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

로렌

다른 표기 언어 Lorraine 동의어 로트링겐, Lothringen
요약 테이블
위치 프랑스 북동부
인구 2,369,813명 (2022년 추계)
면적 23,547㎢
대륙 유럽
국가 프랑스

요약 프랑스 북동부의 보주·뫼즈·뫼르트에모젤·모젤 주들을 포함하는 계획지구. 대체로 옛 로렌 지방과 일치하며 중심지는 메스이다. 카롤링거 왕조의 황제인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세 아들들이 베르됭 조약에 따라 프랑크 왕국 영토를 셋으로 나누었고, 그중 로타르의 자식이 차지한 로타링기아가 역사의 시작이다. 이후 959년 안더나흐 북쪽에 있는 라인 강변의 한 지점에서 서쪽과 남서쪽으로 메지에르 북쪽에 있는 뫼즈 강변의 한 지점까지 경계선이 만들어졌고, 로타링기아는 남쪽의 상로렌과 북쪽의 하로렌으로 분할되었다. 11세기에 들어 하로렌 공작령이 브라반트 공작령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상로렌을 지금의 로렌이라 부르게 되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로타링기아
  3. 상로렌과 하로렌
  4. 로렌 공작령
메스(Metz)
메스(Metz)

개요

대체로 옛 로렌 지방과 일치하며 중심지는 메스이다. 서쪽으로 아르덴·마른 주, 남쪽으로 오트마른·오트손 주, 동쪽으로 오랭·바랭 주들과 접해 있고 독일·룩셈부르크·벨기에 남쪽에 자리잡았다.

로타링기아

카롤링거 왕조의 황제인 경건왕(敬虔王) 루트비히 1세의 세 아들들은 베르됭 조약(843)에 따라 프랑크 왕국 영토를 셋으로 나누었다. 그결과 프랑키아오키덴탈리스는 대머리왕 카를 2세, 프랑키아오리엔탈리스는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돌아갔고, 황제 로타르 1세는 저지대(북해 연안지역으로 지금의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이탈리아에 걸친 프랑키아메디아를 차지했다. 그는 855년 프랑키아메디아를 분할해 자기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큰아들 루트비히 2세는 황제 칭호와 이탈리아를 얻고, 동생인 로타르는 북부지역을 얻게 되었는데 이 지방은 로타르의 왕국이란 뜻인 로타링기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로타링기아는 북쪽으로 북해, 그리고 동쪽으로 엠스 강 어귀에서 베젤에 이르는 길과, 아레 강과 합류하기 전의 라인 강 남쪽에 접해 있었다. 그러나 국경선이 서쪽으로 옮겨지면서 마인츠·보름스·슈파이어는 독일에 넘어갔다. 남쪽으로는 아레 강과 쥐라 산맥, 서쪽으로는 두 강과 합류하는 바로 남쪽 지점부터의 손 강 및 오르냉·뫼즈·셸드 강들이 맞닿아 있었다.

로타르가 869년에 후계자 없이 죽고 난 뒤 이 지역을 놓고 계속 분쟁이 있었으며 결국 925년 독일 왕 하인리히 1세가 이곳을 정복하고 로타링기아 공작령을 세웠다. 그의 뒤를 이은 오토 1세는 이 공작령의 통치를 쾰른 대주교인 동생 브루노에게 위임했다.

상로렌과 하로렌

959년 브루노는 안더나흐 북쪽에 있는 라인 강변의 한 지점에서 서쪽과 남서쪽으로 메지에르 북쪽에 있는 뫼즈 강변의 한 지점까지 경계선을 만들고, 로타링기아를 남쪽의 상로렌과 북쪽의 하로렌으로 분할했다. 하로렌은 라인 강, 뫼즈 강 중류, 셸드 강 사이의 독일 왕국에 속하는 옛 네덜란드의 대부분을 포함했고, 상로렌은 아르덴 강, 모젤 강 유역, 뫼즈 강 상류 주변을 포함했다. 브루노가 죽은(965) 뒤에도 이들 두 공작령은 1033~44년을 제외하고는 계속 분리되어 있었다. 12세기초 림부르흐·에노·루뱅·나뮈르 백작령들은 날로 성장하며 하로렌 공작령에 맞섰고, 1190년 하로렌 공작 앙리는 로티에르(하로렌) 공작 칭호를 버리고 브라반트 공작 앙리 1세(1235 죽음)라는 칭호를 취했다.

