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왕가

합스부르크 왕가

다른 표기 언어 The House of Habsburg

요약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1020년 현재의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에 세워진 합스부르크·하비히츠부르크 성에서 유래했다. 가문의 시조는 950년에 독일 왕 오토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트람 백작으로 추정된다.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최초로 독일 왕이 된 인물은 1273년 왕이 된 루돌프 1세이다. 루돌프 1세는 1282년 두 아들에게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물려주었다. 이때부터 오스트리아 왕실에 관여를 하게 되었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트리아 왕실의 오랜 관계가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거의 모든 유럽 왕실과 연결되어 유럽 최대의 왕가로 번성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해체를 가져왔다. 마지막 황제이자 왕인 카를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대한 주권은 1918년, 1921년에 상실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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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원
  2. 오스트리아와 독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출현
  3.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계 제국
  4. 18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
  5. 합스부르크-로렌 왕가

기원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슈트라스부르크 주교인 베르너와 그의 매부인 라트보트 백작이 1020년에 아르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르가우(지금의 스위스에 있음)지방에 세운 합스부르크 성 또는 하비히츠부르크 성('매의 성')에서 유래했다.

라트보트의 할아버지인 군트람은 이 가문의 조상 가운데 기록을 더듬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시조이다. 군트람은 아마도 950년에 독일의 왕 오토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트람 백작과 동일인물인 듯하다. 라트보트의 아들인 베르너 1세(1096 죽음)는 합스부르크 백작이라는 칭호를 가졌고, 베르너의 손자인 알브레히트 3세(1200경 죽음)는 취리히 백작 겸 상(上)알자스의 영주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2세(1232 죽음)는 라우펜부르크와 '발트슈테테'(슈비츠·우리·운터발덴·루체른)를 얻었지만, 그가 죽자 아들 알브레히트 4세와 루돌프 3세는 상속 재산을 분할했다. 그러나 루돌프 3세의 자손들은 1408년에 대가 끊기기 전에 라우펜부르크를 포함한 그들 몫의 유산을 알브레히트 4세의 자손들에게 팔아버렸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출현

알브레히트 4세의 아들인 루돌프 4세는 1273년에 독일 왕으로 선출되어 루돌프 1세가 되었다.

그는 1282년에 두 아들 알브레히트(뒤의 독일 왕 알브레히트 1세)와 루돌프(오스트리아 왕 루돌프 2세)에게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물려주었다.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오랜 관계가 시작되었다(→오스트리아).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인 오스트리아 루돌프 3세는 1306~07년 보헤미아 왕이었고, 그의 동생 프리드리히는 1314년 프리드리히 3세로서 독일 왕(바이에른의 루트비히와는 경쟁관계 또는 협력관계)이 되어 1330년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5세는 1438년에 헝가리의 왕과 독일 왕(알브레히트 2세) 및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아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라슬로도 1446년(실권을 가진 것은 1452년)부터 헝가리 왕이었고, 1453년에는 보헤미아 왕이 되었다. 라슬로를 끝으로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3세의 직계 남자 자손은 1457년에 대가 끊겼다. 한편 레오폴트 3세를 시조로 하는 슈타이어마르크파는 다시 이너오스트리아계와 티롤계로 나뉘었다.

이너오스트리아계의 프리드리히 5세는 1440년에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고, 1452년에 프리드리히 3세로서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

로마에서 대관식을 올린 황제는 그가 마지막이었다. 이리하여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방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세속적 지위를 얻었지만, 그당시 황제라는 칭호는 실제로는 독일 왕의 칭호보다 별로 영광스럽지 못했다. 독일 왕은 보헤미아 왕이나 헝가리 왕과 마찬가지로 선출직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1493년에 프리드리히가 죽은 뒤부터 1711년에 카를 6세가 즉위할 때까지 계속 신성 로마 황제의 칭호를 물려받았지만, 그 주된 이유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가 워낙 넓고 부유했기 때문에 다른 독일 선제후들에게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보를 황제로 선출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합스부르크 왕가 자체는 보헤미아 왕의 자격으로 단 한 표의 권리만 갖고 있었음). 프리드리히는 오래 살아서 아들 막시밀리안이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결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죽기 3년 전에는 티롤의 지기스문트가 막시밀리안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한 결과로서 오스트리아가 다시 통일되는 것도 보았다(1490)(스위스).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계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
합스부르크 왕가

프리드리히 3세 시대 이전에도 합스부르크 왕가는 다른 가문의 상속녀들과 혼인함으로써 독일과 중부 유럽 지역에서 높은 지위를 얻었다.

