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부르고뉴

다른 표기 언어 Bourgogne
요약 테이블
위치 프랑스 중동부
인구 2,783,039명 (2020년 추계)
면적 31,582㎢
언어 프랑스어
대륙 유럽
국가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중부 코트도르, 손에루아르, 니에브르, 욘 주들을 포함하는 계획지역. 혁명 전의 부르고뉴 지역을 포함하며 중심도시는 디종이다. 파리 분지가 부르고뉴 북서쪽으로 뻗어있으며 마시프상트랄이 남쪽으로 융기해 있다.

목차

접기
  1. 지리
  2. 역사
디종(Dijon)
디종(Dijon)

혁명 전의 부르고뉴 지역을 포함하며 중심도시는 디종이다. 북쪽으로 센에마른, 오브, 오트마른 주와 면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오트손, 쥐라, 앵 주, 남쪽으로는 론, 루아르, 알리에 주, 그리고 서쪽으로는 셰르 및 루아레 주와 접한다.

지리

파리 분지가 부르고뉴 북서쪽으로 뻗어있으며 마시프상트랄이 남쪽으로 융기해 있다. 이 지방의 인구밀도는 그리 높지 않다. 프랑스에서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에 현저했던 탈농현상은 특히 부르고뉴 지방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 결과 이 지방은 1872~1946년에 1/4가량이 줄어들어 전국평균을 훨씬 밑돌게 되었다.

파리·론알프·프랑슈콩테 등지로 인구가 유출되어 노동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농가의 집중화가 이루어져 농가의 규모는 전국평균보다 웃돈다.

코트도르, 욘, 루아르 강 연안에는 포도재배가 성하다. 마시프상트랄 지역에서는 비육우를 기른다. 임업도 중요한 산업이다. 산업활동은 손에루아르와 코트도르에 집중되어 있다. 손에루아르의 블랑지에서는 석탄이 채굴되며 그 결과 인근의 크뢰조에서는 중공업이 발달했다. 디종·마콩·샬롱쉬르손에서는 기계장비를 제작하며 이 지역의 주요한 제조업이 되고 있다.

역사

부르고뉴인은 스칸디나비아 계열의 사람들로서 원 고향은 발트 해의 남안에 있었다.

1세기경에 부르고뉴인들은 비스툴라 강의 하류 유역으로 이동했으나 게피다이족들을 막아내지 못해 서쪽으로 이동하여 로마 제국의 경계에 도달했다. 거기에서 로마 제국의 용병(foederati)으로 근무하면서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이 왕국은 5세기초에 이르러 라인 강 서안까지 영토를 확장했고 나중에 제네바 호 근처의 사파우디아(지금의 사보이)를 활동의 주무대로 삼았다.

5세기 후반 로마 제국의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부르고뉴인들은 서서히 인근 지역의 지배를 강화하여 사보이의 북쪽과 서쪽으로 확장해나갔고 이어 론 강과 손 강 유역에까지 진출했다.

이 부르고뉴 왕국의 세력은 법을 제정한 그리스도인 왕 군도바트(474~516)치하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군도바트는 부르고뉴인들을 위해 군도바트 법을 마련했고 골족과 로마 출신의 백성을 위해 군도바트 로마법을 제정했다.

이 왕국은 534년까지 독립왕국으로 존속하다가 그 뒤 프랑크족에 의해 점령되면서 법통이 끊어졌다.

그러나 561년 프랑크 왕 클로타르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가의 사람들에 의해 분할되었으며 클로타르의 아들인 군트람이 부르고뉴 왕국을 차지했다. 이 왕국의 영토는 기존 부르고뉴 왕국의 영토를 그대로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프로방스에 있는 아를 주교관구, 알프스 동쪽의 발다오스타, 그리고 프랑스 중북부의 상당한 지역을 포함했다.

이 왕국은 독립된 메로빙거 왕국으로 남아있다가 8세기에 들어와 샤를마뉴의 할아버지인 샤를 마르텔에 의해 점령당해 프랑크 오스트라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그뒤 카롤링거 왕조가 부르고뉴를 여러 지역으로 분할하여 통치했으나 879년에 비엔누아의 통치자인 보소가 오툉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부르고뉴 전지역을 복속시키고 자신을 부르고뉴의 왕으로 선포했다.