로렌 공작령

하로렌 공작령이 브라반트 공작령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상로렌은 로렌이라 부르게 되었다.

샤트누아 출신 제라르와 그의 남자 후손들이 1048~1431년에 이곳을 다스렸다. 그러나 봉건 왕조들의 세력이 커지고 로렌 내에 있는 메스·툴·베르됭 주교들의 세속적 권력이 늘어남에 따라 로렌 공작의 권위는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북쪽에서는 룩셈부르크 백작, 서쪽에서는 바르 백작에게 위협을 받았다. 1070년부터는 로렌 공작령 통치 가문의 한 하급분가(下級分家)가 남서쪽에 있는 보데몽 백작령을 차지했다. 결국 낭시를 수도로 삼고 있던 로렌 공작령의 통치자들은 독일 왕이나 신성 로마 황제 같은 대군주들에게 보호를 요청하려 했고, 1250년부터는 너무 세력이 약해져 차츰 밀고 들어오는 프랑스와 부르고뉴의 침입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1480년 로렌은 바르·보데몽과 합쳐졌으나 그뒤에도 계속 잔존했으며 16세기 후반에는 번영의 최절정에 달했다.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 지배는 17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신성 로마 황제 가문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 왕들은 로렌 통치권을 놓고 자주 싸움을 벌였다. 프랑스는 이미 1552년 메스·툴·베르됭을 차지해 거점을 확보했고 17세기의 종교전쟁 때는 여러 번 로렌을 정복했다.

폴란드 왕위계승전쟁(1738)을 매듭지은 조약들에 따라 로렌은 폴란드의 전왕이며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장인인 스타니수아프 1세에게 넘어갔다. 1766년 스타니수아프가 죽자 로렌은 낭시를 수도로 하여 왕실이 파견한 행정관의 관리 밑에서 행정지구(généralité)로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이는 프랑스 혁명(1790) 때 다시 주들로 분할되었다. 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했을 때 알자스와 함께 로렌의 일부가 독일제국에 합병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에 반환되었다(알자스로렌).

로렌에 있는 광산과 공장들이 많은 고용기회를 제공하는 데도 불구하고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20세기에 들어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1901~46년에 나타난 인구감소율 4%는 같은 기간 동안의 프랑스 대부분 지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적은 수치이며, 그 뒤로는 전국 평균인구증가율에 근접한 수준에서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인구는 뫼르트에모젤과 모젤에서 더 많이 늘어나고 있으며 뫼즈와 보주는 여전히 인구가 적은 상태이다. 낭시와 티옹빌 사이에 모젤 강을 따라 인구가 많이 몰려 있으며 보주, 뫼즈 서부, 뫼르트에모젤 남부는 시골지역으로 남아 있다.

이농 때문에 가축사육이 널리 보급되어 낙농업이 농업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보리가 밀을 대신하여 이 지역의 주요작물이 되었다. 포도재배는 대체로 툴 주변지역에 한정되어 있고 삼림이 토지의 1/3 이상을 덮고 있다.

포르바슈 주변에 집중된 석탄 생산은 1960년 이후 급격히 감소했다. 은 브리에(뫼르트에모젤)·롱위·티옹빌 주변에서 채광된다. 하지만 철 생산은 고급 철광석의 수입 때문에 줄어들었고, 그 영향으로 금속가공업이 위축되었다. 뫼르트에모젤에서는 동바슬쉬르뫼르트 주변에서 암염(巖鹽)을 캐낸다.

베를린·암스테르담·브뤼셀·바젤·밀라노와 철도로 연결되는 로렌은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성립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득을 보고 있다. 1974년 문을 연 지방공원은 뫼즈·뫼르트에모젤·모젤 주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동쪽에 있는 보주 산맥의 대산괴를 제외하고 로렌은 파리 분지에 속한다.

지도
로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