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자랭

마자랭

다른 표기 언어 Cardinal Jules Maza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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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02. 7. 14, 나폴리 왕국(지금의 이탈리아) 아브루치 페시나
사망 1661. 3. 9, 프랑스 뱅센
국적 프랑스

요약 1642년 리슐리외 추기경의 사망 이후 총리에 올랐으며, 루이 14세 집권초 유럽 열강들 가운데 프랑스의 우위를 확립하고 국내적으로는 반대세력을 무력화해 왕권에 복속시키려 했던 리슐리외의 과업을 완수했다. 마자랭은 로마 근처 아브루치의 페시나에 있는 교황령에서 출생했는데 그가 유년기를 보낸 곳의 기질과 사고방식 및 가톨릭적인 시각 등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어린 국왕 루이 14세를 대신해 총리에 임명된 후, 마자랭은 가톨릭을 신봉하는 유럽 열강들 사이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1648년 10월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졌는데 이 조약은 독일에 평화를 확립시킨, 유럽 전체의 결정이었다. 국내문제에서도 마자랭은 온건한 정책을 추구했으며 1658년 솔로뉴 농민반란과 같은 대중봉기에 대처할 때에도 유화정책을 취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교황청 외교관 생활
  3. 프랑스 총리
  4. 명성과 성격
마자랭(Cardinal Jules Mazarin)
마자랭(Cardinal Jules Mazarin)

개요

1642년 리슐리외 추기경의 사망 이후 총리에 올랐으며, 루이 14세 집권초 유럽 열강들 가운데 프랑스의 우위를 확립하고 국내적으로는 반대세력을 무력화해 왕권에 복속시키려 했던 리슐리외의 과업을 완수했다.

교황청 외교관 생활

마자랭은 로마 근처 아브루치의 페시나에 있는 교황령에서 출생했는데 그가 유년기를 보낸 곳의 기질과 사고방식 및 가톨릭적인 시각 등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는 시칠리아 출신으로 가톨릭에 귀의한 인물이었으며 컨스터블인 필리포 1세 콜론나의 영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어머니 오르텐시아 부팔리니는 토스카나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콜론나 가문과 사돈관계였다. 부친 피에트로는 일찍부터 막강한 후원자를 둠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눈을 떴으며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후원자를 이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대가족(마자랭 이외에 수사가 된 또 1명의 아들과 딸 넷 등 모두 6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음)을 부양해야 하는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 마자랭을 로마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보냈다. 마자랭은 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나타냈다.

마자랭은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난 콜론나 가문의 여러 젊은이들과 함께 알칼라데에나레스대학(지금의 마드리드대학)에서 학업을 마쳤다. 이 대학에서 그는 법학을 공부했으며 로마로 돌아온 후에는 귀족의 생활양식과 세속문제에 관해 좀더 많은 것을 공부하고자 힘썼다.

1624년 콜론나 가문 소속으로 그는 교황청 군대에서 대장직을 맡았는데 로레토에서 근무하던 중인 1625년 성탄절 밤 '영혼의 평안함'과 같은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했으며 이 경험은 평생토록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교황청의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면서 1628년 밀라노 주재 교황특사인 G. F. 사케티의 비서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마자랭이 적극적인 정치적 역할을 담당할 최초의 기회였다.

만토바 공국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스페인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던 중인 1630년 1월 사케티 특사의 후임자인 안토니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에 의해 마자랭은 프랑스에 파견되어 리슐리외 추기경과 협상을 벌였다(→ 만토 상속전쟁). 마자랭은 리슐리외에게 매료된 나머지 "전적으로 그에게 헌신하기로 결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0월 26일 몬페라토의 카살레에서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전투가 막 벌어지려고 할 때 마자랭은 말을 타고 양쪽 진영을 오가며 마치 평화조약이 체결된 듯이 "평화, 평화!"를 외치고 다녔으며 이로 인해 마자랭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평생 동안 마자랭은 목숨을 걸고 양쪽 군대를 오가며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막았던 용맹스런 기사로 기억되었다. 스페인 군대가 카살레를 포위하고 공세를 가했으나 상황은 전반적으로 타협을 하자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마자랭의 중재로 1631년 6월 19일 케라스코 조약이 맺어짐으로써 프랑스측 후보자가 만토바 공국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합의는 단지 프랑스와 사보이 왕가 사이의 견해차이를 해소한 것에 불과했다.

