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로빙거 왕조

메로빙거 왕조

다른 표기 언어 Merovingian dynasty

요약 메로빙거라는 이름은 메로베치에서 유래했다. 메로베치는 프랑크족의 한 부족을 다스린 힐데리히 1세의 아버지였다. 481(또는 482)년 힐데리히의 뒤를 이은 아들 클로비스 1세는 프랑크족 전체에 세력을 떨쳤으며 최초로 갈리아를 통일하고 프랑크족의 국가를 세웠다. 그는 프랑크족을 그리스도로 개종했는데 이는 이후 유럽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511년 클로비스가 죽자 메로빙거 왕국은 4명의 아들 토이데리히 1세, 클로도머, 힐데베르트 1세, 클로타르 1세에 의해 거점별로 나뉘어졌고 이후 왕국은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게 되었다. 679년 토이데리히 3세에 의해 프랑크족은 다시 한번 통일을 이루게 되지만 메로빙거 왕국은 권력의 상당 부분을 왕실 관리인인 궁재에게 넘겨야 했고 이때부터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 dynasty)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 dynasty)

메로빙거라는 이름은 메로베치에서 나왔다. 메로베치에 관해서는 투르네를 수도로 해 살리 프랑크족의 한 부족을 다스린 힐데리히 1세의 아버지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481(또는 482)년 힐데리히의 뒤를 이은 아들 클로비스 1세는 살리 프랑크족 전체에 세력을 떨쳤으며 리푸아리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의 영토를 정복 또는 합병하고 부르고뉴와 지금의 프로방스를 뺀 대부분의 갈리아 지방을 결합했다.

또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496(또는 506)년 클로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실이다.

511년 클로비스 1세가 죽자 그의 4명의 아들 토이데리히 1세, 클로도머, 힐데베르트 1세, 클로타르 1세는 각각 왕국을 나누어 가졌다. 형제간에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자주 일으키기는 했으나 이들은 531년경에는 튀링겐, 534년에는 부르고뉴로 프랑크족의 세력을 넓혔다. 또한 완전히 점유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중해안의 셉티마니아·바이에른, 북쪽으로는 작센족의 영토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얻었다. 558년까지 다른 형제들이 모두 죽고 혼자 남은 클로타르 1세는 다시 한번 왕국을 통일했으나 561년에는 그도 죽었다.

561년 프랑크 왕국은 다시 형제들인 카리베르트 1세, 군트람, 지그베르트, 힐페리히 1세에게 각각 분할되었으며, 특히 갈리아 북서부의 힐페리히, 그의 아내 프레데군트와 북동부의 지그베르트, 그의 아내 브룬힐트 사이의 싸움을 비롯해 가문간의 싸움과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왕조 내의 불화와 이웃 민족들(서쪽의 브르타뉴족·가스코뉴족, 남동쪽의 롬바르드족, 동쪽의 아바르족)의 점점 심해지는 압력 때문에 프랑크 왕국의 재편성이 촉진되었다. 결국 몇몇 동부 지역은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에 합병되어 수도를 메스(메츠)로 정했으며 서쪽에는 네우스트리아 왕국이 나타나 처음에는 수아송을, 뒤에는 파리를 수도로 삼았다.

남쪽에서는 부르고뉴 왕국이 땅을 더 넓혀 샬롱쉬르손에 수도를 두었다.

그후 613년 네우스트리아 왕 힐페리히 1세의 아들 클로타르 2세가 나머지 두 왕국까지도 모두 물려받게 되어 다시 프랑크족 전체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639년 클로타르의 아들 다고베르트가 죽자 왕국은 네우스트리아·부르고뉴와 아우스트라시아 2부분으로 다시 나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 두 지역의 왕들은 권력의 상당 부분을 왕실 관리인 궁재에게 넘겨야만 했다.

후기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거의 허수아비 왕으로, 막강한 궁재들의 뜻에 따라 옹립되거나 내쫓겼다.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는 750년 아우스트라시아 출신 궁재인 단신왕 피핀 3세에 의해 퇴위당했고, 피핀은 결국 왕위를 빼앗아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