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렌

튀렌

다른 표기 언어 Henri de La Tour d'Auvergne, vicomte de Turenne
요약 테이블
출생 1611년 9월 11일, 프랑스 스당
사망 1675년 7월 27일, 바덴바덴 자스바흐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군사 지도자, 육군 원수(1643~).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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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배경과 초기의 군사적 성공
  3. 독일 주둔프랑스군 사령관
  4. 프롱드의 난 참여
  5.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
  6. 마지막 전투

개요

루이 14세 시대에 가장 위대한 군사령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30년전쟁 때인 1625년 군인 생활을 시작한 그는 그후 프롱드의 난(1648~53)과 프랑스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침공했을 때(1667), 제3차 네덜란드 전쟁(1672~) 때 프랑스 군대를 지휘했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지도자로 추앙했다.

배경과 초기의 군사적 성공

튀렌은 프로테스탄트인 부용 공작 앙리와 그의 2번째 아내인 나소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엘리자베트는 네덜란드의 총독 빌렘 1세의 딸이었다. 1623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튀렌은 외삼촌인 마우리츠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밑에서 군대 생활을 배우도록 네덜란드로 보내졌다. 이 2명의 오라녜 공은 네덜란드에 주둔중인 스페인군과 싸우고 있었다. 튀렌은 1630년에 프랑스군 보병 1개 연대의 지휘를 맡았지만, 1632년에 프레데리크 헨드리크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1635년에 루이 13세의 장관인 리슐리외 추기경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전쟁(나중에 30년전쟁으로 명명됨)으로 프랑스를 끌어들이자, 튀렌은 준장(여단장)으로 라 발레트 추기경(루이 드 노가레) 밑에서 복무하기 위해 라인 강 연안으로 떠났다.

그는 마인츠에서 메스로 후퇴한 퇴각 작전의 영웅이었고, 1636년 7월에 사베른을 공격하다가 부상당했다. 리에주로 가서 프랑스군에 복무할 용병을 모집하는 임무를 마친 뒤, 1638년에 브라이자흐를 포위 공격하고 있는 작센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를 지원하기 위해 다시 라인 지방으로 보내졌다.

그는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베른하르트가 지휘하는 독일군의 존경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치러진 2차례의 전투는 1640년 9월 17일에 토리노를 점령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이 전투는 그의 명성을 더욱 확고하게 굳혀주었다.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 점령된 페르피냥을 포위하고 있던 1642년 튀렌은 부사령관이었다. 그무렵 왕의 총신인 생마르가 리슐리외 추기경을 해치려던 음모가 발각되어, 튀렌의 형인 부용 공작이 체포되었다. 튀렌은 루이 13세와 리슐리외에게 계속 충성을 바쳤지만, 부용은 자유를 얻기 위해 스당을 양보해야 했다.

1643년 루이 13세가 죽자 왕비인 오스트리아의 이 어린 루이 14세를 대신해 섭정을 했다. 안은 같은 해 튀렌에게 이탈리아 원정군의 지휘를 맡겼지만, 형의 행동 때문에 튀렌은 리슐리외의 후임자인 마자랭 추기경에게 의심을 받았다. 마자랭은 추가 병력을 전혀 보내 주지 않았지만, 안은 1643년 5월 16일 튀렌을 프랑스군 원수로 임명했다.

독일 주둔프랑스군 사령관

1643년 12월 3일 독일 주둔 프랑스군이 슈바르츠발트에서 뿔뿔이 흩어졌고 사령관은 죽었다는 소식이 파리에 도착했다.

튀렌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 패잔병(주로 작센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를 따라온 독일인들)을 효율적인 군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병력은 겨우 1만 명에 지나지 않았고, 적인 바이에른 군대보다 여전히 약했다. 이 사실은 1644~48년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라인란트는 폐허가 되었고, 튀렌은 독일 내부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 군량조달을 할 새로운 땅을 장악하지 않고는 어떤 작전도 펼치기 힘들었다.

따라서 다른 군대와 병력을 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644년에 튀렌은 바이에른군이 프라이부르크임브라이스가우를 점령하는 것을 지켜보고 도움을 호소하여, 콩데 공인 앙기앵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이 이끄는 소규모 부대와 합치게 되었다. 앙기앵 공작은 튀렌보다 10년이나 나이가 아래였지만, 원수보다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양쪽 군대의 지휘권을 모두 차지했다.

그래도 그들은 좋은 동료였다. 프라이부르크 근처에서 벌어진 3차례의 격렬한 전투는 바이에른군을 밀어붙여 라인 강 유역을 떠나게 했다. 앙기앵과 튀렌은 9월에 필립스부르크를 점령했고, 라인 강 유역의 도시들을 차례로 장악하면서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 빙겐까지 손에 넣었다. 1645년에 튀렌은 독일에 있는 프랑스의 동맹군인 스웨덴군과 합류하기 위해 뷔르템베르크를 가로질렀다.