프랑스를 다스리던 카롤링거 왕족이 그 뒤 손의 서쪽과 리옹의 북쪽 지역을 그로부터 돌려받았고 독일을 다스리던 카롤링거 왕족은 상부 부르고뉴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보소와 그의 후계자들은 933년까지 프로방스 왕국(하부 부르고뉴)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888년 독일 벨프 가문의 루돌프 1세(912 죽음)가 상부 부르고뉴의 왕이 되었는데 당시 이 왕국은 현재의 스위스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루돌프 2세는 931년에 바소 아들의 후계자인 맹인왕 루이와 조약을 맺어 손 서쪽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부르고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통일된 상부 부르고뉴와 하부 부르고뉴는 1032년에 독일왕이며 황제인 콘라트 2세에게 넘어갔으며 13세기부터는 아를 왕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부르고뉴라는 이름은 시스쥐라 부르고뉴와 부르고뉴 공작령을 가리키는 말로만 쓰이게 되었다.

부르고뉴 공작령은 원 부르고뉴 왕국에서 빠진 손 서쪽 지역을 가리키며 프랑스를 지배하던 카롤링거 왕족이 바소로부터 되찾은 지역으로서 그 뒤 프랑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보소의 동생인 리샤르(오툉 공)는 자신의 영향력하에 이 지역의 경영에 힘을 기울였다. 921년에 그를 계승한 그의 아들 라울은 923년에 프랑스 왕으로 선출되었다. 936년 라울이 죽자 카롤링거 계열의 루이 4세이며 프랑크 공인 위그 대왕은 부르고뉴에서 상스, 트루아, 그리고 랑그르(일시적으로) 지역을 떼어냈다.

이렇게 하여 10세기에 비해 영토가 더욱 축소된 부르고뉴 공작령은 1361년까지 카페 가문의 지배아래 더욱 강성해지게 되었다.

이들은 대외정책으로서 그들의 사촌인 프랑스 국왕들에게 절대 충성하는 것을 제일로 삼았고 내치정책으로서는 공작령의 영토를 늘리고 가신들로부터 충성을 요구했다. 그 결과 부르고뉴는 프랑스 왕실의 제일가는 동맹세력이 되었다(카페 왕조).

이 기간 동안 부르고뉴 공작령과 시스쥐라 부르고뉴는 번성했다.

도시들도 발달하여 디종은 중요한 상업중심지가 되었다. 순례자들은 베즐레와 오툉으로 몰려들었는데 이들 지역에 1146년에 성 라자로의 무덤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부르고뉴의 수도원들도 유명해졌다. 클뤼니 수도원(910 창설)은 잉글랜드에서 스페인까지 이르는 지역에서 수도승 종단의 중심지가 되었다. 1098년에는 시토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그와 함께 시토 수도회라는 새로운 종단이 생겨났다.

1335년에 이루어진 두 부르고뉴의 통일은 1361년에 깨어졌다.

당시의 프랑스 국왕 선량왕 장 2세는 부르고뉴 공작령을 왕실 직영지로 병합했고 시스쥐라 부르고뉴(또는 프랑슈콩테)는 플랑드르 독립영지에 귀속되었다. 부르고뉴 공작령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선량왕 장 2세로부터 시작되었고 선량왕은 다시 이 공작령을 1363년 자신의 아들인 필리프 2세에게 주었다. 1369년 필리프 2세는 시스쥐라 부르고뉴의 상속녀인 플랑드르의 마르가레트와 결혼했다.

1384년 장인이 사망하자 필리프 2세는 느베르·르텔·아르투아·플랑드르, 그리고 시스쥐라 부르고뉴(프랑슈콩테)를 상속받았다. 2개의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남부 지방을 구성했고 북부 지방은 네덜란드, 뫼즈 강 유역, 아르덴까지 확대되었다. 북부 지방은 영토 확장이 계속되어 에노(1428)·브라반트(1430)·뤽상부르(1443) 등이 프랑스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남부 지방은 느베르가 다시 잘려나가고 그 뒤로 점점 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부르고뉴에 살았던 대머리왕 필리프 2세는 1390년에 샤롤레 남부 영토를 사들였다.

이 1404년에 필리프 2세를 계승하여 정적인 오를레앙 공 루이와 쟁투에 나섰다.

