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데

콩데

다른 표기 언어 Louis II de Bourbon, 4e prince de Condé 동의어 루이 2세 드 콩데 친왕, Le Grand Condé, Duc d'Enghien
요약 테이블
출생 1621. 9. 8, 파리
사망 1686. 12. 11, 퐁텐블로
국적 프랑스

요약 프롱드의 난(1648~53)으로 알려진 일련의 귀족 봉기 가운데 마지막으로 일어난 봉기의 지도자.
별칭은 Le Grand Cond대체이미지. Duc d'Enghien이라고도 함.

콩데 (Louis II de Bourbon, 4e prince de Condé)
콩데 (Louis II de Bourbon, 4e prince de Condé)

나중에는 루이 14세의 가장 훌륭한 장군이 되었다.

콩데 공은 큰 영향력을 가진 저명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한 분가의 수장이었다. 콩데 공 4세는 콩데 공 3세인 앙리 2세 드 부르봉과 샤를로트 드 몽모랑시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콩데 공 4세는 처음에는 앙기앵 공작으로 불렸다. 앙기앵 공작은 아버지 덕분에 완벽하고 염격한 교육을 받아, 부르주의 예수회 학교에서 6년 동안 공부하고 파리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수학과 승마술을 배웠다. 공부가 끝나자 루이 13세를 알현했고(1636. 1. 19), 아버지와 함께 부르고뉴 공작령(이 공작령은 1631년부터 부르봉 왕가가 그 지위에 따른 특권으로 다스리게 되었음)으로 가서, 같은 해 9월 19일에 이곳에서 왕을 맞이했다.

아버지는 그가 피카르디 군대로 떠나기 전에 클레르 클레망스 드 마예 브레제(리슐리외 추기경의 조카)라는 어린 소녀와 약혼시켰다.

그는 1640년 7월 피카르디 군대와 함께 아라스 공격에서 활약했다. 젊은 공작은 파리 사교계의 핵을 이루고 있는 마르트 뒤 비장이라는 젊은 숙녀에게 열정을 품고 있었지만, 파리로 돌아온 직후인 1641년 2월 9일 약혼녀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강제 결혼은 결국 불신과 증오만을 낳았을 뿐이었다. 아내는 겨우 13세였고 부부 사이가 악화되기 시작하자, 리슐리외 추기경은 그를 나르본으로 소환했다(1642). 앙기앵 공작은 로크루아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해 스페인군에게 최초의 대승을 거두었다(1643. 5. 19). 이것은 프랑스군이 100년 만에 거둔 가장 큰 승리였고, 앙기앵 공작의 개인적인 노력이 그 승리를 가져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로크루아에서 승리한 데 이어, 라인 강 연안에 있는 티옹빌과 시에르크에서도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튀렌 원수와 함께 프라이부르크·필립스부르크·마인츠·뇌르들링겐에서 승리했으며 플랑드르에서도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1646)(로크루아 전투). 1646년 12월 26일 아버지가 죽자, 루이는 콩데 공의 작위를 물려받는 동시에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가 되었다. 마자랭 추기경(마자랭은 콩데 공의 공훈을 항상 불신했음)은 그를 스페인의 카탈루냐로 보냈다.

로크 루아 전투(Battle of Rocroi)
로크 루아 전투(Battle of Rocroi)

그는 1647년 6월 18일에 카탈루냐의 레리다에서 패배했지만, 플랑드르로 소환되자마자 랑스에서 또 한번 대승을 거두었다(1648. 8. 19~20).

그러나 프롱드의 난과 더불어 그의 운명도 바뀌었다. 제1차 프롱드의 난 때 그는 정부를 위해 파리를 포위 공격했지만(1649. 1~3), 이 내전이 끝난 뒤 정부의 구세주를 자처하며 너무나 거만하게 굴었기 때문에, 마자랭은 내전 때 적으로 싸웠던 사람들과 공모해 1650년 1월 18일 궁정에 와 있던 콩데와 그의 동생 및 그들의 매부인 롱그빌 공작(오를레앙의 앙리)을 체포했다.

이들은 1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자 그의 친구들은 제2차 프롱드의 난을 일으켰다. 이 난리는 콩데의 석방과 마자랭의 첫번째 망명으로 끝났다. 그러나 콩데는 루이 14세의 섭정인 모후에게 호의를 보이는 대가로 지나치게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했다. 모후가 이것을 도전으로 받아들이자, 그는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남서부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651. 9). 그는 파리로 진격해 한동안 튀렌이 지휘하는 왕의 군대와 맞설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정치적·군사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지킬 수 없게 되자 스페인으로 망명해(1652. 10) 스페인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1654년 11월 25일 프랑스의 반역자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4년이 넘도록 프랑스군과 싸우면서 승리와 패배를 번갈아 맛보았지만, 1658년 6월 14일에 됭케르크 전의 '뒨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피레네 강화조약(1659)이 맺어진 뒤 콩데는 파리로 돌아와 다시 왕의 호감을 샀고, 1660년 1월 27일 엑상프로방스에서 왕을 접견했다. 그때부터 그는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로 처신했지만 왕은 오랫동안 그에게 어떠한 군대 지휘권도 맡기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때 콩데는 폴란드 왕으로 선출될 계획을 세웠지만, 루이 14세의 지원을 얻어 단호한 조치를 취했는데도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왕이 되겠다는 야망을 그후에도 여러 해 동안 헛되이 추구했다.