그러나 5월 바이에른군의 기습을 받았고, 마리엔탈(메르겐트하임) 전투에서 군대의 절반을 잃었다. 튀렌은 낙오했고, 마자랭은 앙기앵을 보내 그를 구출했다. 두 사람의 연합군은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바이에른군과 대전했고, 도나우 강까지 진격했지만, 보병의 사상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라인 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646년 튀렌은 훨씬 강한 스웨덴군과 합류하려는 계획에 성공했지만, 마자랭 추기경은 그결과 프로테스탄트가 독일에서 우위를 차지할까봐 두려워했다.

튀렌은 베젤에서 라인 강을 건너, 카를 구스타프 브랑겔 원수가 이끄는 스웨덴군을 만났다. 두 사령관은 마인 강 연안에 있는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연합군을 피해 도나우 강으로 곧장 진격하여, 아우크스부르크와 뮌헨을 위협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와 협상을 시작했고, 울름 조약(1647. 3. 14)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맺은 동맹을 포기했다.

그러나 튀렌은 방해를 받았고, 마자랭이 독일군에게 뤽상부르에서 작전을 펼치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구출되었다. 이어서 군대가 보주 산맥에 도착하자, 독일 기병대가 반란을 일으켜 라인 강 너머로 돌아가버렸다. 3개월 동안 튀렌은 그들과 함께 독일 안으로 깊숙이 진격했다.

결국 그의 강력한 성격이 독일군을 감화시켜, 반란을 일으킨 독일군은 대부분 프랑스군으로 돌아왔다. 바이에른이 164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편으로 다시 돌아서자, 튀렌은 다시 스웨덴의 브랑겔 원수와 합류하여 도나우 강과 레흐 강에 이르렀고, 추스마르샤우젠 전투가 끝난 뒤에는 인 강까지 진격했다.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에 그렇게 가까이 접근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막시밀리안은 바이에른에서 달아났고, 페르디난트 황제는 30년 전쟁을 끝내는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에 동의했다.

프롱드의 난 참여

같은 해 프롱드의 난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마자랭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반란이었다. 튀렌은 가족의 이익과 콩데 공작의 누이인 롱그빌 공작 부인과의 우정 때문에, 마자랭의 인기 없는 재정 정책이 초래한 제1차 프롱드의 난에서는 반란자들 편에 서서 내전에 개입했다. 추기경은 당장 독일군을 지휘할 새 장군을 보내고, 그동안 밀린 봉급도 독일군에게 지불했다. 뤼에유에서 양측의 협상으로 타협안이 마련되고 있을 때, 튀렌은 네덜란드로 도망쳤다. 그는 이듬해 5월 파리로 돌아왔다. 마자랭이 1650년 1월 18일 너무 거만한 콩데 공을 체포하자, 튀렌은 다시 도망쳐 샹파뉴 동쪽 국경에 있는 스테네에서 공그빌 공작 부인을 만났다.

그들은 당시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스페인과 조약을 맺고, 튀렌이 레텔 전투(1650. 12. 15)에서 플레시 프라랭 원수(뒤의 수아죌 공작 세자르)가 이끄는 우세한 군대에 완패해 포로가 되는 것을 간신히 면할 때까지 샹파뉴에서 싸웠다.

마자랭이 파리에서 자발적으로 망명하고 콩데가 풀려나자, 튀렌은 1651년 5월 파리로 돌아왔지만, 그의 신용은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1651년 8월에 그는 확고한 프로테스탄트인 샤를로트 드 코몽과 결혼했다. 그는 콩데 파벌에 가담하지 않고 정치에서 초연한 입장을 유지했다. 1652년 3월에 튀렌의 형인 부용 공작이 루이 14세의 섭정인 안과 화해한 결과, 튀렌은 당장 왕의 군대 2개 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각각 4만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이 사단들은 콩데 및 그의 동맹자들과 싸우기 위해 루아르 강 연안에 집결해 있었다.

며칠 뒤 그는 자르조에 있는 다리를 봉쇄했다. 이 용감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작전 덕분에, 어린 왕은 반란군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면했다. 4월에 그는 블레노에서 콩데를 저지하고, 패배한 동료 오캥쿠르 원수(샤를 드 몽시)를 구출했다. 1652~53년 처음에는 루아르 강 연안에서, 다음에는 파리 근처와 샹파뉴에서 싸웠는데, 이때가 튀렌이 프랑스 왕조에 가장 훌륭하게 봉사한 기간이었다. 그는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수완이 뛰어나지 못했다면 적에게 압도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섭정의 궁정이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난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했고, 그결과 어린 루이 14세가 마침내 자신의 수도로 다시 들어올 수 있게 해주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

반란군을 무찌른 튀렌은 프랑스의 다른 지역에서 싸우던 정예 부대를 북동부지역에서 싸우는 부대의 증원군으로 파견하여, 그곳에서 콩데가 지휘하는 스페인군과 싸웠다(프랑스-스페인 전쟁). 싸움에 중대한 전기가 온 것은 튀렌과 그의 동료들이 3개의 참호선을 공격하여, 아라스를 포위하고 있는 스페인군을 축출한 1654년이었다.

