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레지엔

슐레지엔

다른 표기 언어 Schlesien

요약 슐레지엔은 폴란드의 한 지방이었으나 1335년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1526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742년 프로이센으로 넘어갔다가 1945년 폴란드에 반환되었다.
오데르 강의 상류와 중류 유역이 슐레지엔의 대부분을 이룬다. 남서쪽은 주데텐 산맥, 남쪽은 베스키드 산맥, 북동쪽은 크라쿠프비엘룬 고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오늘날 슐레지엔은 폴란드·독일·체크의 3개국에 걸쳐 있다. 폴란드령 슐레지엔은 각각 카토비체·비엘스코비아우아·오폴레·브로추아프 등을 주도로 하는 9개주로 나누어져 있다. 독일령은 브란덴부르크 주와 작센 주의 일부를 이루며, 체크령은 북모라비아의 일부를 이룬다. 슐레지엔의 최대 도시는 브로추아프이다. 현재 폴란드 전체 인구의 약 1/4이 슐레지엔에 살고 있다.

슐레지엔(Schlesien)
슐레지엔(Schlesien)

슐레지엔은 원래 폴란드의 한 지방이었으나 1335년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1526년에 이 왕국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742년에 프로이센으로 넘어갔다가 1945년 폴란드에 반환되었다. 남동-북서 방향으로 흐르는 오데르 강의 상류와 중류 유역이 슐레지엔의 대부분을 이룬다. 이 지방의 남서쪽은 주데텐 산맥(수데티 산맥), 남쪽은 베스키드 산맥, 북동쪽은 크라쿠프비엘룬 고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오늘날 슐레지엔은 폴란드·독일·체크의 3개국에 걸쳐 있다. 폴란드령 슐레지엔은 각각 카토비체·비엘스코비아우아·오폴레·브로추아프(브레슬라우)·바우브지흐·레그니차·옐레니아구라·지엘로나구라·칼리슈를 주도로 하는 9개주로 나누어져 있다.

나머지 독일령은 브란덴부르크 주와 작센 주의 일부를 이루며, 체크령은 북모라비아의 일부를 이룬다. 슐레지엔의 최대 도시는 브로추아프이다.

9세기까지 슐레지엔에는 슬라브계의 부족들만이 거주했는데, 북부에는 지아도샤니에족·보브자니에족, 남부에는 실렝자니에족(여기에서 이 지역의 폴란드식 명칭인 실롱스크가 유래됨)·오폴라니에족·골렌시초비에족 등이 거주했다. 10세기에는 체크의 프르제미스리트 왕조와 폴란드의 피아스트 왕조 사이에 이 지역에 대한 영토 분쟁이 있었다.

폴란드의 군주 미에슈코 1세는 989~992년에 보헤미아의 군주 볼레슬라프로부터 이 지역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폴란드 왕 볼레수아프 1세는 1000년에 이곳에 주교구를 세움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확고히 했다. 주교관구는 처음에는 스모고주프였다가 이후에 브로추아프로 옮겨졌다. 1138년 폴란드 왕 볼레수아프 3세가 죽은 뒤 승계 다툼으로 인해 결국 1163년 슐레지엔은 상(上)슐레지엔(구르니실롱스크, 남동부)과 하(下)슐레지엔(돌니실롱스크, 북서부)으로 분할되었으며, 각각 피아스트가(家)의 군주에 의해 통치되었다.

1203년에는 3번째 슐레지엔 공국이 수립되었다. 그후 하슐레지엔의 군주들인 헨리크 1세와 그의 아들 헨리크 2세가 영토를 재통합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헨리크 2세는 1241년 레그니차(리그니츠)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이 전투는 헨리크 2세가 거느린 폴란드와 독일의 기사들로 구성된 군대가 슐레지엔 공국을 황폐화시켰던 몽골의 침략을 저지한 중요한 일전이었다. 슐레지엔을 다스렸던 피아스트가의 모든 통치자들은 게르만족의 이주를 장려했다.

게르만족은 이 지역의 농업 생산성을 증대시키고, 탄광업과 섬유 제조업을 발달시켰으며 신도시들을 세웠다. 이에 슐레지엔 주민은 점차로 게르만족의 특성을 띠게 되었다.

슐레지엔의 피아스트 왕족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기존의 3개의 공국이 계속 분할되어 15세기말에는 공국이 16개에 이르게 되었다. 슐레지엔의 소군주들은 그들의 형제들과 사촌들에 대항하기 위해 종종 강력한 보헤미아의 왕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결과 보헤미아 왕들은 슐레지엔에 대한 옛 종주권 주장을 되살릴 수 있었다.