1668년 왕이 마침내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는 프랑슈콩테에 대한 공격 지휘권을 그에게 맡기자, 콩데는 단 15일 만에 아르투아와 브장송, 돌 및 그레를 점령했다. 이로써 루이 14세의 총애를 완전히 되찾은 콩테는 튀렌과 함께 네덜란드 원정군을 지휘하게 되었다(1672). 그는 아른헴 근처에서 라인 강을 건너는 유명한 도하 작전 때 부상당했지만(1672. 6. 12), 알자스를 침략에서 지켰다.

그는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세네페에서 오라녜 공의 군대를 저지했고(1674. 8. 11), 오우데나르데 포위 공격을 풀었다. 이듬해 그는 루이 14세와 함께 플랑드르 군대를 이끌고, 튀렌의 죽음으로 위협받고 있던 알자스로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이곳에서 그는 오랜 숙적인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라이몬도 몬테쿠콜리와 다시 한번 대결했다. 몬테쿠콜리는 그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아그노 포위 공격을 풀고 라인 강 너머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원정이자 마지막 승리였다. 말년에 통풍에 걸린 그는 샹티이에 있는 자신의 궁정에서 가족과 친구,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둘러싸여 조용히 살았다. 그가 임종할 때 개종한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평생 종교를 갖지 않고 지낸 사람이 인생을 마치는 순간에 개종했기 때문이다.

콩데의 초상화와 흉상은 탐욕스러운 성격을 암시한다.

커다란 퉁방울눈과 눈에 띄게 아래로 굽은 부르봉 왕가 특유의 '부르봉 코'가 깡마른 얼굴을 지배하고 있으며, 고집스러운 입술이 뒤로 물러난 턱에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그는 분명 튀렌과 더불어 당대의 가장 위대한 지휘관이었지만, 억제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기질과 무한한 긍지(혈통 및 자신에 대한 자부심)를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의지는 어떠한 제약도 용납하지 않았고, 오만한 성격으로 자신과 대등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불신했다. 또한 폭넓은 지적 호기심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성향, 그리고 보기 드물게 건전한 정신의 독립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종교적 교리에 대해서도 반항적이었기 때문에 종교와 정치에 대한 그의 태도는 둘 다 비정통적이었다. 당시의 인습적인 기준에서 너무 많이 벗어난 콩데의 도덕적 기질과 철학은 그의 방탕한 젊은시절과 교리상 의문의 여지가 있는 관계(그가 이런 관계를 맺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철학자이자 종교의 교리를 부인하는 의사인 피에르 미숑 부르들로, 그리고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도 포함되어 있음) 및 종교의 의식을 존중하지 않는 적극적인 무신론(그를 가르친 예수회에 대해서는 충성을 바쳤지만)에 드러나 있었다.

그는 이런 특징 이외에 비할 데 없는 용기도 갖고 있었다. 낭트 칙령이 폐지된(1685) 뒤, 박해받는 프로테스탄트들을 도와주고 보호한 것만 보아도 그의 용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아르타멘, 또는 키루스 대왕 Artamène, ou le Grand Cyrus〉(1649~53)이라는 장편소설에서 그를 묘사한 스퀴데리에 따르면, 그는 교양 있는 사람이었고 예술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는 지방을 순회 공연하는 희극배우들을 부양했고, 장 드 라 퐁텐과 니콜라 부알로 및 몰리에르를 보호했으며, 장 드 라 브뤼예르를 아들 앙리 쥘의 가정교사로 선택했다.

군사 원정을 떠났을 때도 그는 골티에 드 코스트 드 라 칼프르네드의 소설과 리비우스의 역사 및 피에르 코르네유의 비극을 읽었다. 앙드레 르 노트르는 샹티이에 있는 그의 정원을 조경했고, 피에르 미냐르와 샤를 르 브룅은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그의 궁전 벽을 장식했으며, 앙투안 쿠아스보는 그의 유명한 흉상을 조각했고, 페렐과 장 브랭 형제는 그의 궁전을 풍경화로 그렸다. 그는 또한 보쉬에 주교와 프랑수아 페늘롱 및 니콜라 말브랑슈와 대화를 즐겼는데, 이들은 모두 샹티이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