1658년에 튀렌은 물리적 장애를 극복하고 됭케르크를 포위했으며, 진격하던 스페인군이 어리석게도 불리한 지형으로 들어가자, 그 지형을 교묘히 이용하여 '뒨 전투'(6. 14)에서 적군을 무찔렀다. 그는 이 승리로 됭케르크를 프랑스의 동맹국인 잉글랜드에 넘겨줄 수 있었고, 홀가분하게 플랑드르로 진격하여 이프르를 점령하고 헨트와 브뤼셀을 위협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결국 1659년에 피레네 강화조약을 맺었다. 튀렌의 작전 덕분에 프랑스는 2번째로 유리한 강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마지막 전투

1660년 4월 5일에 튀렌은 '프랑스군 대원수'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버리기만 하면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엄청난 명예였다. 그는 아내가 죽은(1666) 뒤인 1668년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버렸지만, 총사령관(전쟁 때의 직권상 총사령관)에 임명되지 못했다. 루부아 후작이 육군성을 발전시킨 덕분에 루이 14세가 직접 군대를 지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권한이양전쟁'(1667~68)과 네덜란드 침공(1672) 때 튀렌은 루이 14세 옆에서 행군했다.

네덜란드의 동맹군인 독일군이 라인 강 하류지역을 위협하자, 튀렌은 다시 라인 강 동쪽으로 파견되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병력은 1만 6,000명뿐이었고 지휘권도 왕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672~75년의 이 전쟁은 그에게 지속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거만한 육군 장관 루부아 후작이 군사 문제를 시시콜콜 통제하는 것을 괘씸하게 생각했지만, 루부아가 보내준 보급품 덕분에 겨울까지 적극적인 작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전략적으로 긴요한 한 수'를 잘 쓰는 대가였지만, 이번에는 더욱 대담했다. 그는 좀더 자주 싸움을 걸었고, 분견대의 잦은 공격으로 강력한 적이 약해지면 기회를 잡아 공격했다.

1673년 1월 그는 이미 한동안 독일군의 제휴 관계를 깨뜨렸고, 마르크 주를 침공하여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협상 탁자로 끌어냈다. 그는 또한 적군이 라인 강을 건너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해말에는 황제 레오폴트 1세의 군대에 대한 그의 광범위한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증원군만 있다면 그는 보헤미아까지도 진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부아는 그가 결정적인 작전을 벌이기 위해 필요한 증원권을 보내 주기를 거부했고, 튀렌을 소환하여 알자스를 지키게 했다.

그러자 레오폴트 황제의 군대는 본을 공격하여, 라인 강 하류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권을 완전히 분쇄했다.

1674년에는 훨씬 우세한 독일군이 라인 강으로 진격했다. 튀렌은 6월 16일 하이델베르크 근처에 있는 진차이에서 분견대를 무찌르고, 팔츠 지역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러나 9월에는 다시 라인 강 서쪽에 있었고, 진격하는 적의 주력 부대를 막을 수 있다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상태였다.

10월 4일에 그는 스트라스부르 근처에 있는 엔차임에서 적의 주력 부대를 공격했지만, 결정적인 시기가 오기 전에 후퇴했다. 브란덴부르크 군대까지 황제군에 가세하자, 5만 7,000명의 적군은 알자스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보였다. 튀렌은 12월에 그의 행군 가운데 가장 유명한 행군으로 응수했다.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보주 산맥의 프랑스 쪽을 따라서 행군한 다음, 벨포르에서 다시 나타나, 1675년 1월 5일 투르크하임에서 적의 주력 부대 옆구리를 강타했다.

이 타격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다시금 라인 강 너머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알자스는 수복되었다. 1675년 6월 튀렌은 라인 강 오른쪽 연안에서 신성 로마 제국을 위해 싸우는 이탈리아군 원수 라이몬드 몬테쿠콜리에 맞서서, 스트라스부르 근처의 도하 지점을 장악하기 위해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양쪽 군대는 자스바흐에서 마주쳤다. 튀렌이 지점을 살펴보고 있을 때 대포알이 날아와 그에게 명중했다. 1675년 7월 27일이었다. 그는 생드니에 프랑스 왕들과 나란히 묻혔다. 나중에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그의 유해를 파리의 앵발리드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