의 남편 보죄 영주 피에르 드 부르봉이 함께 섭정을 하며 정부를 장악했다. 그러나 1491년 브르타뉴의 안과 결혼한 이후 자신이 총애하던 에티엔 드 베스의 설득에 의해 보죄 부부의 섭정에서 벗어났다.

브르타뉴 출신 여인과의 결혼으로 인해, 전에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의 약혼을 통해 획득했던 아르투아와 프랑슈콩테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다. 또한 에타플 조약(1492)에 합의해 잉글랜드가 브르타뉴에 대한 이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잉글랜드의 헨리 7세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더욱이 1493년에는 바르셀로나 조약을 맺어 루시용과 세르다뉴를 아라곤에 되돌려주었다.

그가 이같이 영토를 양보하게 된 동기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한 여유를 갖고자 한 것이었다. 그 원대한 계획이란 자신이 앙주 왕가로부터 물려받았던 나폴리 왕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이탈리아 원정이었다. 이 터무니없는 야망 때문에 이탈리아와 일련의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50년이 넘게 계속된 이 전쟁은 막대한 자금과 인명 손실을 대가로 프랑스 왕들에게 일순간의 영광을 안겨주었을 뿐이었다. 샤를 8세는 대군을 일으키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린 후, 1494년 뒤에 적군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이탈리아를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가로질러 나갔다.

1495년 2월 22일 그는 의기양양하게 나폴리로 입성해 5월 12일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밀라노·오스트리아·베네치아, 그리고 교황이 샤를 8세에 맞서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샤를 8세는 포르노보 전투에서 간신히 탈출했으나 프랑스로 귀국할 무렵에는 정복지를 모두 상실했으며 또 한 차례의 원정을 준비하다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