1335년 헝가리의 카롤리 1세가 내린 중재 결정에 따라 슐레지엔 전지역이 보헤미아 왕가에 양도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단지 종주권의 변화일 뿐 슐레지엔의 군주들은 계속 자신들의 공국을 다스렸으며, 가끔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도 보헤미아 왕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슐레지엔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그문트가 보헤미아의 후스파와 싸울 때 신성 로마 제국의 편을 들었는데, 그결과 1425~35년의 후스 전쟁에서 크게 파괴되었다.

슐레지엔과 보헤미아 왕가의 관계가 소원해짐에 따라 이 지역은 1469~90년에 헝가리의 통치를 받았으나 그후 다시 보헤미아로 넘어갔으며, 나중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1526년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하면서 합스부르크가로 넘어갔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슐레지엔은 거의 완전히 프로테스탄트로 개종되었으며, 30년전쟁(1618~48) 때 프로테스탄트의 보헤미아 및 작센과 합세하여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했다.

그 싸움에서는 패했지만 전후 슐레지엔의 개신교도들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광업과 섬유업의 발전으로 슐레지엔은 합스부르크가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의 지방 가운데 가장 부유한 곳이 되었다.

슐레지엔의 이러한 풍요로움을 탐낸 프로이센의 대제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48) 때 오스트리아의 후계자인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이 지역을 빼앗으려고 했다.

프로이센이 승리한 후 오스트리아는 크르노프(재게른도르프)·오파바(트로파우)·치에신(테셴) 등 슐레지엔의 최남단 남동지역만을 얻었다. 이 지역은 1849년에 이르러 모두 모라비아에 통합되었으며 그뒤 별개의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슐레지엔의 독일인과 개신교도들이 프로이센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임에 따라 프로이센은 보다 효율적인 행정정책과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적절한 시기에 석탄·철광석·납·아연 등의 광업과 제조업이 확대되어 독일에서 2번째로 중요한 공업지대가 되었다.

북서부의 하슐레지엔은 이무렵 거의 완전히 독일인 거주지가 되었다. 남동부의 상슐레지엔은 주민의 혼성지대로, 독일인은 도시에 집중되었고 폴란드인은 주로 농촌에 거주했다. 대부분의 광부와 비숙련 산업근로자들은 폴란드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한 뒤 슐레지엔 지역에 대한 영토권을 둘러싼 여러 상충된 요구들이 연합군 사령관에게 제출되었다.

전에 오스트리아령이었던 치에신과 오파바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 쉽게 분할되었지만, 상슐레지엔의 주요지역을 두고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 슐레지엔 문제에 관한 최종적인 수정에 따른 베르사유 조약(1919)은 주민들이 독일과 폴란드 가운데 어느 쪽에 속하기를 원하는지를 국민투표로 결정하도록 했다.

국민투표(1921. 3. 20) 결과 투표자 가운데 약 70만 6,000명이 독일을, 약 47만 9,000명이 폴란드에 찬성표를 던졌다. 전체적으로는 792개 자치체가 독일을, 682개 자치제가 폴란드를 지지했으나, 폴란드인들은 슐레지엔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남동부 지역의 투표권 대다수를 확보했다. 1921년 5월 슐레지엔에 거주하는 폴란드인들이 일으킨 무장봉기는 1921년 10월 20일 연합군이 상슐레지엔의 남동부 지역을 신생국 폴란드령으로 승인하면서 끝났다. 이 지역에는 슐레지엔에서 생산되는 석탄 생산의 약 3/4, 제강소의 2/3가 있었다.

한편 하슐레지엔은 완전히 독일로 넘어갔다.

1939년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정복하면서 상슐레지엔을 재탈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슐레지엔의 많은 폴란드 지식인들을 죽이거나 추방하고 이곳에 독일인들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독일 점령하의 슐레지엔은 1945년초 소련 적군의 침략을 받았다.

1945년 8월 연합군은 슐레지엔의 거의 모든 지역을 폴란드에 할양하고, 이 지역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을 연합군 관리하에 독일로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소련군과 폴란드인들은 슐레지엔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을 서쪽으로 추방했으며, 이 과정에서 과거 독일인들이 슐레지엔의 폴란드인들에게 행했던 행위만큼이나 가혹한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30만 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슐레지엔을 떠났으며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이주한 폴란드인들이 다시 정착했다. 황폐해진 산업은 이후 복구되었다.

현재 폴란드 전체 인구의 약 1/4이 슐레지엔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