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2세

루이 12세

다른 표기 언어 Louis XII
요약 테이블
출생 1462. 6. 27, 프랑스 블루
사망 1515. 1. 1,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루이 12세는 이탈리아를 차지하기위해 여러번의 원정을 감행하여 프랑스의 심각한 재정난을 초래했으나,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선왕 샤를 8세가 즉위하자마자 반란을 일으켜 투옥되었다가 이후 국왕의 총애를 얻어 1494년 이탈리아 전쟁 때 아스티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1498년 왕위에 오른 후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몇 번의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또한 베네치아와 맞서기 위해 1508년 교황과 아라곤 왕국, 신성로마제국과 캉브레 동맹을 맺었으나 배신당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세금 동결 및 세금 징수과정을 개선했고, 사법기구를 정비하고 개혁하며 최하층의 백성들을 보호하려 애썼다. 이러한 행보로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여 심각한 재난을 초래했으나 국민의 사랑을 받은 국왕이었다.

오를레앙 공 샤를과 마리 드 클레브의 아들로 태어나 1465년 부친의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1476년 루이 11세의 딸 잔과 어쩔수 없이 결혼했는데 그와 사촌 지간인 잔은 성스러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불구의 몸이었다. 그는 국왕 샤를 8세의 미성년기에 반란을 일으켜 투옥되었다(1488)가 이후 다시 국왕의 총애를 얻어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 아스티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이탈리아 전쟁).

샤를 8세의 사망후 왕위에 오른 그는 브르타뉴 공국과 자신의 왕국을 통합할 목적으로 샤를 8세의 미망인인 브르타뉴의 안과 결혼하고 잔과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었다.

그의 다음번 관심사는 밀라노 공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의 군대는 의도적으로 폭력을 조장하면서 1499년 여름 경쟁자인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밀라노에서 축출했다. 그러나 스포르차는 그해 겨울 밀라노를 다시 장악했다.

샤를 8세가 주장하던 나폴리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자신도 계속 밀고 나가면서 루이 12세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나폴리 분할을 위해 1500년 그라나다 조약을 맺었다. 1501년 나폴리가 정복되었으나 1년 후 나폴리 분할 문제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아라곤은 전쟁을 벌였으며 결국 1504년 3월 프랑스는 나폴리 모두를 잃고 말았다.

그해 9월 안의 부추김으로 맺은 블루아 조약을 통해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는 루이 12세를 밀라노 공으로 인정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루이 12세는 자신에게 후손이 없을 경우 밀라노와 부르고뉴를 안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클로드와 그 약혼자인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후에 카를 5세로 즉위)에게 상속키로 약속했으며 브르타뉴는 클로드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브르타뉴를 잃게 될 가능성에 분노했으며 1506년 5월 루이 12세에 의해 투르에서 소집된 삼부회는 클로드가 루이 12세의 상속자로 추정되는 앙굴렘의 프랑수아와 약혼할 것을 주장했다. 제노바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재차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루이 12세는 1507년 6월 사보나에서 페르난도 2세를 만나 캉브레 동맹 결성을 위한 새로운 협약을 맺어 베네치아에 맞서기로 했다.

이 협약은 1508년 공식화됐는데 캉브레 동맹에는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막시밀리안 1세도 참가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동맹이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결국에는 가맹 세력들이 영국이 주도하는 신성동맹에 가담, 프랑스의 몇몇 지역으로 침공해 들어왔다. 루이 12세의 지나치게 야심만만한 계획들은 재난으로 끝이났다.

외교적인 면에서 그는 페르난도 2세와 교황 율리우스 2세로부터 각각 기만당했으며 자신의 딸 클로드의 결혼문제를 둘러싸고 막시밀리안 1세를 속임으로써 결국 막리밀리안 1세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루이 12세는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1506년 투르에서 삼부회가 열릴 때부터 그는 '국민의 아버지'로 불리워졌다. 그는 사법기구를 정비하고 개혁했으며 억압받는 최하층의 백성들을 보호하려 애썼다. 또한 1509년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수행해 나가면서도 직접적인 세금 인상을 단행하지 않았으며 치세말기까지 외세의 침략이나 내란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