프리드리히의 아들 막시밀리안은 1477년에 부르고뉴 공작 샤를의 상속녀인 마리와 결혼했다. 그결과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펠리페는 샤를의 영토를 대부분 물려받았다. 부르고뉴 공국 자체는 프랑스인들이 점령했지만, 아르투아·네덜란드·뤽상부르 및 부르고뉴 백작령(또는 프랑슈콩테)은 모두 합스부르크 왕가가 물려받았다.

1482년에 마리가 죽은 뒤 막시밀리안은 첫 결혼과 비슷한 정략 결혼을 통해 브르타뉴를 얻으려고 했다(그러나 브르타뉴의 상속녀인 안과 결혼하려던 그의 계획은 프랑스에 의해 좌절되었음). 브르타뉴는 얻지 못했지만 막시밀리안은 1496년에 아들 필리프를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상속녀가 될 후아나와 결혼시켰다.

이리하여 그의 가문은 스페인과 그 영토인 나폴리·시칠리아·사르데냐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정복하기 직전인 막대한 영토까지 확보했다. 막시밀리안이 결혼을 통해 얻은 성과는 유명한 6보격 시 "Bella gerant alii, tu felix Austria nube"(다른 나라들은 전쟁을 치르게 하라. 그대, 운 좋은 오스트리아는 결혼을 하라)를 낳았다.

카스티야의 펠리페 1세가 일찍 죽은 뒤, 그의 아들 카를로스는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와 스페인을 다스렸고, 1519년에는 막시밀리안의 뒤를 이어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같은 해 그는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어 카를 5세가 되었다. 카를이 무난히 황제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막대한 뇌물을 써야 했을 뿐만 아니라, 힘으로 위협할 필요도 있었다. 독일 군주들은 대부분 그렇게 강력한 군주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게다가 이미 북동쪽에서 남서쪽까지 카를의 영토에 반쯤 둘러싸인 프랑스는 카를이 황제로 선출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다.

막시밀리안이 부르고뉴 공국의 상속녀와 결혼한 뒤부터 18세기 중엽까지 프랑스 왕과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에는 적개심이 끈질기게 지속되어 합스부르크 왕가에 점점 더 많은 손해를 주었고, 17세기 후반까지 다른 유럽 열강들은 대체로 프랑스에 동조하게 되었다. 16세기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너무 막강해서, 시샘과 불안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카를 5세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의 책무는 한 사람이 떠맡기에는 너무 컸다.

이 점은 황제 자신도 인정할 정도였다. 브뤼셀 조약(1522)으로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동생에게 양도했다. 이 동생은 나중에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되었다. 1521년에 페르디난트는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로요슈 2세의 딸인 안나와 결혼했다.

로요슈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투르크군에 패한 뒤 1526년에 때 이르게 세상을 떠나자, 페르디난트는 헝가리 왕위후보로 나서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왕으로 선출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16세기가 끝나기 전에 전성기에 이르렀다. 카를 5세는 1535년에 병합한 밀라노 공국을 1540년에 아들에게 양도했다. 이 아들은 나중에 스페인 왕위에 올라 펠리페 2세가 되었다.

펠리페 2세는 1580년에 포르투갈을 정복했으며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스페인 영토도 계속 넓어지고 있었다.

카를 5세는 말년에 왕위에서 물러나 부르고뉴·스페인·이탈리아를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양도했고, 황제 자리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넘겨주었다. 페르디난트는 카를 5세가 죽은 뒤(1558) 정식으로 형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 로마 황제 계열과 스페인 계열로 완전히 양분되었다.

페르디난트의 남자 자손들은 1740년까지 신성 로마 황제였고, 펠리페의 자손들은 1700년까지 스페인의 왕이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598년에 죽을 때까지 서방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군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네덜란드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고, 그의 적인 영국·프랑스는 이 반란에 불을 붙여 펠리페 2세를 괴롭히려 했다(80년전쟁).

17세기에도 황제 계열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스페인 계열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협력관계를 유지했지만, 16세기에 왕가가 누렸던 주도권을 지키지는 못했다.

황제 계열을 살펴보면, '미친 황제' 루돌프 2세와 그 형제들 사이의 집안 싸움이 끝났을 때도(1612) 독일과 중부 유럽의 종교 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1618년에 일어난 보헤미아 반란은 일련의 전쟁을 초래했는데, 합스부르크 왕가가 말려든 이 전쟁은 1648년까지 오랫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흔히 30년전쟁이라고 부른다. 스페인 계열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살펴보면, 1609년에 네덜란드와 맺은 휴전 협정이 1621년에 끝나자마자 네덜란드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30년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베스트팔렌 평화조약(1648)으로 네덜란드 북부에 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권은 폐지되었고, 독일 군주들에 대한 신성 로마 황제의 권한은 크게 제한되었으며, 알자스에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는 프랑스로 넘어갔다. 그후 30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는 진정한 의미에서 더이상 유럽의 패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황제 계열은 1683년에 오스만 제국의 빈 공략이 초래한 위기를 모면한 뒤 1687년에는 헝가리 왕위를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습 칭호로 전환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가는 더이상 합스부르크 왕가가 아니라 부르봉 왕가였다.