아르마냐크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루이의 일파는 1412~35년에 부르고뉴 남쪽 경계지역을 초토화했다. 장은 1419년에 암살되고 그의 아들 필리프 3세가 아르마냐크 일파들과 투쟁을 계속했고 잉글랜드와의 백년전쟁 동안에는 잉글랜드 측을 지원했다. 아라스 조약(1435)은 부르고뉴와 프랑스의 샤를 7세 사이에 평화를 협정한 것으로서 부르고뉴의 영토 보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렇지만 용병대들이 1445년까지 부르고뉴를 약탈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1467년의 필리프 3세의 사망시까지 평화를 누렸다. 그 다음 공작인 샤를은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샤를의 목표는 로렌 지방을 합병하여 공작령의 남부와 북부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부르고뉴 왕이라는 칭호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루이 11세의 방해를 받아 좌절되었고 실제로 루이 11세는 샤를을 토벌하기 위해 여러 번 원정전을 벌이고 부르고뉴를 상대로 경제봉쇄령을 내리기도 했다.

2개의 부르고뉴는 1348년 흑사병으로 피폐해졌으며 백년전쟁 동안 용병대의 약탈로도 시달렸다.

이 때문에 인구가 격감했고 이익이 많이 나는 곡식·포도주·모제품 등의 생산이 위협을 받았으며 상품교환시장으로서의 중요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2개의 부르고뉴 지방은 14~15세기에 여타 유럽 지역에 비해 훨씬 안정을 누렸다.

1477년 샤를이 죽자 상속녀인 부르고뉴의 마리가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과 결혼했다. 그녀가 루이 11세의 아들인 샤를(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과 결혼해주기를 희망한 프랑스 측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샤를이 마리의 딸인 마르가레트와 약혼하자 아라스 조약(1482)에 의해 프랑슈콩테가 샤를에게 양도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 약혼을 파혼하자 상리스 조약(1493)에 의해 이 땅을 다시 오스트리아에 돌려주었다.

그뒤 185년 동안 프랑슈콩테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유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후기 왕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생장드론 조약(1522)에 의해 부르고뉴 지방의 중립이 보장되었다.

이 지방의 찬연한 르네상스식 건축물들을 보면 산업발전에 따른 도시 번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 독일과 스위스로부터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살고 있는 이 지역에 프로테스탄트들이 유입해오자 소요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샤를 5세가 1556년 자신의 영토를 분할하면서 프랑슈콩테 지방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갔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휘하에서 강력한 프로테스탄트 단속이 시작되었고 프랑스 왕 앙리 4세는 펠리페 2세와의 전쟁 중에 프랑슈콩테의 중립성을 침범했다.

1598~1635년에는 부르고뉴 지방에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 포위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 지방을 프랑스에 병합하려 했다. 루이 13세는 1636~39년 동안 이 지역을 해마다 침공했으나 결국에는 베스트팔렌 평화회의(1648) 때 합스부르크의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1668년 권한이양 전쟁 때에 콩데 대공에 의해 정복당했으나 부르고뉴는 엑스라샤펠 평화조약(1668.5.2)에 의해 스페인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프랑슈콩테는 네덜란드 전쟁 말기에 콩데 대공이 다시 정복했고 네이메헨 평화조약(1678)에 의해 프랑스의 땅으로 인정되었다. 루이 14세는 이 새로이 획득된 영토의 주도를 이전에 제국도시였던 브장송으로 옮겼다. 1790년 나머지 프랑스 지역과 마찬가지로 프랑슈콩테 지역은 쥐라·두브·오트손의 3개 주로 재편성되었다.

부르고뉴 공작 샤를의 사망(1477)후 부르고뉴 공작령은 프랑스 왕실에 의해 합병되었다. 또 16세기에는 종교전쟁에 의해 황폐해졌다. 도시들은 성채화되었고 용병들이 이 지역에 우글거렸다. 공작령은 30년전쟁 때에 또다시 초토화되었고 콩데 대공이 주도한 프롱드의 난(1648~53)이라고 알려진 귀족의 반란시에도 많이 파괴되었다.

1678년 프랑스가 부르고뉴를 합병할 때까지 이 지역에는 평화와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1631~89년 공작령은 콩데 공들이 통치했다. 프랑스 혁명이 벌어지면서 부르고뉴 지방은 사라지고 코트도르·손에루아르·욘 등 3개 주로 재편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