리슐리외에게 헌신하기로 한 마자랭의 결심은 교황 우르바누스 8세의 막내 조카인 바르베리니 추기경의 후원을 얻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1632년 그가 로마로 돌아온 후 바르베리니는 그를 미술가·음악가의 모임에 가입시켰으며 이어 1634년 그를 교황 특사로 임명해 프랑스 궁정에 파견했다. 프랑스 궁정에서 리슐리외의 편에 선 마자랭은 실권자들로부터 신망을 얻었으며 자신에게 개방적인 태도로 강한 인상을 심어준 프랑스 국민들에게 헌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르바누스 8세가 의도했던 스페인과 프랑스의 평화협상 중재라는 사명을 망각하지는 않았다.

이같은 정황에 비추어볼 때 1635년 5월 리슐리외가 프랑스를 30년 전쟁으로 끌어들이자 마자랭은 실망한 듯하다.

마자랭은 교황특사로서 아비뇽으로 소환되었으며 1636년 12월에는 다시 로마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로마에 있으면서도 리슐리외 및 그의 고문 조제프 신부와 서신왕래를 하면서 프랑스 정치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분을 맺고 있던 바르베리니 추기경, 니콜라스 바니 추기경, 알레산드로 비키 추기경과 함께 마자랭은 교황청 내에서 친(親)프랑스파를 이끌었다.

마자랭의 이러한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의 루이 13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천거했으며 그에게 성직록과 연금을 지급했다(성직록과 연금수혜의 자격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1639년 마자랭에게 프랑스 국적취득 문서를 하사했음). 이와 함께 그는 마침내 파리로 귀환하도록 초청받았다. 그는 로마에서 친스페인파에 의해 자신의 야망이 꺾인 데 실망한 나머지 교황청의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프랑스 정부의 관리가 되기로 결심해 1640년 1월 5일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뒤 그는 교황으로부터 추기경에 임명되었는데(1641. 12. 16), 이는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옛날 마자랭이 자신의 휘하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질적 요인은 프랑스, 특히 리슐리외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총리

마자랭은 가톨릭을 신봉하는 유럽 열강들 사이의 적대관계를 청산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리슐리외의 사망(1642. 12. 4) 이후, 특히 루이 13세의 사망(1643. 5. 14) 후 당시 섭정이던 오스트리아의 (Anne)은 마자랭의 능력과 경험을 믿고서 어린 국왕 루이 14세를 대신해 그를 총리에 임명했다. 마자랭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1644년 4월 10일 베스트팔렌의 뮌스터에서 열린 평화협상을 추진했다. 한편 그의 이상은 평화였지만 이제는 프랑스의 외교정책과 야망을 위해 자신의 이상을 잠시 접어두어야만 했다.

그는 뛰어난 자질을 갖춘 외교관들을 확고하게 통솔하면서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콩데 공(公)인 루이 2세 드 부르봉과 앙리 드 튀렌처럼 뛰어난 군인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았다.

이들 군인들이 스페인 군대와 신성 로마 황제군을 물리치고 거둔 눈부신 승리에 힘입어 1648년 10월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졌는데 이 조약은 독일에 평화를 확립시킨, 유럽 전체의 결정이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유럽 북부와 동부 지역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계속 증폭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은 손쉽게 전면 전쟁으로 빠져들 수 있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 프랑스-스페인 전쟁). 당시 신성 로마 황제가 제국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자랭은 제국의 힘이 취약한 것을 기회로 삼아 프랑스 변경지방에 가장 인접한 독일의 연방들과 방위동맹을 형성했다(1658. 8. 라인 동맹). 그러나 네덜란드가 1648년 1월 별도의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프랑스 진영으로부터 이탈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스페인은 강화 체결을 거부했다. 마자랭은 스페인이 평화협정을 받아들이게끔 전쟁을 계속하는 한편 1657년 3월 23일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마자랭은 영국과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1658년 6월 14일 뒨 전투에서 스페인의 됭케르크 요새를 빼앗아 영국측에 양도했다.

1659년 11월 7일 피레네 변경지역에서 체결된 협정으로 마침내 스페인과의 평화교섭이 이루어졌다. 마자랭은 '북부평화'(1660년 5월 3일의 올리바 조약과 6월 6일의 코펜하겐 조약)의 중재를 통해, 또한 로렌 지역을 로렌 공작에게 반환(1661. 2. 28, 파리 조약)함으로써 교섭을 마무리지었다.