부르봉 왕가가 우위에 올라섰다는 점말고도 다른 열강들이 스페인의 운명을 염려하는 눈으로 지켜볼 만한 이유는 또 있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는 워낙 약했기 때문에, 아들을 얻으리라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다. 그의 후계자 문제는 유럽 열강들의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1699년까지는 바이에른 선제후인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약속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699년에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죽자, 빈사 상태인 카를로스 2세의 후계자가 될 만한 친척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결혼한 이복 누이의 자손이나 두 고모의 자손이었다.

두 고모 가운데 한 고모는 루이 14세의 어머니였고, 또 한 고모는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어머니였으므로 크나큰 긴장이 고조되었다. 한편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물론, 우방인 영국과 네덜란드도 그들의 적인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 영토를 모두 차지하는 것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 영토를 장악하는 것 또한 여러 나라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한편 카를로스 2세는 자신의 영토를 분할하는 것을 스페인의 굴욕으로 여겼다. 그는 1700년에 죽으면서, 부르봉 왕가의 왕자이며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인 앙주 공작 펠리페를 유일한 후계자로 지명했고, 결국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다.

18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

합스부르크 왕가
합스부르크 왕가

레오폴트 1세와 그의 맏아들(뒤의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1세)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의혹을 가라앉히기 위해 1703년에 스페인에 대한 권리 주장을 포기하고, 요제프의 동생 카를이 스페인 왕위에 올라 황제 계열과는 완전히 분리된 합스부르크 왕가의 2번째 스페인 계열을 창시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그러나 요제프 1세가 딸만 남긴 채 1711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동생 카를이 뒤를 이어 신성 로마 황제(카를 6세) 겸 오스트리아·보헤미아·헝가리의 통치자가 되었다.

한편 스페인 계열의 대가 끊기고 1711년에 형 요제프마저 죽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남자가 된 카를은 자신의 사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는 신성 로마 제국을 다스릴 수 없었고, 게다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 가운데 일부는 남자만 상속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가 분할되는 것을 막기 위해 1713년 4월 19일에 유명한 국사 조칙을 발표했다. 이 조서는 그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을 경우 모든 영토는 ①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그의 딸에게 넘어가고 그 다음에는 그 딸의 자손들에게 넘어가야 하며, ② 그가 딸도 낳지 못하고 죽을 경우에는 똑같은 조건에 따라 죽은 형의 딸들에게 넘어가야 하고, ③ 조카딸의 대가 끊길 경우에는 고모의 상속자들에게 넘어가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740년에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침략에 직면해야 했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다. 이어서 바이에른이 독일에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누리고 있던 지위에 도전했다. 프랑스가 바이에른을 지원하자 작센도 바이에른의 선례를 따랐고,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롬바르디아에서 몰아내려고 애썼다. 영국은 국사 조칙에 대한 존중심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뒤늦게야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원하러왔다.

합스부르크-로렌 왕가

합스부르크-로렌 왕가
합스부르크-로렌 왕가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의 대부분과 롬바르디아의 일부, 파르마 공국과 피아첸차 공국을 잃었다(아헨 조약, 1748). 그러나 부친이 물려받은 세습 영지 가운데 나머지는 그대로 보유할 수 있었다.

게다가 1737년에 토스카나 대공의 지위를 상속한 그의 남편인 로렌의 프란츠 슈테판이 마침내 신성 로마 황제로 승인을 받아 프란츠 1세라는 칭호를 얻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로이센의 계획에 맞서서 독일에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중부 유럽에 있는 왕가의 영토를 강화하고 확대하려고 애썼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중부 유럽에 갖고 있는 영토가 북동쪽으로 팽창한 것은 프란츠 1세의 아들 요제프 2세 시대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요제프 2세가 주도권을 행사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결과였다.

제1차 폴란드 분할(1772)로 그는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를 얻었지만, 슐레지엔을 기억하고 있는 그의 양심적인 모친 마리아 테레지아는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계획한 이 분할 결과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후(1775) 러시아와 투르크가 맺은 퀴취크카이나르카 조약(1774)의 부수적인 결과로 획득한 부코비나는 원래 영토인 트란실바니아와 새로 얻은 갈리치아의 영토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여 지정학적으로 볼 때 중요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복잡한 일련의 변화를 초래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미래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변화는 다음 3가지로 ①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이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레오폴트 2세의 후계자인 프란츠 2세가 1804년에 자신을 '오스트리아의 세습 황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신성 로마 제국 해체를 내다본 것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1세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칭호만은 계속 보유할 수 있었다. ② 1797년에 합스부르크 왕가는 네덜란드 남부를 최종적으로 포기했다.

