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표기 언어 Jean , John 동의어 John the Fearless, Jean sans Peur, 장 1세 드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요약 테이블
출생 1371. 5. 28, 프랑스 부르고뉴 루브르
사망 1419. 9. 10, 몽트로
국적 프랑스, 부르고뉴

요약 발루아 가문 출신의 제2대 부르고뉴 공작(1404~19).
(영). John. 별칭은 Jean sans peur(John the Fearless).

15세기초 프랑스 사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 사이의 아들인 그는 루브르에 있는 부르고뉴 공작의 성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대부분 그곳에서 보냈다. 1385년 바이에른의 마르가레테와 결혼했으며 이후 10년간 아버지로부터 통치술과 전쟁기술을 배웠지만 책임있는 요직을 맡지는 않았다. 1396년 24세가 되어서야 겨우 헝가리를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지키기 위한 부르고뉴의 지원군 지휘관이 되었으나 이는 명목상의 지위였다(십자군). 이 원정군의 실제 지휘관은 필리프 공작이 임명한 자문관과 군사고문관들이었다.

결국 부르고뉴군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했고 장은 투르크군에 사로잡혔다(여기서 보여준 그의 용감성 때문에 '두려움 없는 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음). 이 전투에서 저지른 지휘관들의 실수에서 장은 많은 것을 배웠으며, 그는 이후 부르고뉴의 발루아 가문 통치자들 가운데 군대 통솔 능력을 가진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오스만 제국, 발루아 왕조).

니코폴리스 전투 (Battle of Nicopolis)
니코폴리스 전투 (Battle of Nicopolis)

장은 33세 되던 해인 1404년에 마침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 및 부르고뉴·플랑드르·아르투아의 백작이 되었다.

장은 프랑스에 대해서만 온 정신을 쏟았으며 파리에 상주하고 그곳에 정부를 두었다. 그가 부르고뉴 공작으로서 프랑스 외의 중요한 사건에 직접 깊이 관여한 적은 1408년 단 한 번뿐으로, 당시 그는 리에주 시민의 공공연한 반란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처남인 리에주 주교 바이에른의 요한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갔다.

1408년 9월 23일 오테 평원에서 장은 리에주 시민들을 격파했고 이후 부르고뉴는 리에주 시와 리에주 주교좌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장은 처음부터 프랑스 문제에 깊이 간여해 있었고 사촌이자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이끄는 경쟁가문과 더불어 프랑스에서 내란을 촉발하는 데 한몫 했다. 루이와 장은 미친 왕 샤를 6세와 왕비를 조종하고 수도 파리의 지배권을 서로 장악하려고 분투했다.

1407년 장은 암살자를 고용해 루이를 살해하고 파리와 왕권을 장악했으나 루이의 후계자와 추종자들은 부르고뉴에 대해 저항을 계속했다. 그들은 그들의 주요지지자였던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이름을 따 아르마냐크파(派)라고 불렸다.

1413~18년의 5년간 아르마냐크파는 파리에서 부르고뉴파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프랑스의 내부사정은 야심만만한 새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의 침공으로 더욱 복잡해졌다.

장은 프랑스의 몇몇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는 잉글랜드군과 싸우려고 전장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척하면서도 까닭 없이 도중에 지체했다. 그는 간간이 헨리 5세와 협상을 벌였으나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을 다지지는 못했고 1419년 가을 아르마냐크파로 돌아서서 그들의 젊은 지도자인 도팽(왕세자) 샤를(훗날의 샤를 7세)과 휴전 또는 평화 조약을 맺고 대(對) 잉글랜드 동맹을 결성하려 했다.

아쟁쿠르 전투 (Battle of Agincourt)
아쟁쿠르 전투 (Battle of Agincourt)

이들 두 사람은 각기 수행원 10명씩을 거느리고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8㎞가량 떨어져 있는 몽트로의 다리에서 만났다. 협상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아르마냐크파가 소란을 피웠으며 장은 이에 휩쓸려 살해당했다. 그러나 당시의 증거들로 보면 이 정치적 암살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거의 확실했다(백년전쟁).

장은 당대의 다른 통치자들과 비슷한 과제를 추구해 자신과 가문의 세력을 확장·강화하려고 꾀했다.

그는 폭력에 호소했고 음모를 꾸미기를 즐겼으며 위선자였고 경솔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민한 외교가이자 군지휘관이었다. 그는 아들인 선량왕 필리프보다 더 활동적이고 개혁적이었으며 아버지만큼 용의주도하지 못했지만 더 간교했다. 그런데도 그는 아버지나 아들에 비해 역사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특히 프랑스 역사에서 오랫동안 장은 배신자이며 암살자로 간주되었다. 아마도 그의 성격 역시 어둡고 고약한 데가 있었던 듯하다.

그의 일생이 악행과 폭정·살인으로 점철되어 있었다지만 이는 그 시대의 모든 통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된 특성이다. 그는 프랑스에 파멸을 불러왔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영토 부르고뉴에는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