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수아프 1세

스타니수아프 1세

다른 표기 언어 Stanislaw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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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77. 10. 20, 폴란드 르부프
사망 1766. 2. 23, 프랑스 뤼네빌
국적 폴란드

요약 폴란드의 왕(1704~09, 1733 재위).
본명은 Stanisław Leszczyński.

국가 위기에 왕위에 올라 폴란드를 지배하려는 외국 열강들의 희생물이 되었다.

폴란드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나 서유럽에서도 교육을 받았다. 북유럽 열강들 사이에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중에 1702년 스웨덴 왕 카를 12세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당시 카를은 폴란드 귀족들이 국왕 아우구스트 2세(작센 왕가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를 퇴위시키도록 강요하고 스타니수아프를 왕위에 앉혔다(1704). 무력하고 분열된 폴란드는 외국 군대들이 멋대로 약탈하고 활개치는 무대가 되었다.

1709년에 카를이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에 패하고 스웨덴으로 물러나자 스타니수아프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아우구스트 2세가 다시 폴란드 왕위를 차지했고, 스타니수아프는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 정착했다. 1725년에 그의 딸 마리가 프랑스의 루이 15세와 결혼했다.

1733년 아우구스트가 죽자,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폴란드 왕위를 되찾기 위해 그는 변장을 하고 바르샤바로 들어간 뒤 폴란드 의회에서 압도적인 다수표를 얻어 국왕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처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그가 스웨덴-프랑스 동맹에 가담할 것을 우려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폴란드를 침공해 국왕선출을 무효로 만들었다. 그는 또다시 왕위를 잃었고, 러시아의 압력 아래 의회의 소수파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를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3세로 선출했다.

스타니수아프는 그다인스크(단치히)로 후퇴하여 프랑스의 도움을 기다렸으나, 프랑스는 끝내 지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그다인스크가 러시아의 포위 공격에 함락당하기 직전에 그곳을 탈출해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로 가서, 새로운 왕과 왕을 지지하는 러시아인들에 대항해 유격전을 벌였다. 1738년에 맺어진 빈 평화조약은 아우구스트 3세를 폴란드 왕으로 인정했지만, 스타니수아프에게도 왕의 칭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로렌과 바르 지방을 주었다. 그는 로렌에서 훌륭한 행정가의 자질을 보여주었고, 경제 발전을 촉진시켰다. 뤼네빌에 있는 그의 궁전은 문화 중심지로 유명해졌으며, 그는 낭시에 과학 아카데미와 군사학교를 설립했다. 1749년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자유로운 목소리 Free Voice to Make Freedom Safe〉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 자신이 제안한 폴란드 헌법 개정안의 윤곽을 설명했다. 딸 마리에게 보낸 편지(1901)와 프로이센 왕 및 베르사유 주재 대사인 자크 윌랭에게 보낸 편지(1920)가 각각 책으로 출판되었다.