③ 근대적인 의미의 민족주의 정신이 눈을 띄인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빈 회의(1814~15)는 왕정 복고를 시작했고, 만신창이가 된 합스부르크 왕가는 여기서 자연히 이익을 얻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는 롬바르디아(1797년에 빼앗김)·베네치아·달마치야(둘 다 1797년에 얻었다가 1809년에 빼앗김)·티롤(1809년에 빼앗김)을 되찾았다.

빈 회의가 끝난 뒤 1세기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가 걸어온 역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민족주의 세력이 차츰 잠식하는 보수적 군주주의의 보루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처음으로 영토를 잃은 것은 1859년이었다. 그 해에 오스트리아는 갑자기 등장한 이탈리아 왕국의 핵심인 사르데냐-피에몬테에 롬바르디아를 할양할 수밖에 없었고, 그 세력이 합스부르크 왕가에게서 토스카나와 모데나를 빼앗는 것도 막을 도리가 없었다.

1866년의 7주전쟁 때 프로이센은 게르만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고, 오스트리아는 옛날부터 독일에서 누린 지배권을 되살리겠다는 희망을 포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도 이탈리아에 할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재난이 끝난 뒤,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다민족 국가인 그의 제국을 통합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867년에 그는 헝가리를 회유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에 오스트리아 제국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고, 이때부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동등한 자격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국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마자르족은 자기들만 오스트리아의 게르만족과 동등한 지위를 유지하고, 헝가리 왕국의 비(非)마자르족에 대한 우위를 잃지 않으려고 세심하게 경계한 나머지, 이중 군주국에 사는 슬라브족과 루마니아인도 그와 비슷한 조치로 회유하자는 제안을 모두 거부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게르만족과는 반대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열렬한 게르만 민족주의자들은 마자르족과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 막시밀리안(1864년에 프랑스에 의해 멕시코 황제에 추대되었으나, 1867년에 총살당했음)의 운명은 오스트리아의 국가적 관심사에서는 동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합스부르크 왕가에는 큰 상처를 주었다.

1889년에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한 것도 합스부르크 왕가에 커다란 아픔을 안겨주었다. 비록 루돌프가 제국과 왕위를 계승하기에 적절한 인물은 아닐지라도, 그의 자살은 막시밀리안의 비참한 운명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국과 더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황제 계열과 토스카나 계열의 일부 대공과 대공비의 비행에 따른 추문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신을 더욱 손상시켰다. 프란츠 요제프의 아내인 비텔스바흐 왕가의 엘리자베트가 1898년에 암살당한 뒤, 20년도 채 지나기 전에 그보다 훨씬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187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는 쇠퇴하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했고 1908년에는 정식으로 합병했는데, 그 합병 방법은 보스니아를 탐내고 있던 세르비아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의 후원자인 러시아에도 매우 모욕적인 것이었다. 1914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추정 상속인(1875년부터는 모데나에 대한 오스트리아-에스테 왕가의 소유권을 갖게 된 유산 상속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그로부터 1개월 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체크인·슬로바키아인·폴란드인·루마니아인·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이탈리아인이 모두 제몫의 전리품을 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마지막 황제이자 왕인 카를에게는 '게르만족'의 오스트리아와 진정한 의미의 헝가리밖에 남지 않았다.

1918년 11월 11일 카를은 오스트리아가 장래의 국가 형태를 결정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어떤 식으로도 국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포고문을 발표했다. 헝가리 의회는 1921년 11월 3일에 카를의 주권과 국사 조칙을 폐지한다는 법령을 발표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트리아에 갖고 있던 재산권은 1919년에 법으로 몰수되었다가 1935년에 회복되었지만, 1938년 히틀러에게 다시 빼앗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6년 1월에 오스트리아의 연합국 통제 위원회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어떠한 복귀도 금지하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조치를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1919년의 법률은 1955년의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에 포함되었다.

1961년 6월에 오스트리아 정부는 일반 시민으로 오스트리아에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인 오토 대공의 신청을 거부했지만, 1963년에 오스트리아 행정 법원은 오토 대공의 신청이 합법적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사회당이 그의 귀환에 반대했기 때문에, 오토는 인민당이 총선에서 다수를 차지한 뒤인 1966년 6월에야 겨우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