한때 교황청의 외교관을 지내고 이제 죽음을 앞둔 마자랭은 이로써 그리스도교 세계에 평화를 안겨다주는 기쁨을 다시 누릴 수 있었다. 그는 투르크족에 맞선 십자군 운동에 유럽국가들이 다 같이 참여함으로써 이러한 평화를 누리는 모습을 지켜보고자 했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유럽인들이 자국 내에서 전투가 종식됨으로써 마련된 평안의 결실을 만끽하는 광경을 즐거운 심정으로 바라보기를 기원했다.

사실 프랑스는 휴식이 필요했다. 따라서 마자랭은 궁정 내부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고 전비(戰費) 충당을 위한 재정조달 수단을 확충하는 데에만 힘을 쏟아야 했다. 그러나 파리의 유력인사에게 부과한 새로운 세금은 불만을 야기했으며 이는 프롱드의 난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5년 이상 지속된 프롱드의 난은 애초 파리 고등법원 내 과두권력독점세력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그 위세는 상층귀족 계층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반란은 이내 지방의 일반 대중들로부터도 지지를 얻었는데 그 주요원인은 마자랭을 공격하는 내용의 선동적인 팜플렛 〈마자리나드 Mazarinades〉의 영향 때문이었다. 마자랭은 2차례나 궁정을 떠나야 했으나 자신이 세심하게 교육을 담당했던 어린 루이 14세와 오스트리아의 안에게서 총애를 받았으므로 간신히 총리직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653년 마침내 프롱드의 난이 진압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루이 14세가 왕위에 올랐다.

마자랭은 어린 루이 14세를 점차적으로 국정에 관여시켰으며 의회에 맞서 단호한 입장을 취하도록 장려했다. 또한 장 바티스트 콜베르, 니콜라 푸케, 위그 드 리온, 미셸 르 텔리에 등 이후 루이 14세의 치세 동안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행정참모들을 육성시키는 데 기여했다. 마자랭은 국왕 휘하의 감독관직을 부활시켰는데 이들은 프롱드의 난 시기에 미덥지 못한 존재임이 입증되었던 지방총독들로부터 권력을 인수했다.

그리하여 마자랭은 온건한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질서유지에 성공했으며 1658년 솔로뉴 농민반란과 같은 대중봉기에 대처할 때에도 유화정책을 취했다.

명성과 성격

마자랭의 적들은 그의 탐욕을 비난했다. 그는 관직을 겸임하고 봉록을 축적했으며 때로는 왕실수입을 자신의 돈과 혼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재정이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재산으로 국고를 충당하기도 했다.

예술을 애호했던 그는 훌륭한 예술품들을 수집했으며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파리에 있는 자신의 저택(지금은 국립도서관이 되었음)을 장식했다. 또한 로마의 오페라를 프랑스에서 공연시켜 인기를 끌게 했다. 4개국대학(College of the Four Nations)을 위해 세운 궁정에는 그의 도서관(지금은 프랑스 학술원으로 불림)이 남아 있는데 4개국대학은 그가 총리직을 수행하던 시기에 프랑스 영토가 된 4개의 주(州), 즉 알자스·루시옹·플랑드르아르투아·피네롤로 지역 출신 청년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1648년에는 왕립회화조각 아카데미를 창설했으며 몇몇 문인들에게는 후원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로마식의 족벌주의 전통에 따라 그의 조카들과, 특히 만치니 가문과 마르티노치 가문의 질녀들에게는 귀족과의 혼사를 주선했으며 상당한 지참금을 주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삼촌으로서의 호의를 베풀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조약에 의해 스페인의 왕녀와 혼인하게 되어 있던 루이 14세가 마리 만치니와 결혼하고자 원했을 때에는 이를 막았다. 오스트리아의 은 마자랭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마자랭은 용모가 준수했으며 유창한 언변에다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정치적 경험이 전혀 없었던 안은 마자랭의 조언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다. 팜플렛 〈마자리나드〉가 안과 마자랭의 불륜 관계를 비난했으나 그 증거는 불확실하고 두 사람이 비밀결혼을 했다는 가정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자랭이 비록 성직에 종사하지는 않았으나 추기경 직위를 갖고 있었으며 이는 독신생활을 의무로 삼아야 함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자랭은 특히 1651년과 죽기 직전인 1660년 등 몇 번씩 사제직 입문을 고려하기도 했었으나 사제서품을 받지는 않았다(1632년 하급서품만을 받았음).

젊은시절 이후 줄곧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이단적인 성격의 얀센주의 운동에 맞서 정통교리를 옹호했다. 그러나 얀센주의 운동을 박해하는 것에는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